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광장에 선 주체로서의 여성이 역사의 증언자로서 등장하는 시기다. 1970년대 서서히 시작된 페미니즘적 시각이 주류 담론과 갈등 및 분열을 일으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정도까지가 ‘민족’이라는 의미가 가능했던 때가 아니었나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더 이상 ‘민족’이라는 명칭을 쓰기에는 낡은 개념이 되어 버린다.
1980년대 여성들은 노동자, 민중적 주체로 많은 활동을 했다. 아무래도 5.18과 87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사건인 만큼 문학의 소재로 다양하게 쓰였다. 특히 5.18은 국가가 국민을 탄압한데다 많은 사상자를 낸 만큼 특히 많은 글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민중 문학이 활발했는데 여성 작가들이 어떤 특별함을 부여했는지 그것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 당연히 이전 시기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여성의 시각을 드러낸 주제의 문학도 존재한다. 한국 문화를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홍희담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광주 민주여성 단체인 송백회 활동을 하는 등 활동가적인 면모도 있다. 특히 <깃발>은 5.18 때 도청을 사수한 여공들의 활약을 담은 중편 소설이라는데 정작 분량 때문인지 담겨져 있지 않아 아쉬웠다.
김채원은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되는 경험을 겪었고 자신은 남한에서 지내다 1975년 이후에는 미국,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아버지를 전쟁 때 잃은 경험은 상실과 고통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찍부터 가장이 되어 살아야 했던 만큼 주체적으로 일어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을 것 같기도 하다. 화가이기도 한 김채원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내면화하여 표현한다.
<거울의 환>에서는 김치, 된장찌개, 동치미 등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먹던 음식이 등장한다. 묘사를 보고 있자니 마치 밥상 위에 앉아 있는 등 침샘을 자극할 정도였다. 주인공은 예전에 살던 집을 찾던 중 길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데, 헤어진 이후 연락을 기다린다.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 거주지에 남고 남은 식구들은 피난길에 오르기도 한다. 어머니와 딸은 갈등 끝에 화해한다. 어머니와 딸은 갈등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어요.” 라고 말했던 딸이 어머니의 나이가 되면 과거의 그녀를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갑갑하게 살았을지 모를 어머니를 이제는 이해하는 세대가 되었다.
역사는 구르고 사람들은 그 역사라는 것을 피를 흘리면서도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 P229
나이 들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 아니라 나이 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으로, 저의 성을 찾아 여기에 서는 일은 이리도 힘이 든 일입니다. - P248
앞선 시기 최초의 희곡 작가인 김자림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정복근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1976년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 작가로 등단하여 많은 희곡을 발표했고 여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고 한다. 대중적으로도 작품이 성공하여 그는 한국 연극계에 이름을 단단히 남겼다. 1980년대가 민중이 글의 주체로 등장하는 만큼 그의 희곡에도 민중적 서사를 담았으나 여기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추가시켰다는 것이 포인트다.
<덫에 걸린 집>에서는 시대는 바뀌었어도 여전히 권력에 취하고 싶어 기생을 찾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절도와 강간 피해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안 망신이라며 숨기기 급급한 사람들의 심리도 엿볼 수 있는데 읽는 것만으로 생생함이 느껴져 절망스러웠다. 오늘날에는 발전된 디지털 체계로 여성의 성은 더욱 난도질당하기 쉬운 환경에 들어서게 되버렸다. 어떤 것도 믿을 만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정파괴범이란 건 대체 누가 붙인 책임 회피적인 이름이지요? 그런 녀석들은 단지 용서 못 할 파렴치범에 불과해요. 집안이 그런 하찮은 범죄 때문에 깨어지는 줄 아세요? 비루한 인습 때문에 깨어지고 배신 때문에 깨어져요. 남편은 아내를 배신하고, 가족은 피해자를 배신하고, 피해자도 자신을 배신해요. (가방 들고 나가며) 난 이제 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 P318
강석경은 1985년 등단 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상업주의 문학을 배격하는 모임인 ‘작가’ 동인에 합류해 창작 활동을 했다. 산업 사회에서 글을 쓰면서 상업주의 문학을 배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싶은데 실제로 그의 글의 소재는 이와 관련하여 먹고 살기 위해 문학적 순수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실존적 고뇌를 다룬다.
<밤의 요람>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데 그녀들이 일상적으로 받는 차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선희와 마크, 애니와 톰슨, 미라 등이 등장한다. 기지촌 여성들의 신산한 삶과 피부색, 돈으로 평가되는 개인의 희비극이 그려진다.
술병이 뒹구는 거리도 어린아이처럼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자부심을 지닌 백인과 그 빛의 어둠인 흑인, 거대한 체구의 아메리칸에게 달러와 사랑을 뺏는 여자들, 그들 모두가 밤의 요람에 잠들어 있었다. 발 딛고 내릴 제 땅을 찾지 못하고 욕망의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색색의 인종들이, … - P370
1980년대는 여성 작가 단체, 잡지 등이 등장하기도 했던 때다. 여성평우회, 또 하나의 문화, 여성, 여성운동과 문학 등이 그 주인공이다.
