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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category 리뷰/책 2013. 7. 13. 21:17


1. 저자 조사: 서중석

서중석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학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2010년 현재 「역사비평」편집주간 겸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이다.

1990년에 통과된 그의 논문《한국근현대민족운동연구》은 현대사 연구로는 국사학계에서 처음으로 나온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 논문을 통해 '한국 현대사 박사 1호'를 기록했다.

 

1) 학력 및 경력

  • 1948. 충남 논산군 연무읍 출생
  • 1967. 3.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입학
  • 1974. 3. 반유신체제 운동을 벌이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제적
  • 1984. 8.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복학 및 졸업
  • 1984. 9~1987. 8.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취득
  • 1988. 3~1990. 8.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 1979. 2~1988. 9. 동아일보사 신동아부 기자
  • 1986. ~ 2013.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 연구위원, 주간, 부소장, 이사, 소장을 거쳐 이사장 역임
  • 1991. ~ 2013.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2013. 8 정년퇴임 예정)
  • 1990. ~ 2013. 독립기념관 연구소 비상임 연구위원
  • 1994. ~ 2009.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자문위원
  • 2000. ~ 현재.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 2001. ~ 현재.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옛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 2004. ~ 2010. (사)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이사장
  • 2004. ~ 2006.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
  • 2003. 10~2009. 10 국사편찬위원회 위원(14-15대)
  • 2007. ~ 2013.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장
  • 2005. ~ 2009.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

 

2) 저서

  •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역사비평사, 1988
  •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연구], 지식산업사, 1989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1948-1950 민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사비평사, 1996
  • [조봉암과 1950년대 상.하], 역사비평사, 1999
  • [남북 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한울, 2000
  •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 [비극의 현대 지도자 :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2(2007년 일본어판 출간)
  •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4(2007년 영어판 출간)
  •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5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씽크빅, 2005(2013년 개정증보판 출간)
  • [한국현대사60년], 역사비평사, 2007(2008년부터 일본어, 영어, 중국어, 독일어, 불어판 출간)
  •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07
  •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역사비평사, 2008
  •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조명], 돌베개, 2010
  • [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돌베개, 2011

 

3) 수상

  • 제16회 단재상 학술부문

 

4) 작가의 한 마디

"한국의 뉴라이트와 일본의 극우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유주의 사관이라고 주장하고, 엘리트나 지배자 중심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그 지배자, 엘리트의 통치를 미화하는 관점에서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거꾸로, 희망이다 2009-6-30)

 

2. 초서

1)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하여

1945

8월 15일 해방, 여운형 등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착수

10월 16일 이승만 귀국

11월 23일 김구 등 임정 요인 귀국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1946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출범

10월 1일 10월항쟁 발발

1947

5월 21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

7월 19일 여운형 암살

11월 14일 유엔총회의에서 남북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 결의

s1948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선거 결의

4월 26일 남북협상

[31] 한국의 독립문제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강대국들에 의해서 논의되었다.

 

[33] 38선을 경계로 한 미, 소 양군의 한반도 점령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직후에 미국에 의해 입안되었고, 소련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8월 15일부터 활동에 들어간 건준에는 중도좌파인 여운형(위원장)과 중도우파인 안재홍(부위원장)을 비롯하여 좌우가 고루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미군 상륙설이 나돌고 송진우 측이 중경 임시정부 추대를 내세우자 안재홍을 비롯한 우익은 건준 중앙에서 이탈했다.

 

[34] 9월 6일 조선공산당의 주도로 건준을 확대 개편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한 것은 성급한 행동이었다.

전국의 인민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고, 우익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정적 결함이 있었다.

  • 만약 건준이 좌우합작으로 주체적인 건국사업을 계속 유지해나갔다면 어떠했을까?

    좌우가 서로의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하고 보듬어주었다면.

 

[43] 미군은 오히려 한국인을 경계하고 한국인을 괴롭힌 일본인 관리들을 상당기간 그대로 근무하게 했다.

