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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category 리뷰/책 2024. 9. 25. 17:17

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베트남의 역사를 중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근현대 시기 역사부터는 익숙해도 그 이전까지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최근 들어 아시아의 역사 관련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지식이 조금 있을 뿐이다. 

베트남은 현재도 그렇지만 고대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물론 베트남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자 문화권을 바탕으로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서로 교류하며 눈치 싸움을 벌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 내부가 혼란하면 주변국은 힘을 발휘하여 뻗어나갈 기회가 생기고, 반대로 중국 내부가 평화로우면 주변국은 그 힘을 비축해야 하는 시기를 보냈다. 이는 한반도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힘이 강해져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더 나아가 독립을 하는 과정, 반면 중국 세력에 밀려 압박을 받아 부침을 겪을 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자주 독립을 열망하고 평화를 꿈꾸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도 비슷했을테니 말이다.

지금의 베트남 영토가 되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신화와 농경의 시기를 거친 뒤에도 베트남은 지역별로 각각 쪼개져 있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베트남의 지역 토호에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이 중 조타라는 관리의 이력이 독특하다. 그는 중국인 관리였음에도 현지에 적응한데에서 나아가 새롭게 파견된 중국인 관리를 향해 마치 현지 사람인 것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한(漢)은 결국 남비엣을 지배하려 들었고 이에 맞서 쯩자매가 봉기하였다. 한은 대응을 위해 마원을 내보낸다. 쯩자매가 나선 것을 보면 당시 사회가 모권 사회였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베트남인들은 쯩자매를 영웅시한다고 한다.

한 정부는 반란 수습을 위해서 남비엣에 관리들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착취와 부패가 심해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사섭은 중국에 동탁, 조조, 손권, 유비, 관우 등이 활동하는 삼국 시기에 손권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활동을 한 인물인데다 베트남 토착 사회에 지지를 얻었다고 하여 눈길이 갔다. 반면 도씨 3형제는 중국 왕조에 협력을 한 인물이다.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되자 베트남을 확보한다. 당이 들어섰을 때는 안남도호부가 현지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십이사군 시대에 딘보린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다. 중국 황제에게도 충격을 주었겠지만 이후 베트남 왕조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 같다. 

967년에 딘 보린은 장자인 리엔을 남 비엣 브엉(Nam Viet Vuong, 南越王)에 봉하고, 다시 1년 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중국식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까지 제정하여 타이 빈(Thai Binh, 太平)이라 하였다. 남비엣 브엉이란 칭호는 전한(前漢) 초기 한에 대항했던 조타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6세기 리본이 남 비엣 황제라고 칭한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는베트남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중국 사료들은 리엔이 남 비엣 브엉에 봉해진 것을 딘 보린이양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딘 보린의 칭제를 몰랐든가 아니면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편 베트남에서 독자적 연호의 사용은 리본이 티엔 득이라고 한 경우가 처음이며 이때가 두번째인데, 이 역시 황제의 칭호처럼 중국 군주와 대등하다는 표시이다. - P130

중국의 원나라 시기에는 쩐 왕조의 쩐 홍 다오가 활약을 했다. 그는 고려의 대몽항쟁을 떠올리게 하듯 원과의 몇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나라도 대몽항쟁 하면 삼별초의 영웅들을 떠올리듯 쩐 홍 다오는 베트남에서 영웅을 넘어 신으로 모셔진다고 한다. 
쩐 왕조가 원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쩐 홍 다오였다. 그는 천부적 전략가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적의 힘이 강할 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게릴라 전법으로 이들을 괴롭히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전면공격을 하는 등 소수 병력으로 강대국의 침략을 저지했다. - P169~170