여성평우회는 한국 여성의 억압이 가부장제 산업화 분단 등에 의해 구조화되었음을 정면으로 응시한, 분단 이후 최초의 단체였다. 여성평우회는 기관지를 펴내고 배움에 대한 나눔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방면의 사업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다른 여성 단체와 연대하여 여성 문제를 사회정치적 의제로 내세웠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특히 여성 문화 큰 잔치는 마당극에 여성주의적 시각을 덧붙여 내놓은 문화 컨텐츠라고 볼 수 있다. 막을 내린 후에도 한국여성노동자회의 문화 운동으로 계승되어 명맥을 이었다.
책에는 1984년 10월에 펼쳐진 여성문화 큰잔치 연희마당을 실어 놓았는데 노동자 및 여성의 현실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마당 놀이 답게 다양한 컨텐츠가 눈에 띈다. 고사문, 민요 함께 부르기, 이야기마당, 연희마당에는 영화, 사례극, 굿 등의 형식을 빌어 현실을 대차게 깐다.
시어머니 갓마흔에 아들 낳아
잡색 갓마흔에 아들 낳아
시어머니 어서어서 키워 내어
잡색 어서어서 키워 내어
시어머니 판검사를 만들어서
잡색 판검사를 만들어서
시어머니 농부 신세 면해 보세
잡색 농부 신세 면해 보세
가요 가요 나는 가요
가요 가요 나는 가요 돈 벌러 가요
부모 형제 멀리 떠나 공장에 가요 ( 두 번 반복함) - P598
뭐? 노동자의 인권? 인권 같은 소리 하네. 야, 돈 버는 데 인권이 어디 있고 인정이 어디 있고 양심이 어디 있냐?
뭐? 배가 아프다고? 생리휴가를 달라고? 웃기시네. 야, 생리 안하는 여자 봤어? 아픈 배 움켜쥐고 죽어라고 일해서 이만큼이나 사는 거고 국가도 튼튼해진 거야. 알어?
이 따위로 일해서 어떻게 작업량을 채우나? 매수 더 뽑아! 불량 내지 말고 정신 차려!(졸고 있는 노동자들 어이없는 듯 쳐다보다가 발길질을 하며)
이게 진짜….. - P600
우리 정부에서는 부강 한국을 위해서 여성 인력 20만을 풀가동시키고 있읍니다. 대한민국 만세! 애국 다찌 만세! (목소리를 낮추며) 니뽄이노, 노동자노, 청소부노 여러분. 논개 정신, 정신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후예들이 환락의 고장, 서울에서 여러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므니다. … - P601
우리 재산, 공동 명의로 합시다. - P608
매맞던 부인, 잡색들의 응원으로 남편을 물고 꼬집고 대든다. 그러나 역부족인 미세스 폭력, 심하게 걷어차이며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폭력 남편, 한 발을 아내 위에 올리고 승리의 표시를 한다. - P611
어이 시집이나 가지.
여자는 결혼이 최고야.
아들이나 낳지.
… - P615
<여성>은 1985년 창비가 간행한 무크지로 출발했다. 진보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여성 지식인들이 편집인과 필진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기존 여성 문학을 비판하고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과 민주 운동이 결합하면서 겪는 과정을 통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박완서, 박경리 작품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여성 해방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은 불철저한 세계관과 연결될 뿐 아니라 인간 해방을 위해 가장 철저히 싸워 나갈 수 있는 집단을 무시한 어떤 해방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인간 해방을 위한 총체적 이념의 정립과 여성운동의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 - <여성> 1호, P676
교묘하게도 1987년 체제가 막을 내릴 때쯤 여성문학 단체의 활동이 막을 내린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또 하나의 문화>의 실험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여성주의 무크로 발행된 잡지다. 필진이 조한혜정, 김은실, 조옥라 등 여성학 전공자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띈다. 다른 여성주의 단체와 달리 1987년 출판사가 설립되어 2003년까지 갔다. 여성의 글쓰기와 표현 양식의 중요함을 알리고 출판 활동에 주안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우리의 우선적인 대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로 현재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되겠죠. … 또 하나는 고등교육을 통해 남녀는 평등하다는 의식은 깨우쳤으면서도 구체적 현실의 장애에 부딪쳐서 제대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식층 여성이나, 소수의 좀 더 풍성한 삶을 살고자 하는 남성들이겠지요. 그들이 현재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구체적 현실의 장에서 서로 용기를 북돋우면서 발전적 대안을 찾도록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도록 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좌담 ‘또 하나의 문화’를 펴내며, P667
어느덧 한국 여성문학 선집 마지막 권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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