또한 친일 행위가 명백한 한국인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근무하게 했다. 일제통치기구도 대부분 존속되었다.

 

[68] 조숙한 냉전론자인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단정 수립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았다.

미국이 좌익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은 틀림없지만, 미군정과 미국 정부는 김규식 등의 개혁적인 중도파 정치인을 지원했다.

미국은 소련과 협의하여 한국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77]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우익 3영수로 불렸다. 그렇지만 세 사람은 성격도, 살아온 역정도, 지향하는 바도 판이했다.

김구는 자신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였다.

개혁성향을 지닌 김규식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하루빨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는 그 이후에 반대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친일파와 자주, 부르주아를 주요 세력 기반으로 한 이승만은 분단 노선을 지향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으로 이승만에게 서광이 비쳤고, 냉전이 세계적 규모로 가시화되었다.

 

2) 분단정부 수립과 전쟁의 참화

1948

4월 3일

5월 10일

8월 15일

9월 22일

10월 19일

12월 1일

제주 4 3항쟁

제헌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공포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여순사건

국가보안법 공포

1949 

6월 26일

백범 김구 피살

1950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952 

5월 26일

7월 4일

부산 정치파동 시작

기립 표결로 발췌 개헌안 통과

1953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1954 

11월 29일

야당 퇴장 속에 위헌적인 사사오입 개헌 통과 선포

1956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이승만, 신익희, 조봉암의 각축전)

1958 

1월 1일

조봉암 진보당 사건

12월 24일 국가보안법 개정안(신국가보안법) 통과

1959 

4월 30일

7월 31일

4월 30일 《경향신문》 폐간

7월 31일 조봉암 사형

 

[111] 정부 수립 후 대규모 유혈 사태가 잇달아 발생했다. 제주 4 3 항쟁과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부닥친 첫 번째 시련이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군인과 경찰에 의해 엄청난 인명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4 3봉기는 5 10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났는데, 1947년 3 1시위 이후 남로당과 제주도민이 당한 억압과 수탈 등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기본적으로 작용했다.

 

[113]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14연대 이부 병력이 제주도 진압군으로 출동 명령을 받은 10월 19일 지창수 상사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국군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에 있는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를 처단하는 대규모 숙청사업을 벌였다.

 

제주 4 3항쟁과 여순사건에서 참혹한 대규모 학살을 직접 경험하거나 학살에 관한 소문을 들으면서 공포가 확산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져 극우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유력한 무기로 이용되었다.

 

[121] 간부 대다수가 친일파였던 경찰의 6 6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친일파 처단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1950~1970년대에 걸쳐서 친일파가 정계나 관료, 군대, 경찰, 정치계, 학술문화계를 지배하는 사태가 왔다.

 

[131] 북이 우세한 공격력을 가진 것은 명백했지만, 초기에 국군이 참패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 등의 책임이 컸다.

 

[136] 미국에서의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한국과 다르다. 한때 '미국의 카이사르'로서 추앙 받기도 했으나,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맥아더가 미국에서와 달리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국을 공산화의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반공주의적인 시각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듯이 그에 대한 평가도 바뀌어야 한다.

 

[142] 전쟁은 전쟁에 의한 통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깨닫게 했다. 그런가 하면 남과 북에 극단적인 정치체계가 들어서게 하는데 일조했다.

또한 학살, 부역자, 연좌제는 끔찍한 공포의 기억을 되살려 전쟁에서의 다른 고통과 함께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전쟁으로 인한 육군의 팽창은 거대 조직을 탄생시켰고, 이 조직은 권력을 탐냈다.

 

[155] 29일 야당 의원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개헌안 부결 번복가결동의안이 통과되었다고 선포되었다.

사사오입 개헌에 따르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이 철폐되고, 국무총리제와 국무원연대책임제를 폐지하여 대통령중심제를 강화하며,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문제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사회주의적 또는 통제경제적 헌법 조항도 자유경제 체제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 집권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사사오입 개헌은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3) 새로운 사회의 출현

 

[177] 한국 사회는 전쟁이 끝났을 때 놀라울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178] 평준화는 사회적 권위가 부재하고 문화 수준도 낮은 상황에서 급속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저질 평준화라고 볼 수 있는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부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뛰게 했다.

