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만이 관심거리가 된 듯하지 않나. 진단이 틀렸기를 바라지만, 공감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 같다. 인간성은 종적을 감추었고, 그 탓에 사회 각 분야에서 전에 없던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삭막한 삶은 철학을 일상과 분리시켰으며 문학은 시들어 힘을 잃은지 오래고 역사는 극소수가 즐기는 변방의 취미 정도가 돼버린 느낌이다. 사진은 어떤가. 이미지 한 장에 깃든 정신과 사상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기술에만 눈길을 준다.
최근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광복 직전 일본 히로시마에 머물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었다. 금시초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P11, 12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은 이야기 두 번째, 러시아와 네덜란드 편을 펼쳤다.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들녘이다. 러시아는 중국을 제외하고 특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공간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말 일들이 많다. 저자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영영 알 길 없는 일이 되었을지 모른다. 일본에 가게 된 이유가 강제 징용 때문인지 자발적 노동자로 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공간은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질문을 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이민은 1863년 연해주에 조선인들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883년 조선 월강 금지가 해제되고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한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891년 한인을 3단계로 분류하는데 원호는 러시아 국적 취득자로 규정하여 관리했다. 원호들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고 가구 당 토지를 분배하고 조세, 부역, 군역 의무를 지게 하고 상투/댕기를 정리하도록 했다.
연추는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다. 최재형은 일찍부터 가족과 함께 연해주에 정착한 1세대 한인 중 하나였다. 이범윤은 1903년 간도관리사에 임명되여 러시아와 함께 일본과 싸우다가 전쟁이 끝나자 연추로 이동했다. 연추에서 그는 최재형의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이후 동의회가 창립될 때 둘은 구성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재형과 이범윤은 물과 기름처럼 갈등했고, 결국 이범윤 측은 최재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909년 최재형은 총탄에 맞아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
저자도 말하지만 안중근에 대한 일화를 보니 영화 <영웅>에서 그가 의병 활동을 하다가 풀어준 일본 포로에 의해 본인이 오히려 쫓기는 사연이 나온다. 이걸 보고 있자니 그의 이론은 너무 거창했나 싶기도 하다. 나중에 그가 말했다던 동양평화론도 요원한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거창한 논리 앞에 인간의 이기심은 너무나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인 것이 아닌지…
연추의 포시예트 항구는 당시로 말하면 코리아 타운이 형성된 곳이었다. 지신허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이었는데 현재는 옛터만 남아 있다. 1937년까지 1천 7백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이었다. 이곳에 가수 서태지가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무엇이라도 남아서 사진 작가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에 저자는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직접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블라디보스토크를 선조들은 해삼위라고 불렀다. 신한촌 개척리가 세워지고 1910년 성명회를 조직하고 일부 한인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무력 시위를 펼쳤다. 일본 영사관은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1911년 개척리 철거를 확정한다. 3천 명의 한인들은 이때 철도 공사 현장이나 광산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고.
1917년 러시아 내전 발발 후 1차 대전에 출전해 있던 러시아 내 체코 군단은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의 의견에 따라 서부전선 합류를 할지, 동부 전선에 머물지 고민하다 체코 임시정부가 있는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체코 군단은 짐을 줄이고 경비를 마련해야 했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무장 강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서로가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영화 <놈놈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배경 이야기인 철혈광복단의 15만원 사건도 시작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파견된 중견 관료인 기토 가쓰미와 손을 잡고 1922년까지 밀정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혼선을 주었다. ‘15만원 탈취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의 밀정 노릇이 더 길게 이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일제는 더는 활용 가치가 없어진 그를 버렸다.
