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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 인문내공

category 리뷰/책 2013. 3. 1. 21:19

[9] 인문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어떤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10] 인간의 지력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지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서장 삶을 돌파하는 힘, 인문 내공


[17] 인문 정신의 요체 중 하나는 내 삶이 존엄하다는 것, 타자 역시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이 없으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기 삶의 전망을 세우기도 어렵다.


[22]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깊이를 갖고 싶어한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깊이에 대한 추구는 불가피하다.

깊이에 대한 욕망은 매우 근원적이다.

우리가 깊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깊이 있는 사람은 자장처럼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사람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문적 사유 능력'이다. 그중에서도 철학적 사유 능력이 핵심이다.


[29] 지적 열정이란 이처럼 사회 현실과 공부하는 주체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련을 맺을 때 생긴다.

우리가 어떤 '뜻'을 세운다고 할 때 그것은 사회적인 포부와 관련이 있다.

사회적 의미가 없는 '입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30] 지적 열정이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도덕적 의지, 사회적 책임 의식, 역사적 소명 의식이 있고,

공부가 그 실현 과정이 될 때 생겨난다.

이것을 알고 현실의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지적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36] 인간은 인문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인간이다.

그 능력은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인간은 지적인 존재로 살아야 실존적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지성적인 존재로 산다는 것은 가장 인간적으로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더 나은 내가 되었다면 좋겠다'고 마음먹을 때, 그 안에 더욱 지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실존적 욕구다.


[40] 공자의 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다. 그런 까닭에 이성, 교양, 도덕, 문화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갖춛어야 할 무늬였다.

신분제도가 소멸된 오늘날에도 이것은 특권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무늬가 되었다. 

이것을 갖추지 못하면 모습은 사람이라도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갖추면 인간답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답지 않다.

특히 문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무늬다.

문화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에 형성된다.

또한 인간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문화는 두 사람 이상만 있으면 생겨나지만, 그렇게 정착된 문화는 다시 사람들을 지배한다.


[41] 문화의 위력은 압도적이다. 인간은 문화의 생산자임과 동시에 그 자신이 문화의 산물이다.


[43] 혁명의 불씨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성적 고찰과 전망을 보여주는 인문적 사유와 글쓰기다.


[44] 역사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항상 '위기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46]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현금 가치'만을 중시하는 경제적 실용주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은 흔히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진정 인문학은 쓸모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인문학은 작게 쓰이지 않고 크게 쓰인다.


[47] 인문학은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 개인과 사회의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전망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준다.


[49] 대부분의 현대인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맥락없이 머리속을 부유할 뿐이다.


[50] 자신의 세계관을 치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을 봐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콘텍스트성이 강한 인문 사회 과학서를 읽어야 한다.



1부 공력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생각의 내공


1장 인문 감각을 틔워주는 생각의 자세


[58]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분석과 종합은 독학,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볼 때 배양된다.


[61]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독학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64] 사람들은 저마다 신념과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일까?'하고 자문해보면 많은 것이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신문이나 TV, 인터넷 같은 대중매체에서 본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65] 언론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알고 개괄해줄 수 있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67] 인간 사회에서 선대의 지식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인류 문명은 그렇게 해서 형성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회의 정신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68]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상식과 권위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상식과 권위로 무장된 모든 관념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타인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72] 축구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까닭에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혀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축구는 야구보다 훨씬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채워진다.

그런 만큼 우연과 이변이 속출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관중들은 경기 속에서 생겨나는 변화들이 훨씬 역동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자연계나 인간 사회에서 존재들과 사건들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과정도 축구와 비슷하다.

존재와 존재, 존재와 사건, 존재와 환경, 사건과 사건, 사건과 환경,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은 서로 물고 물리며 일정한 양상을 만들어낸다.


[73]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만물은 서로의 거울이며, 서로 관계를 맺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세계 속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세계가 있다.

하나의 존재에는 자신과 타자, 부분과 전체의 모습이 모두 들어 있다.

관계적 사고는 하나의 테크닉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는 것에 가깝다.


[77] 인간에게 지식이 필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식 자체에 집착하곤 한다.