이 때문에 치열한 경쟁 사회가 도래했지만, 누구나 부와 지위를 기대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그것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육으로 인식되었다.

 

[183] 이승만 정권기 교육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학도호국단과 반공교육이다.

교장을 단장으로 하고 학생이 학도부장이나 대대장을 맡는 군대식 편제로 구성된 학도호국단은 멸공의식의 앙양을 주요 목표로 내걸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반공행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특히 반공주간에는 그러한 활동이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198] 전쟁은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미망인이나 남편의 부상으로 미망인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210] 대한노총은 미군정기에 탄생할 때부터 힘깨나 쓰는 청년 단체 출신들이 많아 노동운동 단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211] 대한노총은 각종 선거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지지운동을 펼쳤다.

 

[221] 1950년대에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고통의 상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은 문학을 낳고, 문학은 휴머니즘을 낳았다.

 

4)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1960

2월 28일

3월 15일

4월 11일

4월 19일

4월 25일

4월 26일

4월 28일

6월 15일

8월 23일

12월 12일

부정선거 항의 대구 학생 시위

제4대 정부통령 선거, 3.15 마산의거

김주열 군 시체 발견으로 2차 마산 시위

4월혁명 발발

대학교수단 시위

이승만 하야

허정 과도정부 출범

내각책임제 개헌안 국회 통과

장면 정부 출범(제2공화국)

4차에 걸친 지방자치 선거

1961 

2월 8일

2월 25일

3월 22일

4월 15일

5월 5일

한미경제협정 체결

민족자주통일협의회 결성

2대악법 반대투쟁

공무원임용령 공포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 준비대회에서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제안)

 

[236]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3인조 투표, 유권자 명부 조작, 완장부대를 동원한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수 조작 등

온갖 기상천외한 부정선거 방법을 동원했다.

 

[238] 4.19사위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2차 마산항쟁이었다.

4월 11일 아침, 3.15사위 때 눈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떠오르자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241] 4.19시위는 미국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미국은 1, 2차 마산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명했을 뿐 선거 부정 문제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4월 19일 미국 대사 매카나기는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밝혔고, 허터 미 국무부 장관은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냈다.

 

'피의 화요일'을 '승리의 화요일'로 전환시킨 데에는 대학교수단 데모가 촉매가 되었다.

 

[245] '승리의 화요일'이 오기까지는 언론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군의 중립도 4.19 성공의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미국은 4.19 이후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다.

 

4월혁명은 학생과 지식인에게 수구냉전의 기득권층을 거부하고 살아 있는 정신으로 이 사회를 쇄신하고 변화시키려는 동력이 되었다.

 

[251] 이승만 추종자이지만 자유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던 허정은 각료 인선을 혼자서 했다.

그렇지만 반공, 보수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허정 과도내각이 4월혁명을 계승하고 완수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255] 1960년 6월 15일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상. 하 양원제였다.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줄이고,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임명하는 등 국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정무를 이끌어가게 되어 있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국무총리 지명권, 계엄선포 거부권, 정부의 정당소추에 대한 동의권 등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어 나중에 논쟁이 되었다.

 

[264] 장면 정부는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경지 정리, 관개 및 배수, 산림녹화, 도로 교량 건설, 댐 건설 등의 국토 개발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276] 분단세력의 극우반공 체제와 통일운동은 공존하기 어려웠다.

4월혁명으로 극우반공 체제에 균열이 생기자 통일운동이 전개되었고, 통일운동은 2대악법 반대운동과 함께 혁신세력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대중들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급진적인 통일운동은 극우반공 세력을 불안하게 했다.