중국의 명나라 시기가 되면 영락제가 베트남을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이에 맞서 베트남도 잔딘데나 쩐 꾸이 코앙 등이 저항했다. 이후 명은 베트남 남부 지역까지 정복한 뒤 통치자에게 안남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준으로 베트남 최초의 왕조는 언제이고 누가 열었을까? 
응우옌 푹 아인은 북진에 앞서 1802년 5월 푸 쑤언에서 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자롱(Gia Long, 嘉隆)이라 정했다. 자롱이란 자 딘에서 탕롱까지란 의미로 베트남 전체를 뜻한다. 연호의 제정은 통일에의 그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한 응우옌 푹 아인, 즉 자롱 황제는 5월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는 떠이 썬 정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도움을 얻고자 찐 화이 득(Trinh Hoai Duc, 鄭懷德)을 여청정사(如淸正使)로 광둥에 보냈다. 그가 처음부터 청에 보낸 사절을 ‘여청사‘라고 한 것은 청과 대등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257
그러니 사실상 현재의 베트남의 모습은 19세기 초가 되어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고 보면 되겠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호찌민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종전 후 인도차이나를 신탁통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장제스에게 전후 인도차이나 지역을 통제하에 둘 것인가를 묻자, 장제스는 그곳 사람들은 다루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직접 언급은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장제스에게는 국내의 공산당과 군벌 같은 문제가 인도차이나보다 더 중요했다. 그때문에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대신 제안하기를, 인도차이나가 전후에 독립할 수 있도록 중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제안은 1943년 중국 내의 여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지배권은 박탈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P308

베트남 공산당의 창당, 베트남 혁명 동맹회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과정을 거쳐 영국군과 중국 국민당 군대가 베트남에 진주할 때 호찌민은 프랑스와 협상을 벌인다. 그러나 퐁텐블로 회담이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 위주로 이루어지자 호찌민 정부와 프랑스군은 충돌하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진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호찌민 정부는 디엔비엔푸 전투로 대응했다. 결국 제네바 협상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북위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은 쪼개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하노이 정부가 남부 공산당을 지원하면서 베트콩이 시작되었다. 
1963년 응오딘지엠 형제가 살해되고 케네디가 암살된 후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발화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1968년 북베트남과 중국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료되기까지 베트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물론 미국도). 

하노이정부는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캄보디아 왕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베트남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인물들이 론 놀에 대한 왕정의 저항운동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지만 북베트남군의 주둔을 원치 않던 친중국 계열인 폴 포트(PolPot)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가 1971년 7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고 베트남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캄보디아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는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 P417

북베트남 정부가 친소 정책을 펴자 중국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여기에 베트남과 중국 간 영토 분쟁까지 더해지며 1979년 양국 간 전쟁이 벌어졌다. 악화된 관계는 1980년대 말이 되기까지 이어진다.

1975년 통일 후 하노이 정부는 남부의 정치적 통제와 사회주의화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남부 화인의 통합을 위한 급격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앞서 호찌민 시가 점령된 1975년 4월 30일 밤 중국인들의 거주지인 쩌런(Cholon) 지구에서는 중국 국기와 마오쩌둥 초상화를 들고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가 하면, 일부 중국인은 사회적 혼란을 틈타 물자를 매점매석하여 경제상황을 악화시켰다. 1976년 1월 베트남정부는 남부의 모든 화인들에게 국적을 등록하게 하고, 이어 2월에는 강제로 베트남 국적을 취득케 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고 식량배급에서도 차등을 두었다. 다시 이듬해 2월 하노이정부는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하는 화인들에게 직업을 제한하고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유의사 형식으로 귀국시킬 방침을 세웠다. - P441
중국의 1979년 2월 베트남 침공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 아니었는가 한다. 양국의 분쟁이 특별히 어느 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양자는 전쟁의 승패를 떠나 언제까지 대립할 수만 없었다.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중국의 전통적 중화주의를 재삼 인식하면서 앞으로도 계속될 위협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생각하며 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이후 중소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긴장이 계속될 것을 우려했다. - P459

베트남과 중국 간 외교 정상화는 1991년 수교가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후 양국 간 활발한 경제 교류가 이어졌으나 중국이 국력을 신장시키면서 베트남을 포함한 주변국도 위협을 느끼는 중이다. 게다가 1992년 중국이 영해법을 통과시키면서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국제 사회에 남중국해라 선언한 뒤 군사까지 배치시키며 주변국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앞으로 베트남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겠으나 중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가 상당히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계속해서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의혹의 많은 부분은 남중국해에서 일어난 충돌과 석유채굴권 문제이다. 베트남은 또한 중국의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대화 및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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