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초서] 시대정신과 지식인

category 리뷰/책 2013. 3. 1. 21:21

제4장 이황과 이이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역할


[85]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황의 기여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성취하고 이를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완성했다는 데 있다.

이황은 우리 역사에서 주자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한 최고의 학자로 꼽혀왔다.


역사학자 정옥자에 따르면,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는 우론적 이기론에 있다.

이는 음양동정하는 작용인 기氣와 그 작용의 원리인 이理에 의해 이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세계의 본질이 이에 있는가 기에 있는가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런 철학적 사유는 현실정치와 정책의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에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했으며, 이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반을 이뤘다.

정옥자에 따르면, 이황철학의 핵심은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황 이후 영남학파에서 주리론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현실문제의 해결보다는 이론적 원칙의 탐구에 주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86] 국면사적 시각에서 조선사회는 개국 이후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안정기를 누린 다음 연산군 이후 침체기에 들어갔다.

이후의 과정은 일련의 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점철됐다.

이러한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 비전이 제시돼야 했는데, 이 역사적 과제를 담당했던 이가 다름 아닌 정암 조광조였다.

하지만 패기만만했던 조광조의 정치적 기획은 훈구파에 의해 이내 좌절됐고, 권력투쟁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더욱 어지러운 양상을 보였다.

이황의 학문 연구가 진행되던 시대 상황은 바로 이러했다.


[87]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기에 수입된 성리학은 적어도 이황 시대까지 그 온전한 이해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황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일차적으로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왕도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여기에는 사림파에 큰 영향을 드리운 조광조의 좌절로부터 얻은 교훈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88] 올바른 통치를 위해 먼저 올바른 학문을 세우고 이 학문을 이어할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이황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이었으며, 이황은 이를 탁월하게 수행했다.


[91] 이황과 비교해 이이의 정치 참여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이는 정치 참여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 또한 중요했다.

이이가 정치에 참여한 시기는 을사사화 이후 사림파가 지식 영역은 물론 정치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때였으며, 그만큼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이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요구되는 개혁을 치열하게 모색했다.


이이의 정치적 기획은 어느 한 분야에만 치중된 게 아니라 국방,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는데

특히 그는 민생을 중시하고 폐법개혁을 강조했다.


[93] 자기 사회를 실천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이는 조광조와 유사한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이이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법론을 선택했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통합을 중시하면서도 개혁을 추진한 이이의 정치적 실천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이는 열정적인 정치가인 동시에 뛰어난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이이는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보고 기의 능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론은 이후 주기론으로 체계화됐으며, 

이황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비교해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가 현실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한 이가 이황이라면, 이러한 연구를 기반으로 조선 특유의 성리학을 주체적으로 확립한 이는 이이다.

또한 이이는 유학의 양대 주요 저서인 소학과 대학에 대응하여 격몽요결과 성합집요를 펴냄으로써 유학의 토착화를 이뤄냈다는 평가 역시 받고 있다.


[95] 국가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이 대동사회론에 담겨 있으며, 바로 여기에 이이 사상의 현재적 의미가 있다.


이이의 학문은 기호학파로 계승됐다.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으로 대표도는 기호학파는 서인 세력의 중추를 이뤘으며,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까지 정치를 주도했다.

이이의 영향이 물론 서인 세력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학문의 현실성을 강조한 그의 실학정신은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등의 실학파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표본이었다.

이황이 무게중심을 학문에 둔 반면 이이는 학문과 정치를 병행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치열하게 모색한 동시에 시대적 대의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이황과 이이가 활동했던 시기가 500년 전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우리 학문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했던 지식인들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96] 조선사회에서 정치가와 지식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출사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부 지식인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관료적 지식인'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조선 중기 당쟁이 격화된 이후였으며,

이들은 사림에 기반을 두고 학문에 정진하며서 '재야적 지식인'의 한국적 전형을 이뤘다.

관료적 지식인과 재야적 지식인의 이러한 대립구도는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둘러싼 온당한 토론은 민주화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됐다.


오늘날 그 유형을 나눠보면 지식인 집단은 크게 '보편적 지식인'과 '특수적 지식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진리탐구와 권력비판에 주력하는 보편적 지식인은 정치 참여가 자신의 학문적 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일부 보편적 지식인이 정권을 합리화하는 담론 생산의 주체가 된 것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지식인의 초라한 초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특수적 지식인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들의 정치 참여는 자신들의 연구가 정책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정책 개발과 추진에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다.



제2부 모더니티와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색


제5장 박지원과 박제가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106] 17세기와 비교해 18세기는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려는 흐름이 세계적으로 나타났던 시기다.

서구사회에서는 정치 경제적으로 모더니티가 본격화됐으며, 동아시아에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바로 이시기에 등장한 지식인들이 실학파다.

이 실학파가 등장한 데에는 내, 외적 조건을 모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내적 조건으로는 시대정신으로서의 성리학이 한계를 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성리학은 철학적으로 내적 발전을 이뤘을지는 몰라도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한편 외적 조건으로는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서양문물이 조선에 소개되면서 서구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서양의 과학과 기술은 물론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 문화와의 본격적인 접촉이 조선사회에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다.