 

5) '근대화'와 정보, 철권 정치 18년

1961

5월 16일

군부쿠데타

1963

12월 17일

박정희 제5대 대통령 취임(제3공화국 출범)

1964

6월 3일

9월 22일

한일회담 반대 학생 시위

베트남 파병 시작

1965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1967

6월 8일

7월 8일

6.8 부정선거

동백림 간첩단 사건 1차 발표

1968

1월 21일

북의 특수부대 청와대 기습

북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1969

9월 14일

삼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

1972

7월4일

10월 17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박정희 유신 쿠데타

1973

8월8일

중앙정보부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1974

1월 8일

4월 3일

긴급조치 1호 선포

긴급조치 4호 선포(민청학련 사건)

1975

4월 9일

5월 13일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8명 처형

긴급조치 9호 선포

1976

8월 18일

판문점 도끼 사건

1979 

10월 16일

10월 26일

부마항쟁

박정희 대통령 피살

 

[287]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가 성공한 데에는 우연한 요소나 운이 따랐다.

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지위에 있었던 장면 총리는 국방부 장관에 군을 잘 모르는 민간인을 임명했다.

결정적 실수는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 추천으로 이기붕의 양아들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장도영을 육군 참모총장에 앉힌 것이었다.

장도영은 양다리를 걸쳤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장 총리는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수녀원으로 도피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장면과 사이가 나쁜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가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라고 하면서 진압을 회피한 것도 성공의 중요 요인이었다.

 

[296] 미국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1961년 5.16 쿠데타와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켜 30년동안 군부 통치 시대를 열었다.

 

[297] 쿠데타는 만주 신경군관학교 2기인 박정희를 정점으로 육사 5기와 8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5기는 쿠데타 당시 사단장이나 참모장의 직위를 활용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육사 8기는 쿠데타 당시 대부분 육군 본부나 쿠데타의 기획과 실무를 담당했다.

쿠데타 성공 후 5기와 함경도, 만주군 출신들은 반혁명사건과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숙청되고,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8기 출신이 권력을 장악했다.

 

[299] 혁명 주도세력은 민정 이양에서 두 가지 비열한 행동을 했다.

하나는 정치인들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상태에서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사전 창당 활동을 한 행위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든 일이다. 1962년 3월 통과한 이 법에 따르면, 정치활동정화위원회에서 적격 판정을 받지 못하면 1968년 8월 15일까지 6년여 동안 정치활동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303] 미국은 중국과 소련에 대항하여 한, 미, 일 3각 안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했고, 정통성의 취약점을 경제개발로 만회하려는 박 정권은 이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307] 전국민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다.

5월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다.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고, 30여 개의 제 협정 및 그 부속문서에 양국 외상이 서명했다.

이로써 한일 간에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지만, 가장 중요한 일본의 사죄는 어물쩍 넘어갔다.

 

[310] 박정희 정권은 주한 미군이 베트남으로 파견되는 것을 막고, 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나라 젊은이를 베트남에 파견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311] 베트남전쟁의 참전으로 한국은 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얻었고 그것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미국에 심하게 종속된 국가라는 이미지를 국제 사회에 심어주었으며, 전쟁의 참전 명분도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베트남전쟁으로 5천여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 문제는 한국이 가해자란 점에서 심각한 반성이 필요하다.

 

[321] 박 대통령은 민주화와 변화의 요구를 수용할 것이냐, 권위주의 강화로 나아갈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박정희는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후자를 선택했다.

 

[328] 유신 헌법은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유신 쿠데타가 저항에 부딪치지 않은 것은 국회와 사법부, 언론, 공화당 내의 반대세력이 모두 제거되었고 학생운동도 대량 제적으로 무력해져, 박정희 중심의 막강한 권력체제가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330] 박정희는 절대권력을 지키기 위해 내부 단속을 했다.

 

[341] 1975년 4월 말과 5월에 캄보디아와 베트남, 라오스가 공산화된 인도차이나 사태는 반유신운동으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에게 구세주와 같았다.

국민들 사이에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보수적인 종교인과 지식인이 유신독재에 협력했다.

