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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뭉우리돌의 바다

category 리뷰/책 2024. 9. 23. 10:13
 
뭉우리돌의 바다
★★★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제67화 광복절 특집 감동의 출연자 ★★★ 국가보훈처 보훈문화상, 다큐멘터리 온빛사진상 수상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인도에 간 한국광복군, 멕시코의 애니깽 농부들, 체 게바라의 동지, 한인 최초 백만장자, 우리 공군이 시작된 땅… 이제껏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바다 건너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자로 활동하다 여행자의 삶을 살던 김동우 작가는 세계일주를 하던 중 우연히 인도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그들의 흔적을 좇아 기록하기 시작한다. 중국,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본 등 10개국에 이른 생생한 현장 취재기, 그리고 끝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과의 에피소드를 110컷의 사진과 함께 이 책에 담아냈다. 또한 현장에 얽힌 깊고 내밀한 역사를 풀어내기 위해 수많은 논문과 단행본, 국내외 기사를 망라해 독립운동사를 재구성했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뭉우리돌.’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신을 협박하자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의 역사, 오늘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대한의 독립운동사가 우리 곁에 새롭게 다가온다.
저자
김동우
출판
수오서재
출판일
2021.07.29

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울림 때문이었다. 때론 그 진동과 떨림이 땅을 치며 우린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고 한탄을 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이 있어 내가 있으니. - P11

 

광복절이 있기 얼마 전 신임 독립기념관장 선정을 두고 여야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건국절 논쟁은 그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명백히 나와 있는 이 항목에 대해 대응하는 것이 어째서 논쟁이냐. 당연히 격렬히 싸워야 하는 논제이다.

광복절에 발표한 정부의 ‘8.16 통일 독트린’을 보니 뜬금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통일을 논하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 전개’,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인도적 지원 추진’ 이런 항목들은 북한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항목들 아닌가. 그냥 뱉고 보면 다인지… 대부분의 항목들이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금 대한민국 내부 정치도 합치를 못하는 마당에 무슨…’ 이란 말이 맴돌았다.

 

누구나 인생에 한두번은 세계여행을 하는 날을 꿈꾼다. 저자도 그렇게 두 번째 세계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인도의 델리 레드포트에 들렀다가 그곳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운동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로 여행 목적을 바꿔 그 때부터 세계 곳곳에 산적해 있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나와 무관한 관광지였다면 아마 그의 기존 계획은 변경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평소 저자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저자는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을 아우르는 여행기를 책에 내보인다. 

 

여행 목적을 바꾸게 한 장소인 델리 레드포트는 2차 대전 때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였던 곳이기도 하다(인면은 인도와 버마, 전구는 전투 지역이다). 인면전구공작대는 1943년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 파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된 이후 2년 여간 심리전단(적군 회유 특수 작전) 작전을 단행했다. 2020년 정부는 광복 75주년을 기념하여 영국군과 공작대 사이를 오가던 연락장교인 롤런드 베이컨 대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정작 인면전구공작대 대원 중 대장 한지성은 서훈을 받지 못했는데 1948년 월북을 선택했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의용대로 중국 땅을 누비다 광복군 대장으로 멀리 인도까지 날아간 사람 그리고 북한에서 숙청당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분단이 낳은 비극의 주인공 한지성. 이 이야기를 좇아가다 보니 마치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또 한 명의 김원봉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젠 만성이 돼버려 잘 느껴지지도 않는 침잠한 슬픔들(P40). 

 

멕시코 이민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대략 알고 있었는데 그 뒷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멕시코 이민이 브로커인 존 마이어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이어스는 1904년 국내에 들어온 뒤 전국 11개 지역에 대리점을 설치하고 신문에 허위 광고를 게재(기후가 좋고 부자가 많은 나라… 한국인이 가면 반드시 이득을 볼 것 등등)하여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이민자들은 배에 올라 우여곡절 끝에 멕시코 해변에 도착했지만 하선이 허락되지 않아서 4일간 배에 머물렀다. 당시 현지 통역인 권병숙(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촌)은 멕시코 애니깽 농장주 편에 서서 편지를 검열하거나 금지하는 등의 일을 앞장섰다고 한다. 남보다 못한 동포라니 희망에 부풀었던 이민자들을 두 번 죽이는 행동 아니었을지…

 

