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는 식민지 지배에서 시작하여 해방, 분단, 통일을 겪으며 유독 ‘민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당연히 해야만 했던 국민 체조 행하기, 국민 교육 헌장 따라하기, 교련 교육, 태극기를 향한 경례 등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강요 받은 세뇌에 가까운 개념이라 느낀다.
2000년대 들어 탈근대, 탈민족주의 담론이 제기되면서 역사학계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 민족주의 논쟁은 한민족의 형성, 권력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성격, 민족(국가) 중심의 인식과 서술, 국사 해체 등에 대한 성찰을 가져온 바 있다.
그러나 비단 이는 과거에만 그친 개념은 아니다. 현재도 경주는 고대 신라 시기를 컨텐츠화하여 유물, 유적화하여 보존, 박물관화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다른 한편에서는 원전을 이용한 개발 이익을 노린다). 부산은 한국 전쟁 때 외국군이 들어온 통로로 이용되면서 자유주의 평화를 강조한다. 그곳에는 UN평화로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UN기념공원과 평화기념관이 있다. 인천은 근대 개항장으로 이용되었고, 한국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근대 관련 박물관들과 자유공원(맥아더 동상) 등이 있다.
내가 생각하던 ‘민족’이란 개념은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형태였다. 민족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어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국어 학자인 이희승 선생님의 사전 정의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이며 국민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을 뜻한다. 전자를 문화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개념이 이희승 선생님이 정의한 개념과 비슷한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원어는 nation, ethnic group, ethnicity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 중 네이션nation은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지면서도 구성원들이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개념이라면 ethnic group, ethnicity로 번역되는 에스니는 같은 공공 문화를 가질 뿐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까 nation은 정치적 공동체의 개념이 문화적 공동체의 개념에 더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책에서 ‘민족’은 상상된 개념으로 ‘제한된 범위의 주권을 가진 정치 공동체’라고 소개한다. 그는 민족에도 정치적 공동체 개념을 부여하였다. 민족은 과거 종교나 왕조 국가 공동체가 하던 역할을 근대에 들어서 자본주의와 인쇄 혁명이 준 가능성으로 열린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와 아메리카에 민족 국가의 모델(표준)에 만들어진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발명되었지만 식민지화된 지구들이 기술 복제의 시대에 입장하면서 형태와 기능을 바꾼 세 가지 권력 제도보다 문법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드물다. 세 가지 제도란 센서스, 지도, 박물관으로서, 이들은 함께 식민지 국가가 그 지배권을 상상하는 방식-그것이 통치하는 인간들의 본성, 그 영토의 지리학, 그 유래의 정당성-을 밑바닥에서부터 형성했다(P248).
센서의 허구는 모두가 거기에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하나의, 단 하나의 극히 분명한 지리가 있다는 것이다. [1보다 작은] 분수는 있을 수 없다(P251).
순수한 기호일 뿐, 더 이상 세계를 향한 나침반이 아닌 지도. 이러한 모습으로 무한히 복제 가능한 연쇄에 입장한 지도는 포스터나 공식 문장, 레터헤드, 잡지와 교과서의 표지, 식탁보, 호텔 벽 등에 전이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곧바로 알아볼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가시적인 로고 지도는 인민의 상상에 깊이 침투해, 태어나고 있는 반식민지 민족주의들을 위한 강력한 휘장의 형태를 구성했다(P262).
박물관, 박물관화하는 상상은 심원하게 정치적이다. 고대 사적을 파헤치고 개발하고, 분석하고, 전시하는 과정이 이어졌다(P267).
베네딕트 엔더슨은 비슷한 시기 서구적 관점에 의한 민족 정의에서, 식민지 입장의 관점을 적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주로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글로벌 관점에서 지역의 폭이 좁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아 구체적 사례가 좀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경험은 다르니 말이다. 동북아시아 중에서도 일본은 제국주의를 시행한 곳으로 다른 곳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해서 이 책은 늘 언급된다. 때문에 언젠가는 읽어봐야지 했는데 독서 모임에 이 책을 드디어 읽게 되었다. 책을 독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첫 술에 배부르랴, 어렵지만 첫 시도였다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민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 어렴풋이 정리할 수 있었다. 민족의 범위는 어떻게 정해야 할지, 국가는 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동원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마다 광복절에 반일 담론은 그치지를 않는다. 국가, 지방 정부의 기념 사업은 정치적 노선과 입장의 차이에 따라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한다. 그럴 때마다 국민들은 국가적 정치에 이용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상상된 네이션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 시기가 언제인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상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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