 

[343] 박 정권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위기를 맞았다. 1976년 10월 미국에서 터진 박동선 로비사건은 미국의 반박정희, 반한감정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1977년 1월 주한 미군 철수와 인권을 강조한 민주당의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것도 박 정권에 불리했다.

 

6) 경제 발전의 빛과 어둠

 

[359] 대외적으로 볼 때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의 변화는 한국의 경제 개발에 좋은 조건으로 적용했다.

미국은 제3세계의 경제를 발전시켜 이들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하려는 정책을 폈다.

좀 더 중요한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풍부한 인적 자원이 축적되어 있었다.

또한 정권의 정권의 정당성이 취약한 박정희 정부가 의욕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것도 고도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367] 박정희 정부의 과도한 수출 의존 정책은 내수 및 그와 연관된 내포적 경제 발전을 경시하게 만들었고,

불균형 발전을 심하게 초래해 도시와 농촌 간 공업과 농업 간에 파행적인 현상과 지역 간의 불균형이 일반화되었다.

지나친 해외 의존으로 끝내는 IMF 사태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또한 종합상사 중심의 수출 정책은 중소 기업의 재벌 예속화를 가속화시켰고, 재벌 비대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384]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말부터 국가주의 또는 전체주의 교육을 강화했다.

 

[399] 1970년대 도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대중사회적인 면모가 커졌고,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와는 다른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사고와 행동을 원했다.

그렇지만 유신권력은 획일화된 군사문화를 강요하여 갈등을 빚었다.

대중은 있되 대중문화는 빈약하고 뒤틀려 있었던 것이 유신 시기였다.

 

7) 민주주의를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1979

12월 12일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

1980

5월 18일

광주항쟁

1985

2월 12일

2.12 총선

1987

1월 14일

6월 10일

7월

박종철 고문사망사건

6월항쟁

노동자 대투쟁

1988

9월 17일

11월 27일

서울올림픽대회 개최

5공 청문회

1991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1995

11월11일

11월 16일

12월 3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결성

노태우 구속

전두환 구속

1997

11월 21일

IMF 긴급 구제금융 공식 요청

2000

6월 15일

평양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2002

5월 31일

한일 공동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

2004

3월 12일

국회 헌정사상 최초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

2007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

2012

3월 15일

한-미 FTA 발효

 

[414] 박정희 정권 말기 군부에는 두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정승화 등 상층부는 유신체제는 박정희에게만 맞는 의복이므로 이를 바꾸려고 했고,

전두환 등 군 내부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중견층은 유신체제의 뼈대를 유지하려고 했다.

박정희가 키워온 하나회 멤버 중심으로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424] 미국은 광주 참극에 명백히 책임이 있다. 미국은 5.17 쿠데타를 용인하고 방조했다.

또 20사단의 광주 출동을 승인했으며, 참혹한 진압 작전, 학살을 전혀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어서 신군부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서 파쇼권력을 행사할 때 이를 지지했다.

 

광주항쟁은 갑오농민전쟁, 3.1운동, 4월혁명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았다.

특히 학생과 시민이 일체가 되어 궐기한 것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진압 훈련으로 다져진 특수부대를 도시 밖으로 내몰고 시민들이 '자치'를 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광주항쟁은 1970년대까지 금기시되었던 반미 자주화 운동을 촉발했다.

광주 참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그 이전의 불평등한 한, 미 관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레이건 미 정부의 지지와 오버랩되었다.

1980년대에 자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양대 축을 형성했다.

 

[429] 10월 22일에 국민투표로 헌법안을 확정하고, 27일 공포했다. 이는 변형된 유신헌법이었다.

입법회의에서는 반공법을 폐지하고 그것의 골자를 국가보안법에 집어넣었다.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언론기본법도 만들어졌다. 형을 채웠는데도 감옥생활을 더 하게 하는 사회보호법도 통과시켰다.

 

[453] 노태우 정권은 인맥상으로 신군부를 계승했지만 신군부의 묘혈을 파는 작업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소야대 국회는 헌정사상 초유의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1988년 11월부터 5공 청문회를 열었다.