멕시코는 안창호와도 관련이 깊다. 당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그는 애니깽 농장주와 이민자들 간의 노동문제 해결하고 한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대한인국민회 단체 지회 설립을 위해 멕시코를 방문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환영식을 치르는 등 멕시코 활동을 모두 끝내고 돌아가려던 그의 귀국행은 고행이 되고 만다. 1918년 6월 귀국행에 오른 뒤 1924년이 되어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이 일본의 식민지란 이유로 번번히 비자 발급을 거부당해서 미국->중국(1919), 중국->미국:입국 거절(1921), 중국->미국(1924) 이런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고. 1918년 미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최초 좌절되었을 때 안창호는 멕시코 제2의 도시였던 과달라하라의 프란세스 호텔에 머물렀다. 2016년에야 호텔 측에서 안창호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 사실이 알려졌다고. 한쪽 벽면에는 안창호의 얼굴이, 한글과 스페인어로 기록 내용이 병기되어 있다. 

 

멕시코의 대표 독립운동가는 김익주다. 부끄럽지만 김익주의 업적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1920년 기준으로 김익주가 임시정부 등에 보낸 독립자금은 1,500달러에 이르렀고 대한인국민회 탐피코 지방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3.1혁명 기념식, 순국선열기념식 등을 주도했다(안창호가 멕시코에 들렀을 때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저자는 그의 손자인 다빗 킴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다빗 킴은 태평양 전쟁 후에도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할아버지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김익주가 많이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저자가 찍은 다빗 킴 사진이 인상적이었다(몇몇 중요 인물들의 경우 이런 기법을 써서 보여준다). 선명한 배경에 인물을 흐릿하게 처리하여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 같은 묘사를 한다고 느껴졌다. 

 

일제의 한국 병탄 소식이 전해지자 애니깽 노동자로 왔던 이들은 1910년 독립군 양성을 위해 숭무 학교를 설립한다. 멕시코에 이민 온 이들 중 200여 명이 대한제국 군인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 훈련 뿐 아니라 국어, 국사 교육 등을 철저히 교육했다고 한다. 다만 멕시코 혁명으로 1913년 짧은 세월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독립자금 모금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계속 후원했다.

 

쿠바 이민은 멕시코 이민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설탕 공급으로 유명했던 쿠바는 1차 대전으로 국제 설탕 가격이 오르자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이다. 멕시코 한인 270여 명은 애니깽 산업이 저물자 더 나은 생활을 꿈꾸기 위해 쿠바 땅을 밟는다. 하지만 현지의 사정은 기대 이상으로 좋지 않았고 시련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현지에 도착해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아무래도 쿠바는 한국과 제대로 된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은지라 더욱 정보가 부족했다. 인터넷 검색은 기본 흥신소도 찾아가보고 나중에는 국가보훈처에 민원까지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개인정보라 불가하다는 답변을 얻어 좌절했다고 한다. 사적지 자료와 위치는 거의 매번 같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나중에는 화가 치밀어 독립기념관 관장에게 메일을 쓰기도 했단다. 국내 사적지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마당에 국외사적지 관리야 오죽하랴 싶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기계적이거나 성의 없는 답변은 너무하지 않나 싶기는 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건데…

 

쿠바에도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존재했다. 쿠바 지방회는 1945년까지 2만여 달러를 모금해 교육비, 외교비 등에 사용했고 매년 3.1혁명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 독립을 향한 마음을 꾸준히 보탰다고 한다. 

 

저자는 빅토르가 운영하는 까사(민박)를 찾아갔다. 빅토르 호 차는 독립운동가 호근덕(1889~1975)의 후손이다. 호근덕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돕는 데 앞장선 인물로 2011년에서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빅토르가 직계 후손이라는 것도 2017년이 되어서야 밝혀져 서훈이 전달되었다고. 그는 최근까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묘소를 열심히 관리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환을 달래고 있다고. 저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가 되어 마지막에 방값과 식사비를 치르려고 하자 “내가 독립운동 사진을 찍겠다고 네 한국 집에 머물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우리 아버지가 너에겐 돈을 받지 않으시겠대…” 

 

마탄사스는 쿠바 야구의 고향 같은 곳이면서 동시에 한인들의 정착 생활이 시작된 공간이다. 시내 외곽 핀카 엘 볼로는 1920년대 한인 100여 가구가 이주해 살던 곳이다.