심지어 특정 지식을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로 믿기도 한다. 그것을 '교조주의'라고 한다.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지식과 사상이 현실과 어떤 관꼐가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한다.


[79] 지성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지성인이 사회적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지성인'이란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깨어 있는 의식의 소유자여야 한다.

깨어 있는 의식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계기로 생겨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지성인은 타인의 고통을 유발시키는 일을 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도덕적이다. 

또한 부당한 고통을 유발시키는 사회적 시스템을 고발하고 개선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진보적이다.


[88]인간의 지적 활동에서 가설의 역할은 매우 크다.

인간은 가설을 세움으로써만 생각을 체계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가설이 대개 결론이 된다는 것은 인간 사유에 대한 회의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인간 사유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가설의 기능은 인간 사유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94]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 감각 방식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인식도 달라진다.


2장 사고력을 키우는 생각 훈련법


[98] 모든 대상은 거리를 두고 볼 때 전체가 파악된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리를 두고 봐야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99] 사물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은 넓게 볼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시야의 문제를 넘어 사유의 문제다.

거시적으로 봐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질곡에 빠졌을 때, 내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훨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조언이 되는 것도 그들이 내 문제를 나보다 거리에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105] 개인은 국가, 민족, 종교, 지역, 회사, 가문, 학교, 가정 등 여러 집단에 중첩되어 속해 있다.

대개 개인의 가치관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산해내는 집단 이익 논리들이 내재적으로 수용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리고 그에 기반을 둔 사고와 행동은 많은 사회적 불행과 재앙의 불씨가 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많은 파괴와 억압, 폭력적 현상의 배후에는 집단의 논리에 기반을 둔 집단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07] 지성인 역시 사회적 동물로 산다. 그런 까닭에 어떤 집단에 속해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집단의 논리를 다른 논리들과 비교해보고, 그중 무엇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가는 지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지성인은 그것을 기꺼이 한다. 그것이 바로 지성인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독립적 사고는 지성인의 생명과도 같다. 집단의 논리를 경계하는 것은 독립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109] 'T자형 지식인'이란 자신의 전공이나 관심사를 중심축으로 삼아, 

끊임없이 자신의 지적 지평을 넓혀 나가는 사람을 말한다.


[111]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궁금증과 지식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115] '과연 그럴까?'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의 태도를 갖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는 명제가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과학적 태도이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태도와 사회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121] 우리는 말을 사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언어 혹은 특정 낱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인식을 대상에 이르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122] 언어에 대한 생각은 대상, 인식, 언어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낳는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감각을 섬세하게 만들고, 철학적 사유 능력을 발전시킨다.

또 다른 이점도 있다. 바로 새로운 표현이나 개념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127] 어떤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과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제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28]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적응'의 문제다.

그런데 이 '적응'이 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135]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날 것인가는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환경과 조건을 직시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우리의 현실을, 운명을, 조건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2부 공감 남의 글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는 독서 내공


3장 생각의 기둥을 만드는 인문적 책읽기


[142]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독서는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145] 두 번째는, 독서가 개인을 심미적 존재, 철학적 존재, 도덕적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독서는 그 자체로 자신을 완성해나가는 일이다.


[146] 책을 읽어야 하는 사회적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지식이 현실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49] 전자 매체에 의해 일상생활이 점령당한 상황에서, 전자 매체에 대한 통제는 독서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152] 책은 독자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책은 지식과 정보를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전달하며, 비판적 사유 능력을 제고시키고, 텍스트에 오래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 점에서 전자 매체는 책을 따를 수 없다.


[156] 당장 읽지 않더라도, 좋은 책들을 갖고 있으면 그것 자체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독서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관심사를 확장시킨다.


[157] 독서를 하기는 쉽지만,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과 연관된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161] 만약 도서 목록 중에 자신의 내적 욕구에 부합하는 책은 있지만 그 책이 너무 어렵다고 판단되면 지식과 지력이 더 쌓인 후에 읽어라.

혹은 그 책이나 저자와 관련해 보다 쉽게 쓰인 개괄서나 해설서를 읽은 후에 읽어라.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독서란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책을 보는 것이다.


[162] 또 하나는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이다.


[164] 무릇 책은 평가하고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평가하고 질문해야 하는가?