[107] 경세치용 학파가 주로 제도개혁과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면,

이용후생 학파는 도시 상공업의 발전과 연관된 기술개혁을 주창한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등으로 대표된다.

한편 실사구시 학파로는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학문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추사 김정희를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이용후생 학파의 다른 이름이 북학파다.

북학파라는 이름의 기원은 그 의미가 북쪽에 있는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데서 비롯됐다.

당시 조선보다 문물이 발전한 청나라로부터 배움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것이 북학파의 핵심 아이디어이자 기획이었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청과 수직적인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컸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제안하고 효종이 절치부심으로 추진한 북벌론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조선사회의 지배이념 가운데 하나였다.

청나라에 치욕을 당한 만큼 무력으로 청을 정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미를 지키자는 북벌론은 

그 실현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대내적 사회통합을 제고하기 위한 일종의 헤게모니로서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박지원과 그의 동료 및 제자들은 북학론을 통해 이러한 북벌론을 정공법으로 비판했다.


[109] 박지원과 박제가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의 핵심은 모더니티란 무엇인가다.


[110] 모더니티란 대략 17세기부터 서유럽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온 일련의 제도와 의식을 지칭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가든스는 제도적 측면에서 모더니티를 네 가지 제도와 그 관계성으로 개념화하기도 했는데, 

자본주의, 산업주의, 감시체제, 군사적 힘이 그것이다.

또한 모더니티를 이루는 의식과 문화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과연 우리 역사는 근대화 기획에 어떻게 대응해왔는가. 우리 모더니티의 기원을 어디서부터 볼 것인가의 문제다.


[111] 박지원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는 열하일기와 연암집을 들 수 있다.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열하일기는 연경 기행문학의 정수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책은 기행문학을 넘어서 일종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112] 박지원은 당시 지배계층의 '성리학적 원칙주의'에 맞서 '실학적 실용주의'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정책으로 구체화하고자 했다.

박지원 사상의 핵심은 '이용이 있은 후에 후생이 되고, 후생이 된 후에 정덕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압축돼 있다.

다시 말해, 이용후생 이후에 정덕을 이루자는 주장이 박지원이 품었던 실학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116] 개인적으로 나는 박제가야말로 조선시대 최고의 문제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적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른바 모더니티에 정공법으로 대결했던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서자 출신이라는 사회적 구속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였던 담대한 태도다.

박제가의 글들은 정유각집에 집약돼 있다.

북학의를 제외하고 박제가가 남긴 글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117] 북학의는 박제가의 대표 저술이다.

이 책은 박제가가 첫 번재 연행에서 돌아와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책으로 열하일기와 함께 북학파의 이론과 전략을 대변한다.

내편은 실생활에 연관된 다양한 기구와 시설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개혁을 제시한다.

외편은 상공업과 농업 문제를 다루고, 상공업의 발전과 농업 기술의 개선을 적극적으로 제안한다.


[118] 북학의는 일종의 국부론이다. 부국의 방법으로 청나라 문물의 즉각적이고도 대대적인 수입과 응용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한다.


[119] 북학파의 사상이 지배적인 성리학적 질서를 비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모더니티를 이루는 양축인 제도와 정신에서 박지원과 박제가가 보여준 선구적인 문제의식이다.

제도로서의 모더니티가 자본주의, 산업주의, 감시체제, 군사적 힘으로 이뤄져 있다면, 

박지원과 박제가는 분명 생산 도구 개선과 유통구조 혁신 등 근대적 사회, 경제 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정신으로서의 모더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120] 박지원은 봉건적 신분제를 비판하고 평등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윤리를 모색했을 뿐 아니라 합리적 이성과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진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


[123] 지식인에게 기품이란 무엇인가.

지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밝히는 이로서의 지식인은 경우에 따라 시대와 불화할 수도 있고 권력에 맞설 수도 있어야 한다.


[124] 인간과 자유에 대한 치열한 열망과 평등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이 덕목을 내면화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위엄이자 기품이다.


제6장 정약전과 정약용 실학파의 시대정신


[133] 정약전이 우리 지성사에서 주목할 지식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자산어보를 저술했다는 데 있다.

이 책은 당시 흑산도 수산생물 155종에 대한 이름, 분포, 형태, 습성, 이용 등의 매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채로운 자연과학 저작이다.


[134] 자산어보가 시선을 끈 이유는 네 가지다.

먼저, 이 책은 특유의 분류법을 보여준다.

둘째, 이 책은 당시 수산생물의 방언과 특징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매우 소중한 자료다.


[135] 셋째, 이 책은 실사구시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

주목할 것은 자산어보에는 당시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139]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1표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알려진 경세학이다.

정약용이 '1표2서'를 저술한 것은 유배 말년과 해배 직후다.