엘 볼로 입구에는 2005년 미국 시애틀 한인연합장로교회가 후원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에는 한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방인 기숙사가 있었고 옆 공터에서 3.1 기념식이 치러지기도 했단다. 독립운동가 임천택이 1932년 야학 교실을 열어 청년들을 상대로 교육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마을 한가운데 한글학교이자 교회로 쓰던 건물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집주인은 과거 그곳이 어떤 장소로 쓰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촬영을 허락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임천택은 본래 기독교 감리교도였다. 그러다 잡지 <개벽>의 이두성이란 사람 소개로 천도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천도교도가 되었다. 1933년 쿠바 천도교 종리원장으로 임명될 정도였는데, 1937년 최린 일파가 친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여 쿠바 천도교 종리원을 폐쇄하고 다시 감리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다. 

임천택은 쿠바 유일 한인 이민 역사서인 <큐바이민사>를 남기기도 했다. 딸인 마르따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직접 답사를 하며 발품을 팔아 <쿠바의 한국인들>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소중한 기록을 남겨준 이들 덕분에 쿠바의 한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카르데나스에는 독립운동가 이윤상의 딸 레오노르 이 박이 살고 있다. 이윤상은 1917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광주학생학일운동에는 특히나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이윤상이란 이름은 쿠바 한인 관련 기록에는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록에만 존재하다가 2018년 한 대학의 후손 찾기 봉사단의 노력으로 이윤상의 딸이 레오노르 여사라는 게 확인됐다. 그 전까지 레오노르 여사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쿠바 이민 1세대들은 모두 사망했다. 당시를 증언해줄 사람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이다. 먼지 수북한 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갖고 있는 거라곤 사진 몇 장과 유품이 전부다. 게다가 쿠바 이민 초기 39개쯤 되는 성 마저 세월이 흐르면서 이 씨는 리Lee, 김 씨는 킨Kin 또는 킹King, 강 씨는 칸Kan,Can 등으로 변해 누가 누구의 핏줄인지 찾을 길이 더욱 묘연해졌다. - P241

 

하와이 이민은 대한제국이 허가한 처음이자 마지막 집단 이주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값싼 노동력이었고 농장주들은 중국인, 일본인 노동자 대신에 대한제국 노동자들에 주목했다. 그렇게 1902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로 넘어간 한인들은 모두 7,300여 명을 헤아린다. 대한제국은 이들에게 외교적 보호나 지원 등을 해주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 박탈로 하와이 이민이 금지되었다. 이후에 이민자들은 미국 본토로 갈 것인지 곻샹으로 갈 것인지 하와이에 남을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이렇게 미국의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9년 다뉴바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이 창단된다. 이 단체는 여성들이 근검절약해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하다. 단원들은 후원금을 모아 매달 3달러의 회비를 보탰다. 

대한여자애국단에 있던 한성신은 <신한민보>에 이런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 여러분의 딸들이나 아내들이 나라를 돕겠다고 돈을 좀 청구할 때에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거나 성을 내지 마소서.

대한은 남자 여러분의 대한만 아니요, 우리 여자들의 대한도 되나니 여러분의 아내나 딸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의무를 각근히 하게 하소서. … - P315

 

중가주는 독립운동의 금맥이 되는 곳이었다. 통역관으로 하와이에 간 김형순은 ‘넥타린’이란 품종을 개발하여 털 없는 복숭아로 백만장자 반열에 올랐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 지원에 힘을 보탠 것이다.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도 마찬가지다. 

임정 초대 군무총장에 임명된 노백린은 대한인국민회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해 비행 교관을 양성하는 데 앞장섰다. 일반 비행학교 교육생이 아닌 임정 산하 비행군단 소속 훈련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설립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폭풍이 강타하여 후원자인 김종림의 쌀농사 업체가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때문에 비행학교는 문을 닫고 김종림의 사업도 이후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김종림은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60을 앞둔 나이에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에 지원하고 두 아들도 미 해군으로 참전하여 일본과 싸웠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2005년이 되어서야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를 비롯하여 장인환과 전명운에 얽힌 이야기(너무 슬퍼서 눈물을 여러 번 훔쳤다. 마지막까지 슬프기 짝이 없는…), 이승만에 얽힌 이야기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 책은 붙잡지 않았으면 포착되지 못했을 그 증거의 현장을 찾아 발벗고 나선 저자의 기록이다. 대부분의 현장은 침묵이 흐르고 말이 없다. 그는 그런 순간들을 마주하고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인 대답은 나올 수 없지만 눈여겨 보지 않았으면 놓쳤을 현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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