첫째,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물으며 읽어야 한다.

그 타당성은 저자의 논리와 근거가 적절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그 반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지, 혹은 예외는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166] 셋째,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나의 현실에 맞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아무리 좋은 텍스트라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해찰이 아니다.

그것은 불성실한 독서가 아니라 가장 충실한 독서다.


[170]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중 하나는 재독하고 싶은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171] 시간의 검증을 받은 대표적인 책은 단연 '고전'이다.

고전들은 대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답함으로써 세월의 풍화를 견뎌왔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고전의 내용을 기반으로 지적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175] 번역서 중에는 중역한 것들이 있다.

중역은 일반적으로 번역의 질을 떨어뜨린다. 

외국어는 우리말과는 다른 역사적 맥락과 의미의 차이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번역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 늬앙스의 소멸은 불가피하다.

여기에 오역이 가세한다.


'공역'이라는 것도 있다.


[176] 출판사가 중역을 하는 이유는 주로 비용과 시간 때문이다.

공역도 마찬가지다.


[177] 번역을 잘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못지않게 우리말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번역이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저자와 독자를 연결시켜주는 작업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지식뿐 아니라 섬세한 언어 감각을 요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작가적 기질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이 번역도 잘한다.


[178] 저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진 번역가도 믿을 만하다.


'역자의 말'이나 '각주'를 통해 깐깐함을 드러내는 번역가들도 믿을 만하다.


그 외에 자기 전공 분야의 책들을 꾸준히 번역해온 번역가, 좋은 책을 번역, 소개해온 번역가도 믿을 만하다.


[182] 하나의 사상을 깊이,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지력의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어떤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체계적인 생각을 이해하고, 체계적인 사유를 하는 능력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도 지력을 높이는 데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185]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3부 공명 세상과 나 사이에 울림을 만드는 글쓰기 내공


4장 글쓰기 콤플렉스를 없애는 준비운동


[191]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직접적인 방식은 두 가지 외에는 없다. 말하기와 글쓰기.

그러나 지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다면 단연 글쓰기다.


[194] 지성적 활동에서 글쓰기의 중요성은 글이 갖는 본질적인 위엄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글쓰기는 말하기보다 더 신중함을 요구한다.

글 쓰는 사람은 쓰기 전에 생각하고, 쓰는 도중에도 생각하고, 쓰고 난 이후에도 생각한다.

그 때문에 글쓰기는 지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5] 글은 체계적이지 않거나 논리와 근거가 부족하면 금세 설득력이 떨어진다.

글쓰기가 갖는 이런 까다로움이 지력을 발전시킨다.


인문적인 삶에서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글쓰기가 세계와 타자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준다.


글쓰기와 사유 능력의 발전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198] 지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기꺼이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201] 세계는 인류가 글을 통해 만들어낸 세계다.

글을 쓰는 사람은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8]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이 창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경우다.

둘째, 이전의 글들보다 새롭거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다.


[209] 셋째,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대비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넷째, 결과만 알려진 것의 '과정'을 면밀하게 폭로하는 경우다.

다섯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경우다.

여섯째, 기존의 메시지를 감각적인 글쓰기를 통해 정서적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경우다.


[210]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글의 전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 원칙을 구현하는 전술을 다음과 같다.

첫째, 흥미로운 것에서 따분한 것으로 써 나간다.

둘째,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셋째,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211] 흥미로운 글을 쓰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좋은 글감의 발견이다.

어디서 글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 남에게 받은 질문이나 대화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둘째,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해본다.

셋째, 자신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에 귀 기울인다.


[212] 넷째, 자신의 경험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다섯째, 동서고금의 유명한 일화나 에피소드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여섯째, 시사적인 사건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일곱째, 개념에서 글감을 찾는다.


[214] 인문적 글쓰기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비평적 글쓰기, 학술적 글쓰기, 시사적 글쓰기, 문학적 글쓰기, 철학적 글쓰기다.


[215] 글도 자기 취향이나 기질에 맞게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잘 써지고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한편으로는 글의 유형을 잘 이해한 후 그것들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239]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 고봉으로 담겨 있는 밥그릇에 나의 밥을 '한 숟갈; 얹는 일이다.

