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시민이 등장하면서 공론장의 자각 변동이 이루어진 때이다. 그러나 ... 냉전주의는 시민의 자유를 납작하게 짓눌렀고, 개발과 진보는 신화적 가치로 자리 잡아 신분 상승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는 한편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는 불가피한 선택인 양 호도되었다. 또한 서구와 구별되는 한국적 근대화를 향한 이상은 여성을 사적 영역과 전통 속으로 밀어넣어 시민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 작가들은 여성에게 할당된 모성의 위상을 수락하며 여성의 시민적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성역할, 가족, 전통, 연성, 문화에 갇히는 역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진 여성 작가들은 자율적 개인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가부장제의 여성성 규범을 내파하는 여성 성장을 도모하고, 냉전 권력의 금기를 깨는 ... - P37
한국여성문학선집 4권은 1960년대를 다룬다. 전쟁 후유증에서 벗어나 이제 좀 자신을 알아가면서 자각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는 한편 4.19 이후 목소리를 봉쇄당하는 감시 사회의 단면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또 이 시기가 되면 여성의 몸과 욕망에 대한 주제가 담긴 글이 늘어난다. 여성 작가들은 여성 문학이 한국 문학의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중심에 떠오를 수 있도록 서서히 시동을 건다는 것도 눈에 띈다.
박순녀는 태어난 곳은 함흥이었으나 학업을 위해 홀로 월남하여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소설만 쓴 것이 아니고 번역도 하고 드라마도 집필하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작품 활동까지 병행했다고 한다.
<아이 러브 유>에서는 일제 말 여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식민 체제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당시 학교는 여학생들을 근로 봉사라는 미명 아래 방공모를 쓰고 몸빼 바지를 입힌 뒤 전시 훈련 교육을 시켰다. 선생과 교사 간의 갈등은 전시 말에 갈수록 극에 달한다. 일본 출신 선생님과 조선 출신 선생님 간의 비교와 갈등이 눈에 띄게 보이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떤 한 개인과 집단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과 상황이 존재함에도 한쪽으로 매도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기에.
<어떤 파리>에서는 술집에서, 학교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했다가 감시를 당하거나 쫓기는 일이 일상적이었음을 경험하게 한다. 선생이 인사 조처를 당하자 아이들이 선생님은 아무 죄가 없으니 돌려달라 말하는데 정부 조사원이 아이들 집을 모두 찾아다니며 배후를 추궁하는 부분에서는 무엇이 사회를 이렇게까지 만드는 것인가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한 이웃이 간첩이 될 위기에 처하자 증언을 하기로 결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선택을 나라면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했다.
난 도무지 너흴 믿을 수 없단 말야. 순진하다면 순진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바보라고도 할 수 있지. 아니 너무나 모른다. 결국 모르기 때문에 불쌍한 거야. 넌 지금 일본 사람이라는 것에 폭발적인 불신과 증오를 느끼게 된 모양이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우리 모든 사람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눠져 있는 거란다. 말하자면 일본 사람만이 가해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만이 피해자랄 수도 없어. 너는 알 수 없겠지만 나도 역시 피해자의 한 사람일 따름이야. - 아이 러브 유, P113
빛과 색, 내 앞으로 내 뒤로 꽉 들이차 있는 그 빛과 검은색, 빛과 색-내 사고력은 온통 빛과 색에 동원됐고 나는 그 빛과 색에 묻혀 앗! 하는 내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 어떤 파리, P153
이정호는 한국 전쟁 때 김일성을 찬양한 일로 교사를 그만두고 국군에 입성한 뒤 대한청년단 선전부원이 되는 등 놀라운 선택을 했다. 흥남 철수 때 가족과 헤어지는 바람에 이북인 고향을 떠나와 남한에 정착해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한 뒷 이야기를 글로 써 냈다. 전쟁의 서사는 대부분 남성의 시점에서 쓰여지는 경우가 많은 만큼 소중한 기록이라 여겨진다.