 

[469]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총리서리로 김종필을 임명하는 등 수구냉전적인 자민련과 동거해야 했기 때문에 개혁에 제약이 있었다.

또한 IMF의 '권고'에 순응적이었고, 신자유주의를 추종해 국가의 기간이 되는 포항제철, 한국전력 등과 금융기관을 민영화하고 외국 자본이 진출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476] 노 대통령은 정당 정치의 민주화에는 성공했지만 제도화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말년에 측근 의존도를 높였고, 그가 불쑥 내민 대연정이나 대통령 중임제 개헌은 촌극으로 끝났다. 행정수도 문제에 대한 논란도 이어졌다.

노무현 정권은 앞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정리해고의 합법화, 파견근로제의 도입 등 노동의 유연화를 강요했으며,

역시 진보적 지지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FTA 체결을 서둘렀다. 양극화 또한 더 심해졌다.

 

[480]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정권이 한 일을 거꾸로 돌려놓으려 했고, '빼앗긴 10년',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되뇌던 극우 성향의 언론이 그것을 한껏 부추겼다.

뉴라이트를 앞세운 수구냉전 세력은 현대사 재교육에 전력투구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바꾸게 하거나 수정을 강요했다.

 

3. 리뷰

현대사는 내게 어려운 난제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가서기 어려웠고 이면의 진실들을 알게 될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역사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특히나 현대사는 각 사건과 사실들만 알아서는 정리가 어려웠다.

체계적인 책을 통해서 배우고 싶었는데 사진과 그림과 도표로 시선을 끄는 이 책이 초보자인 내게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사비평을 읽는 독자로서 역사비평의 편집주간인 저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현대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였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책임의식에 대한 단어가 머릿속에 떠다녔다.

나는 과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현대사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의 후손들은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 채 순간에 일희일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주고 싶다.

 

돌이켜보면 학교 교육 때 배운 것도 그렇고 주변에서 들은 것도 한쪽에 치우친 것들이었다.

한국 현대사는 경제적인 발전에 집중되어 있었고 정치나 이념, 외교 등의 문제에는 숨겨져 있는 진실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한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언니, 오빠, 엄마, 아빠는 국가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광복 후 어느덧 70년이 다되어 간다.

짧은 시간 우리는 급성장했다. 경제 발전으로 세계에서도 주목받는 나라가 되었고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어두웠던 독재사회로부터 빠져나와 이제는 민주사회의 기초를 어느정도 닦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는 문제점을 많이 안고 있다.

좌우이념과 분쟁의 갈등이 생각보다 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주장들을 쉽게 깔아뭉갠다는 사실을 말이다.

광복 이후 해방이 되었을 때도 좌우합작에 대한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이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민족이 분열되는 시련을 겪지 않았는가?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좌에도 우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입장에서 최대한 쓰려는 노력이 엿보였다는 점이다.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부모님 세대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인지

그때가 있어 우리가 지금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거라는 말과 함께 지금의 사회악을 근절시키려면 그때처럼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시고는 했다.

나는 그 말이 정말 싫었다. 왜 그때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말이다.

그래도 이승만, 박정희에 대한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대한민국의 명암 중 암을 키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진보도 수구세력에 대해 맞서려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의 좋은 점은 정치를 중심으로 하지만 경제, 여성, 예술, 문학, 교육,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어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배운 것은 해방 후부터 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갈등의 역사와

(특히 수많은 정당들이 만들어졌고 없어지고 연합하는 과정들. 외국의 개입 등)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향한 강한 열망이 낳은 피해들을 알게 된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것은 짧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이승만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는데 많은 것을 얻어가게 된 것 같다.

특히 사사오입 개헌과 4.19 혁명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과거와 무조건적인 결별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올바른 것은 계속 이어가는 노력들이 필요한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저자가 앞으로도 계속 현대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으면 한다.

나도 관심을 놓치지 않고 개입하고 따져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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