여기서 '한 숟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의 문제의식', '나의 해석', '나의 관점' 같은 것을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한 숟갈의 밥'을 중심으로 나머지 밥알들을 '헤쳐 모여'하는 것이다.

한 그릇의 밥을 완전히 새로 짓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전적으로 독창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의 한 숟갈의 밥을 중심으로 기존의 글들과 차이가 나는 새로운 질서를 가진 텍스트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42]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란 평소 읽은 책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것이다.


[246] 자료 정리는 논리와 근거를 준비하는 과정이면서 지적 도약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며, 백지에 대한 공포, 글감이 생각나지 않는 문제, 문장력과 어휘 부족의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과정이다.


5장 글의 품격을 높이는 실전 노하우


[262] 다음은 내가 자료 정리를 하는 방법이다.


1<문화> 2수용자 상품론. 스마이드는 방송사는 시청자를 긁어모은 시청률을 광고주에 ... 

3 (그렇다면 시청료 부과는 어불성설? 이와 같은 논리는 지하철 광고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

4-정보자본주의와 대중문화산업 229


1은 주제어이자 분류이다. 2는 책에서 베낀 내용이다. 3은 내용과 관련해 떠오른 내 생각을 적은 것이다. 4는 내용의 출처다. 책의 제목과 페이지를 적어 놓았다.


[263]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구성하는 방법은 이렇다.

첫째, 글의 주제를 정한다.

둘째, 평소 모아둔 자료에서 주제와 관련된 것들을 검색을 통해 뽑는다.

셋째, 그 자료들을 내용이 같은 것끼리 다시 분류한다.

넷째, 분류된 자료들을 쓸 순서에 맞게 배치한다.


[266] 하나의 문단 안에는 하나의 세부 메시지만을 담아야 한다.


[268] 차례를 구성할 때에는 글의 주제와 관련해 빠진 내용이 없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269] 차례는 되도록 친절해야 한다.


[275] 문장론에서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것들만 줄여도 문장이 몰라보게 좋아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줄여야 할까?

첫째, 불필요한 부사를 줄여야 한다.


[276] 둘째, 불필요한 형용사를 줄여야 한다.

셋째, 불필요한 지시어를 지워야 한다.


[277] 넷째, 불필요한 접속사를 최대한 빼야 한다.


반복되는 것만 없애도 문장에 지루한 감이 사라지고 긴장감이 살아난다.

첫째,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가 반복되면 지리멸렬한 느낌을 준다.


[278] 둘째, 비슷한 단어들이 반복된 경우도 지루해지기는 마찬가지다.


[279] 글을 지루하게 만드는 또 다른 예는 서술문을 늘이는 것이다.


[280] 문장에서 '~인 것이다'를 남발하는 것도 문장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대부분의 글쓰기 책은 단문으로 쓰는 것을 권한다.

가장 큰 이유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이 복문으로 쓰면 문장의 수식 관계나 호응 관계가 꼬이기 쉽기 때문이다.


[281] 둘째, 단문으로 쓰면 가독성이 높아진다.


[282] 셋째, 복문이나 만연체 문장으로 쓰인 글에서는 논리가 꼬이기 쉽다.


[283] 인문적 글쓰기에서는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그러면 감정을 절제하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첫째, 극단적 표현을 삼가야 한다.

둘째, 욕설과 비속어를 쓰지 마라.


[284] 셋째, 질과 양, 시간, 수량, 정도를 나타내는 말 중 모호한 말들을 쓰지 않는다.


[285] 넷째, 느낌표, 말줄임표, 물음표 사용을 줄여야 한다.


[286]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표현은 진정성을 훼손한다.


[288] 상투적인 표현은 자주 사용되는 만큼 의미의 폭이 넓다.

어떤 표현이 이것도 의미할 수 있고 저것도 의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문적 글쓰기는 정확한 글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상투적인 표현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 나의 글쓰기 패턴도 상투적인 표현들이 많은 것 같다.

왜 그런지 생각을 해봤는데 역시 논리와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상투적인 표현들이 대중성을 보장해준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인문적 글쓰기는 논리와 근거를 통해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 정공법이다.