<잔양>이 바로 흥남 철수 때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철수 전 긴박한 상황이지만 군인들은 자유 시간을 갖게 되자 이 때를 만끽하기 위해 마지막을 불태우듯 노는데 열중한다. 미래가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타락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야 따분하게 방에 박혀 있지 말구 밖으로 나가자. 그래. 나는 선뜻 밖으로 나왔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아무 데나 쏘다니고 싶었다. … 엄의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꺼리낌 없이 짐승이 된다는 건 참 유쾌한 일이야. 자넨 그래 의식적으로 그걸 맛보았는가? 의식적이라기보다 오늘 저녁 같은 때는 자연 그렇게 돼 있지 않은가. 평생에 몇 번 없을걸, 이런 챤스는. 죄악이네. 죄악? 짐승이 되고 난 뒤 사람은 더 선량해지는 것이 아닐까? 침묵, 빛나는 눈, 거센 숨결,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 가자!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들어가는 패배와 굴육들, 쓰라림, 나는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모른다. - 잔양, P177
정연희는 보수적 시각에 반대하는 불륜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정점>에서 중산층 부부가 등장한다. 지영은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심장판막증으로 작품 활동을 강제 중단한 뒤 발레리나를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결혼은 생각했던 이상이 아니었고, 그녀는 남편과 자신이 동화될 수 없음을 깨닫는데, 그 때 마침 내연녀가 등장한다. 완벽한 행복 뒤에는 불안한 서사가 존재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하긴 결혼이란 선택지가 당시로서는 정상 범위에 속하는 것이었을테니.
결혼 생활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들고, 주름은 늘고 거울을 보는 것이 싫어질 때가 온다. 지영은 거울을 보며 무신경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 좀 서글펐다.
꿈과도 같은 황홀한 젊음이 거울 속에 있다. 그것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사십이 넘은 여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십 대의 팽팽한 살갗이다. 차가웠지만 총명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댕그마니 거울 속에 따올라 있었다. … 그 얼굴을 보면서 뜻하지 않았던 희망과도 같은 감동이 살아 움직인다. 무거운 몸에 날개라도 돋아나는 듯한 기분이다. 지영은 손으로 그 얼굴을 쓰다듬는다.
쓰다듬으며 보니까 그 팽팽하던 얼굴에 갑자기 잔주름이 무수하게 생겼다. - 정점, P248
허영자는 1963년 한국 최초의 여성 시인 동인인 ‘청미회’ 결성에 참여하여 1998년까지 활동을 했다. 그는 서정시를 쓰지만 이성 한 스푼이 들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녹음>에서는 무당춤을 추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억제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광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살면서 단 한번도 미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여성은 없을 것이다. 돌아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미쳐버리면 안 된다는 주문을 외우며 억지로 이성으로 잠재우던 때가 나도 꽤나 있었던 것 같다.
후루루 몸을 털곤
천지는 또 한 번
무당의 활옷을 챙겨 입었다
다스려 다스려
반눈이나 붙였던 핏물
치오르는 곤두박질을
어쩌면 좋아,
칠칠 흘러내려
비릿내 도는
화냥기를
참말 어쩌면 좋아,
가슴 불꽃을 온통 내쏟아
짱짱한 목소리의
노래를 부르리라
미쳐나는 춤
시퍼런 칼춤을
전신만신으로
또 춤추리라.
- 녹음, P288~289
박시정은 재미 한인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을 주로 썼다. 이는 미 한국어 교사로 근무한 경험, 미 평화봉사단 활동 등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날개 소리>에서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장 선생이 등장한다. 그는 타자로서 외국에 철저히 생활해야 하는 고립감과 열등감이 노이로제가 되어 정신병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당시 해외에 나간 많은 한국인은 이방인으로 생활하면서도 잘 해내고 싶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가부장적 문화의 배경을 가진 한국과 다른 외국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지금 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비쳐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내 옷을 벗어 보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은 때로 한국 문화에, 또는 습관에 충격을 받아 훈련 생활을 포기하고 떠나 버린다. 한국적 상황에서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떠나보내기 위해서 그들이 한국에 가기 전에 한국을 적나라하게 소개하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싫다. 그들이 극히 일부분, 그 일부분의 껍데기만 보고 한국을 단정해 버리면 그들의 뇌리엔 평생 잿더미 변소가 한국의 인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 나는 뭔가 잔뜩 기분이 일그러져서 슬라이드가 새것으로 바뀌기를 기다렸다. - 날개 소리,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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