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어제 같기도 하고, 그제 같기도 하고, 오늘 같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저쪽 세계에 있던 마지막 날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보았다.
这一天,似乎是昨天,似乎是前天,似乎是今天。可以确定的是,这是我在那个世界里的最后一天。我看见自己迎着寒风行走在一条街道上。
텅 빈 사방은 끝없이 펼쳐진 허공이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뿐이었다. 우리는 나무도 보지 못하고 강물의 흐름도 보지 못하며, 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발걸음 소리도 듣지 못했다.
"왜 죽은 뒤에 안식의 땅으로 가야 합니까?"
주인공인 양페이와 아버지인 양진뱌오, 양페이가 사랑했던 리칭.
슈메이와 남자친구인 우차오.
...
시각은 달랐지만 다른 세계로 간 사람들이다.
양페이는 양진뱌오의 양자로 22년 간을 살아왔다. 이웃집 부부인 하오 아저씨와 리웨전 아주머니도 그를 든든이 돌봐준 사람이다.
양진뱌오는 양페이를 거두고 나서 한 여자를 미치도록 좋아해서 양페이를 놓으려 했으나 놓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양페이를 두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양진뱌오 자신의 결정이었다. 과연 그를 누가 욕할 수 있을까.
양페이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처럼 여겼던 리웨전 아주머니도 갑작스레 사라진 세상에서 헛헛한 마음을 느낀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슈메이는 미용실에서 일하다가 남자 친구를 만나 호감을 갖고 연인이 되었다. 두 사람의 애정은 뜨거웠지만 가혹한 현실은 애정만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은 구직을 위해 계속 여기 저기를 떠돌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불화가 생겼다. 결국 오해 속에 두 사람은 영원한 갈림길에 들어선다. 이를 보면서 사람 간의 관계는 어떠한 작은 오해든 작은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때 그때 풀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이 감정의 응어리가 되어 서로를 겨누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을테다.
등장 인물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다 만나기도 하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뒤늦게 소식으로만 전해 듣는다. 아니면 영영 전해들을 수 없는 채 마무리가 되기도 한다. 이는 현실 세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第二天, "我走了很远的路。"(나 정말 아주 먼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진눈깨비가 날리는 하늘 아래 양페이는 사랑했던 리칭과 재회했다. 오래 기다려 만났기 때문에 이 말에 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간의 거리는 정신적으로도 만들어지지만 이렇게 물리적으로도 만들어진다.
헤어짐도 그렇지만 사람은 우연히 만나는 법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수없이 반복하며 떠올렸던 하나의 명제는 하필 한국 땅에 태어나 내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다른 부모였다면 나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또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세계를 접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아득해진다.
양진뱌오는 양페이를 끔찍하게 아끼며 살았다. 덕분에 양페이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갖고 평생을 지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불평에도 미소를 짓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어렴풋이 아버지의 불평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아득하고, 너무도 친근하게, 멀리 있는 빌딩처럼 층층이 겹겹이 귓가에 쌓여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비교적 최근에야 아버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인공은 생부와 생모와 강제적으로 분리된 채 양아버지 아래 자랐기 때문에 가장 먼저 물리적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다행히 그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제7일>의 핵심 주제는 계급의 위계와 불평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앞선 두 작품(인생, 허삼관 매혈기)보다는 최근의 이야기인데다가 (중국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은 위화 작가의 도입작으로 가장 무난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소득의 격차에 따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복권이나 로또 당첨을 꿈꾸지만 확률은 말도 없이 낮을 뿐더러 그 당첨금은 오늘날의 물가에 비하면 크지 않은 금액이다(그럼에도 너도 나도 매달리지만...).
지역에 따라, 아파트 등급에 따라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 짓는 행태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여기와 같을까, 다른 모습일까. 이 작품을 보면서 작가는 여전히 이 세계에도 돈이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슬렁거렸다. 눈은 환하고 비는 어두컴컴해 아침과 저녁을 동시에 걷는 느낌이었다.
대기실 한 쪽에는 플라스틱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다. 짐작할 수 있듯 플라스틱 의자가 있는 쪽은 대기자들이 넘쳐나지만 소파가 있는 쪽은 소수의 대기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소파에 앉은 이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한껏 자신의 고귀함을 드러내고 있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이들은 긴장한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다. 현실에서도 익숙한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소파에 앉은 이들은 값비싼 수의를 입고 자신의 유골함의 소재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인다. 그러나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이들은 낡고 저렴한 수의를 입고 유골함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배부르게 들릴 수 밖에 없다.
사실 나는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저자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비슷한 구조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회의론자라 그런 것 같다.
돈은 권력을 쫓고 권력은 계급을 부여하는 구조 앞에서 개인은 무너지고 관계는 끈끈해지기 어렵게 만든다.
"무덤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어."
무덤이 없는 자들은 여기서도 가진 것이 없다. 이제는 부족한 땅 때문에, 또 가치관의 변화로 유골화되어 납골당에 가는 형태가 많아졌지만 장례 비용도 그렇고 죽기 전까지, 죽어서도 참 쉽지가 않다.
오해 속에, 갑작스레 헤어졌던 사람들이 재회하여 지난 사정을 비로소 이해하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만나던 순간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함께 있는 순간이 소중함을 말로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곁에서 서로를 지킬 수 있을 때 서로의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면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 앞에 후회가 찾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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