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거리는 지독하게 무더웠다. 게다가 후텁지근한 공기, 혼잡, 여기저기에 놓인 석회석, 목재와 벽돌, 먼지, 근교에 별장을 가지지 못한 페테르부르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독특한 여름의 악취, 이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청년의 신경을 한꺼번에 뒤흔들어 놓았다. 이 지역에 특히 많은 선술집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와 대낮인데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의 모습을 더욱 불쾌하고 음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사람들이 거리를 휘젓듯 다닌다. 도처에 악취가 진동하고 불쾌한 기운이 떨쳐지지 않는다. 당시 페테르부르크는 인구가 폭증하여 실업률이 증가하고 범죄율도 높았다고 한다. 같은 것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는 일은 이때도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오래 지속되었던 농노제에 대한 불만이 쌓인 상태에서 자유와 해방에 대한 생각들이 꿈틀거리고 있을 때였다. 온갖 사회, 과학 이론들이 쏟아져 나올 때니 자칫하면 어느 이론에 경도되어 휩쓸리기 쉽지 않았을까.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의 힘이 폭발했으나 나폴레옹 이후 다시 돌아온 황제의 권력은 계급 자체에 대한 회의를 낳았을 만하다.
몇 년 만에 <죄와 벌>을 재독했다. 역시 도 선생님의 인간 심리 묘사는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라스콜니코프는 예민한 신경과 감성을 지녔고 편집증으로 발작과 혼란을 거듭 느끼는 인물이다.
이번에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사람은 일정 정도 미쳐 있는 부분이 있다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관리하고 또 화해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088] 어떤 일이 생기든 상관없이 무엇이든 결행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삶을 아예 거부하든지!>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렇게 소리 질렀다. <있는 그대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활동하고 살고 사랑하는 모든 권리를 거부하고,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여 버려야만 한다!>
[124] 그 허약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노파의 삶이 사회 전체의 무게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와 이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그 노파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잖아.
라스콜니코프는 내면적 갈등 끝에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혐오에 대한 의식이 존재했음을 느끼게 한다. 과연 누가 타인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함부로 단정지어서도 안 되는데도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가볍게 재단하고 평가하려 한다.
[203] 그것은 마주치는 모든 것,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거의 생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혐오감이었다. 그것은 집요하고 사악한, 증오에 가득 찬 혐오감이었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혐오스러웠다. 그들의 얼굴, 발걸음, 행동거지, 모든 것이 그랬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와중에 (오지랖으로) 타인을 동정하며 구한다. 술집에서 만난 마르멜라도프의 가족들을 위로하며 수중의 돈을 건네고, 늦은 밤 술에 취해 벤치에 앉아 있던 여성이 위험한 일에 빠질 거라 판단한 여성에게도 간섭을 한다.
[046] 네놈은 이 보드카 반 병이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나? 내가 이 병 속에서 찾은 것은 슬픔, 슬픔이었어. 슬픔과 눈물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찾아서 맛보았단 말이다.
마르멜라도프은 술을 마시며 이렇게 변명을 해댄다. 얼마 후 그는 불행한 일을 당해 사망을 한다. 술에 취해 도박빚을 지고, 집 안에 있는 돈을 훔쳐서 달아나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부족하여 몸을 파는 딸에게까지 가서 손을 벌리는 그를 마냥 두둔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에서는 과거가 떠올랐는데 개인적으로 동정이 들다가도 혐오감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변명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의 피해는 커졌기 때문이다. 경제적 피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증오와 혐오의 증가로 인한 심리적 피해가 문제였다. 이는 개인적 피해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피해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337] 용서를 한다고요? 만일 이 사람이 오늘 … 않았다면, 항상 그렇듯이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 나는 해가 뜰 때까지, 이 사람의 옷과 아이들의 옷을 빤 다음, 창에 걸어 말려야 해요. 해가 뜨면 나는 다시 옷을 기워요. 이게 내가 밤마다 하는 짓이에요!
<죄와 벌>은 인간의 본성과 환경(양육)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볼 수 있게 만든다. 나는 본성보다는 환경에 좀 더 기우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성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이는 오래도록 인간들이 고민해온 주제다. 당신은 어떤 쪽인가. 환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범죄자들을 두둔하는 논리로 악용될 수도 있어 위험할 것 같다.
[468] 그들에게 모든 것은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야.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어! … 만약 사회가 정상적으로 건설되면 단번에 모든 범죄들도 사라지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돼. … 본성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아.
[477] 저는 제 주된 사상을 믿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사상이란 바로 자연의 법칙상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는 겁니다. 하나는 저급한(평범한) 부류로서 오로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출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말>을 할 줄 아는 재능 혹은 천분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큰 분류 아래로 수많은 작은 부류들이 무한하게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두 부류를 구분 짓는 특징들은 대단히 명확합니다. 첫 번째 부류, 즉 재료는 대체로 말해서 자기 천성상 보수적이고 체면을 차리는 사람들로 복종 속에서 살아가면서 순종하기를 좋아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 모두는 그 능력에 따라서 법률을 어기는 파괴자들이거나 그럴 경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고 다양합니다. 그는 자기 사상을 위해 시체와 피를 건너뛰어야 한다면, 자기 내면의 양심에 따라서 피를 뛰어넘는 걸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습니다.
과연 두 번째 부류라고 말하는 비범한 사람이 기존의 틀을 깨고 파괴하는 사람이라면 혁명가, 범죄자를 어떻게 구분지을 수 있을까.
[272] 나는 다른 것을 알고 싶었어요. 그것이 나를 충동질했어요.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이>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죠.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범죄를 탄로날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안 여러 번 신경 착란 증세를 겪는다. 이후 여러 사람들과의 논쟁을 거친 뒤 소냐, 여동생과 어머니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범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424] 로디온 로마노비치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지요. 머리에 총알을 박든지, 아니면 블라디미르카 대로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092] 그는 새롭고 이상한, 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정을 느끼면서, 이 창백하고 여읜 균형 잡히지 않은 모난 얼굴과 준엄하고 강렬한 감정으로 불타오를 수 있는 그 온순한 푸른 눈동자, 분노와 분개로 인해서 아직까지도 떨고 있는 그녀의 작은 몸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더더욱 이상하게 여겨졌고, 불가사의하게 생각되었다. <유로비디다! 유로비디야!> 그는 속으로 단언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에게만큼은 성직자나 예수, 성모 마리아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남이 나의 죄를 사하여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체의 생각과 행동이 중요하다. 교회에 가서 참회한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158] <모든 것이 서로 다른 양 끝을 가리키고 있다. 서로 다른 양 끝을.>
[515] 그는 그날 밤 무엇에 대해서든 오랫동안 생각할 수 없었고, 어떤 것에든 생각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에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516] 이제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리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제7일 (2) | 2024.11.17 |
---|---|
[책] 근대서지 제29호 (1) | 2024.11.08 |
[책] 세계 끝의 버섯 (1) | 2024.10.27 |
[책] 세계철학사 3 (3) | 2024.10.27 |
[책]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 (5) | 2024.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