그런데 정공법 대신 은밀한 방법으로 독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289] 은연중에 독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은 주어를 '우리'로 쓰는 것이다.


[292] 인문적 글쓰기에서는 객관성이 중요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를 주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조어를 만들어 쓰는 경우에도 객관성을 떨어뜨린다.


[294] 정확하지 못한 출처 표기도 글의 객관성을 떨어뜨린다.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은 비유다.


[298] 글쓰기는 마무리가 중요하다. 

원고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 후에는 내가 썼더라도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다.

원고가 나의 수중에 남아 있을 때를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원고를 다듬어야 한다.


[299] 퇴고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하는 것이 좋다.


퇴고는 최소 세 번 이상 하는 것이 좋다.


퇴고할 때 점검해야 할 내용 열 가지는 다음과 같다.

- 글의 내용이 애초에 말하고자 했던 주제오ㅘ 일치하는가.

- 주제 이외의 다른 부분이 더 뚜렷하지 않은가.

- 반대로 해석되거나 오해될 부분은 없는가.

- 글의 세목이 주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 쓸데없이 까다롭거나 지저분한 세목이 있지 않은가.

- 적당한 분량 나누기가 유지되고 있는가.

- 부분과 부분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명료한가.

- 용어는 정확하게 사용되었는가.

- 읽어봐서 어색한 곳은 없는가.

- 오탈자는 없는가.


[301] 마지막으로 퇴고가 끝나면 걸으면서 입술을 달싹거리며 순독해볼 필요가 있다.



종장 인문 내공으로 현대 사회 읽기


[309] 독일의 사상가 훔볼트는 대학을 '자유롭고 평등한 학문 공동체'로 규정했다.

대학은 흔히 '상아탑'이라 불리는데, '현실과 거리를 둔 정신적 행동의 장소'라는 뜻이다.

그것은 현실과 거리를 둔다는 것, 현실에 대해 관조와 성찰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탐구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학문 공동체'도, 현실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정신적 행동의 장소'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 이해와 가장 유착된 기관이다.

대학은 교육과 학문의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다.


[310] 우리 시대의 인문학은 국가와 기업에 종속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인문학 위기의 본질이 아닐 수 없다.


[315] 현대인들은 단기적인 생존과 전망을 추구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배는 전복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러는 동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 길이 맞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현대인이 청한 실존적 상황이다.


[317] 비판적 이성이란 '왜'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320] 비판적 이성은 인문적 사유의 핵심이다.

인문적 사유를 잘하려면 비판적 이성에 충실해야 한다.

인문적 사유에서 도구적 이성도 쓰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비판적 이성 능력을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소외된 궁극적 목적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비인간화된 조건을 개선할 수 있게 만들며,

혼돈에 처한 사회적 삶의 의미를 재규정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323] 현대사회는 문제는 많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바로 분업화, 전문화 때문이다.


[324]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도 파악하기 힘들다.


[330] 사회와 기술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문의 사유는 더 중요해진다.

'전체'라고 부를 수 있는 규모가 점점 커지면 그것을 개괄하기도, 어디에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도 파악하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전체에 대한 인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인간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를 문제 삼는 인문적 사유가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33] 선거는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 문항이다.

유권자들은 아무나 대표로 선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당 내부의 권력자들에게 편승한 후보자들 중에서만 고를 수 있다.

만약 주어진 보기 중에서 찾는 답이 없다면? 

투표를 포기하거나 그나마 덜 나쁜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선거는 최악의 결과를 막는 정보의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정치적 무력감을 증대시킨다.


[334]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인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자를 뽑을 권리만 준다. 그런데 후보들 간의 차이는 별로 없다.

정책에서도 일부만 근소한 차이를 보일 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의가 소실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35] 오늘날 권력의 상당 부분은 '거대 자본'에게 이전되었다.

자본 권력은 여러 미디어, 선전 매체,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국민 의식을 통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정치권력은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자본 권력이 뽑아놓은 임시 반장에 가깝다.

여기에 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한 악순환이 가세한다.


[342] 오늘날 환경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환경 문제에 무감각 혹은 무관심해지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환경의 위기가 '일상화된 위기'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위기가 진행되면 아무리 심각한 위기라 하더라도 긴장감이 잘 생기기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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