네덜란드 헤이그는 현지명으로는 텐하그라고 불린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본래 1906년에 열리기로 되어 이용익이 특사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로 연기되자 그 사이 사망한 이용익을 대신해 특사로 파견할 이를 구해야 했다. 이때 상동교회 교인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상동파가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는데 이준이 상동파 청년회장이었기에 헤이그 파견자로 낙점되었다. 이상설 이외에 부사이자 통역인 이위종, 거기에 선교사 호머 헐버트도 제4특사로 함께 했다. 러시아 초대공사였던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헤이그 특사들을 위해 물밑에서 도왔다. 일제는 그를 갖은 고문, 협박, 회유 등으로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단행되고 이범진은 10월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해 연해주 한인 사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미국 동포들을 위해 자금을 보내고 장례 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장례 비용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서 세 통을 작성한 뒤 한 작은 집에서 천장에 목을 매기까지… 그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유해는 1911년 2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헤이그에 이준열사기념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992년 네덜란드 한 신문에 이준 열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요. 그걸 본 거예요. 그리고 한걸음에 드 용 호텔 건물을 찾았죠. 1층은 당구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에서 3층은 무주택자 임시 숙소로 쓰이고 있었어요. 건물 상태는 다 허물어져 가고 있었지요. 당시 건물은 헤이그 시 소유였는데 재개발이 추진 중이었어요. 건물을 구매하려면 공매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입주자에게 매매 우선권이 있었어요. 당시 시장에게 헤이그 특사와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설명하는 청원서를 보냈죠. 다행히 시장이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해주었어요. 그렇게 시 협조를 얻어 이 건물을 사게 됐죠. - P208
박물관 원장의 가이드에 따라 저자는 이준의 무덤을 봉환한 뒤 남은 원래 자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1907년 사망한 이준의 사인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가 순국한 방 벽에는 사망진단서가 걸려 있는데 사인이 빠져 있다. 7월 14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타살인지 자살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의 죽음을 그저 황망히 생각할 따름이다. 방 한 구석에는 이준의 무덤에 처음 썼던 비석도 놓여 있다. 그 비석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우수리스크에는 아픈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상설이 눈을 감은 곳이고, 최재형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상설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뿌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 이민원, <이상설>, 2017*
만주로 망명한 뒤 내내 국외를 떠돌던 이상설은 병석에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족들과 이별한 채 그리움을 안고 사망했으니 말이다.
이범진도, 이상설도 마지막 가는 길이 참담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끝맺음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시 중심에서 떨어진 소비에트 스카야 언덕에는 1920년 4월 참변 당시 400여 명이 총살된 현장이고 최재형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 언덕을 무수히 올랐다는 저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을까. 궁금증과 물음, 갈증으로 보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유시는 더 참담한 현장일 것이다. 간도 참변의 재현인 자유시 참변이 있던 현장이 아니던가. 참변 현장은 체스노코프역이고 독립군들이 매장된 곳은 클라드비세 공동묘지다. 자유시 참변 추모비는 현재 스보보드니 외곽 소벳스키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1937년 강제 이주 전까지는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과거 러시아 사람들은 ‘고려촌’으로 불렀다. 자유시 참변 당시 마을 인근에서 사망한 독립군이 묻힌 인연으로 2017년 6월 9일 추모비가 세워졌다. 생각보다 참 많이 늦었다. 비석에는 아래와 비문이 적혀 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력 1921.06.28. 흑강 자유시사건 독립군순절지.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
같은 독립군들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어쩌면 남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더 충격에 빠졌을지 모른다. 한동안 해외 독립운동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하바롭스크는 김유천 거리, 조명희의 흔적, 한인사회당이 창당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제는 김알렉산드리아의 자취로도 알려진 곳이다. 김알렉산드리아는 1914년 홀로 우랄행 열차에 올라 혁명가의 길에 뛰어든다. 그녀는 현지 노동자의 인권과 처우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책임서기, 회계에 선임되었다. 1918년 체코 군단이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키자 일본-서구 연합군은 군사를 개입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백군과 연합한다. 미처 피하지 못한 김알렉산드리아는 잡히고, 전향을 거부한 그녀는 31살의 나이로 순국한다. 김알렉산드리아의 처형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우초스 절벽 또는 죽음의 계곡으로 두 가지 설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죽을 자리를 스스로 선택했다. 주인 의식이 있었던 그녀는 마지막까지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음 편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 기대되는 시리즈가 될 예정이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기록하는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일상의 관심 밖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삶의 울타리를 넘으면 무관심의 들녘이 펼쳐진다. 거기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총을 든 경비원들 뿐이었다. 그를 피해 잠시 긴장을 놓으면 어느새 버스가 떠나버리기도 한다. 들녘을 터벅터벅 걸어 어렵사리 목적지를 찾아가면 황량한 빈터가 전부이거나, 누군가 두 팔 벌려 환영해줄지 모른다는 상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기록해놓을 순 없다. 또박또박 찍어 나가는 사진은 분에 넘치는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편하자고, 비용을 줄여보자고 카메라를 잘못 선택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남을 것 같다. 누가 정해놓거나 시킨 게 아니다. 단지 당당하고 떳떳하고자 했을 뿐이다. 누구에게? 나보다 먼저 나라를 생각하며 지금을 존재케 한 과거의 그들에게. <뭉우리돌을 찾아서>는 내게 그런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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