'1표2서'에 담긴 정약용의 문제의식은 부국강병을 위한 포괄적인 사회개혁에 있었다.


[140] 목민심서는 지방관리의 폐해를 해결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기 위한 정치, 행정 개혁론이다.

총 12편과 각 편을 6조로 나눈 총 72조로 돼 있다. 

각 조는 다시 강목을 두고 있는데, 강에는 의견의 대강을 제시하고, 목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그 해법을 강구한다.

실제로 당시 아전과 토호의 부정부패, 농민들의 처참한 실태가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141] 모더니티에 대한 정약용의 역량은 1789년 한강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에서 잘 나타난다.


[142] 과학적 진보와 혁신이라는 기술의 모더니티 관점에서 볼 때 정약용은 분명 모더니티의 선각자였다.

해방의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볼 때 정약용의 사상은 문제적이다.


[145] 서구의 모더니티를 과연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정약용 형제들은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삶과 사상을 보여줬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동도서기적 사유의 한 출발을 보여준 반면, 정약종과 이승훈은 서도서기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제17장 이건창과 서재필 개혁과 개방의 두 태도


[150] 이건창은 고종 시대에 활약한 양명학자이며, 서재필은 고종 시대부터 해방공간까지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상징성에 있다.

이건창이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변화를 모색하던 지식인이었다면,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를 대표하던 독립운동가였다.


[151] 이건창은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과 더불어 한말 3대 문장가로 꼽혔던 그는 이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하곡 정제두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양명학은 이른바 '이단의 사상'이었다.

주자학만을 철저히 숭상한 조선사회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은 일종의 '변방의 사상'이었다.

가학으로 양명학을 배운 이건창은 바로 이 점에서 '비주류의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153] 이건창이 선택한 길은 강화학, 즉 양명학에 기반을 둔 일종의 개혁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전통을 쇄신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통의 개혁노선이자, 서구 열강 세력을 거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선구적 노선이기도 했다.

이건창과 양명학자들이 이러한 노선을 선택한 이유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


[154] 이건창이 남긴 저작으로는 명미당집과 당의통략이 손꼽힌다.

명미당집이 그가 남긴 작품들을 모은 시문집이라면, 당의통략은 조선시대 당쟁에 대한 연구서다.

당의통략은 조부 이시원이 지은 국조문헌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으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국조문헌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155] 당의통략이 갖는 함의는 당쟁에 대한 분석이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이건창의 평가와 비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당의통략을 통해 이건창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도 백성과 사회를 위한 정치의 구현이었다.


[157] 이건창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명미당시문집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바 있다.

이 글을 보면 당대에 같이 활동했던 개화파와 동도서기파에 대한 이건창의 직간접적인 평가가 나온다.

주목할 것은 이건창이 개항 이후 '조선책략'을 포함해 대외 정세를 상당히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화파, 동도서기파와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161] 1999년 서재필이 영어로 집필한 글들을 역사학자 홍선표가 정리한 'My Days in Korea and Other Essays'를 출간했으며,

2009년에는 역사학자 최기영이 편집한 국문자료집 '서재필이 꿈꾼 나라'를 간행했다.

'서재필이 꿈꾼 나라'는 한말, 일제시기, 해방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눠 서재필이 집필한 논설, 연설, 서간 등을 담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서재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결성이다.


[162] 독립신문은 근대적 공론장의 효시다.

독립신문 발간은 우리 근대사에서 시민사회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163] 독립협회 결성 또한 서재필의 주요한 기여다.

서재필을 포함한 범개화 세력은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조선사회의 정치, 시민사회 개혁을 모색했다.


당시 서재필의 사상은 자주독립과 자주국권, 민주주의,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자주근대화, 과학적 위생론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164] 현재적 관점에서 서재필이 추구한 근대화는 서구화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철저한 서도서기의 관점에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구했다.


[167] 조선사회를 어떤 방향을 이끌 것인가에 대한 이건창의 길과 서재필의 길을 달랐다.

이건창은 서양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개혁을 꿈꿨고, 서재필은 서양을 수용하는 서구적인 개혁을 ㅗ색했다.


제8장 최제우와 경허 전통의 재발견과 모더니티


[187]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라 기존의 전통을 생산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전통을 단지 낡은 것으로 폐기한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의 의미를 새롭게 바견하고 창조하려 한 고투가 두 사람의 지적 모험을 이뤘다.

'전통의 창조'를 통해 자기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모더니티의 전통을 만들어가는 게 오늘날 지식인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시대적 사명이라면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함의를 안겨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3부 시대정신의 선 자리와 지식인의 갈 길


제9장 신채호와 이광수 식민지 시대와 근대적 민족주의 


[198] 식민주의의 맞은 편에 있는 것이 민족주의다.


[200] 조선상고사가 갖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인문 내공  (0) 2013.03.01
[초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0) 2013.03.01
[초서] 인문내공  (0) 2013.03.01
[책] 사랑의 기술  (0) 2013.02.08
[초서] 사랑의 기술  (0) 2013.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