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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의 서막

category 일상다반사/책 이야기 2023. 11. 25. 22:17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기 시작했다. 1부는 긴가 민가했는데 2부는 '어라?'했고 이후는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총 32부작이여서 전개가 빠른지라 마치 영상의 skip 버튼을 누른 듯하여서 내용상의 풍성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쉽다. 그러고 보면 미디어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예전의 사극 200부작 같은 것은 기대할 수가 없겠지. 

의외로 거란 황제인 야율융서나 소배압 장군을 영상으로 보니 앞으로 나올 분량에서 당시의 거란 내부 사정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커졌다.

 

 

 

이미 4부까지 방영이 되었으나 나는 아직 3부까지만 본 관계로 본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을 기록을 통해서 찾아보기로 했다. 

 

1, 2부에서는 목종과 천추태후의 갈등, 목종과 김치양(이때는 ‘우복야’ 관직에 올라 있었다)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극 배경은 목종 12년 상황이므로 그가 내려올 날이 머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목종의 재위 기간은 총 13년이다).

 

1부에는 목종이 유행간과 유충정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천추태후의 섭정을 떠나 이미 친정을 하고 있었음에도 중요한 결정은 대신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미루는 등 정사와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인다. 

 

국경 지대에는 계속 긴장이 감돌았지만 궁중에서는 나태와 방탕과 음모가 판을 쳤다. 목종은 성종의 아우로 왕위에 올랐으나 성격이 매우 나약했다. 그는 태후 황보씨(경종의 후비)와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스스로는 아무 일도 처리하지 못했다. 그런 탓인지 근시(近侍)를 총애하여 터무니없이 요직을 주기도 하고 이들을 침실로 끌어들여 남색을 즐기기도 하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69 >

 

김치양은 중의 신분으로 궁중에 출입하며 과부 황보씨를 범하여서 귀양을 갔다 목종의 즉위 후 천추태후의 명으로 궁중에 복귀하였고 ‘우복야’라는 고위 관직에 오른다. 그는 뇌물 등 각종 수단을 통해 재물을 불려 집이 300여 칸이나 되었고 집안에 누각과 연못, 정자, 동산을 지어 화려하기가 궁궐과 같았다. 3부에서 김치양과 목종의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이 나오는데 나는 배경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세트장이여서 단지 좁은 범위를 보여줄 뿐이었지만 300 칸이 넘는 집은 대체 얼마나 넓고 번쩍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1009년(목종 12년) 목종과 천추태후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태자를 세우려 하며 문제가 커진다. 드라마 상에서는 태조의 핏줄인 대량원군(훗날 현종)을 둘러싸고 태후는 죽이려 하고 목종은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열두 살짜리 대량원군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하고 출가를 시켰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태후는 사람을 보내 절에서 외롭게 사는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 절의 중이 밀실을 만들어 끝까지 대량원군을 보호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1 >

 

이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관련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긴 김치양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는 마당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이므로 조선 건립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을테니 감안하고 봐야할 것이다. 

다행히 다른 책에서 관련 내용이 있었는데 밀실 내용을 드라마에서도 보여줘서 깜짝 놀랐다. 

 

2부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장면이 있었는데 관련 기록이 고려사에 있었다. 목종은 스스로 자초한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정치력이나 인품 등에서 왜곡되거나 과장, 축소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신 왕이 상정전(詳政殿)에 임어(臨御)하여 관등(觀燈)을 하고 있는데,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 불이 나고 번져서 천추전(千秋殿)을 태웠다. 왕이 궁궐 건물과 창고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비탄해 하다가 병이 나서 정무(政務)를 보지 않았다. < 고려사 1009년 1월 16일(음) 임신(壬申) , 1009년 2월 13일(양) >

 

극에서는 목종이 백성들을 모으고 관등회를 열었다가 화재가 나 도망가는 상황에서 “도망치거라!”를 외치고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불은 김치양의 주도 하에, 태후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는데 기록으로는 보다시피 지극히 건조하게 되어 있다. '비탄해 하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일어난 상황만 안타까웠던 것인지 정황을 알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다른 책에서 발견했다. 

 

이즈음 태후가 거처하는 천추궁에 불이 났다. 불길은 사정 없이 다른 건물과 창고에까지 옮겨 붙었다. 심약한 임금은 불에 놀라고 슬퍼한 끝에 병이 나 드러눕고 말았다. 불길이 잡히자 조정에서는 궁문을 닫고 승려들을 불러들여 구명도량(救命道揚)을 설치하여 불에 타죽은 사람의 시체를 거두고 부상자를 가려내 구호하도록 했다. 이 화재로 궁중은 불안에 떨었고 인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1 >

 

극 화면상으로는 왕이 백성을 직접 구제한 것 같지는 않으나 어쨌든 후속 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합작하여 자신의 아이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가 일이 지나치게 커졌다. 과연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이 일로 결별했을까. 김치양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본인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에) 태후를 압박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실망하는데 글쎄… 이는 극화를 시키기 위함이 아니였을까. 다만 둘 사이에는 둘이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는 것이 더 맞아 보인다. 

 

목종은 김치양을 제압하기 위해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강조는 저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 곧바로 대궐로 쳐들어갔다.  강조는 임금을 능멸하며 법왕사에 유폐시켰다. 임금은 뜻하지 않은 사태에 놀라 통곡하였다. 강조는 대량원군을 맞이하여 새 임금 자리에 앉혔다. 이어 김치양과 일당을 잡아 죽이고 나머지 세력은 귀양을 보냈다. 

그는 임금과 태후 황보씨를 충주로 쫓아냈다. 강조는 충주로 가고 있는 목종에게 독약을 보냈는데, 목종은 독약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독약을 들고 갔던 자들이 임금을 죽이고 나서 자결하였다고 떠들어댔다. 임금의 시체는 문짝으로 짠 관에 넣어져 관소(館所) 주변에 매장되었다. 태후 황보씨는 이 틈을 타서 황주로 도망쳤다. 

목종은 이렇게 어이없이 죽고, 대량원군이 왕위에 올랐다. 1009년 1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172 >

 

임금에게 충성하던 강조가 왜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는지 오리무중인 측면이 많았는데 화면으로 일률적으로 보니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강조는 이미 목종이 시해당했음을 알고 김치양을 처단하기 위해 일어섰으나 결국은 현 조정이 더는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목종 옆에 유충정과 유행간이 있고 목종이 지금과 같은 정치를 계속한다면 더는 고려에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강조의 변 이전 거란의 사정을 보자. 

 

왕건이 북쪽 지대에서 축성 공사를 한창 벌일 때인 922년에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과 털방석을 예물로 보내며 우호를 보였다. 이것이 거란과 고려의 첫 외교관계였다. 야율아보기는 한편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에 우호를 보인 것이다.
고려는 후백제와 싸움을 하던 중이라 거란과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고려는 중국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처지가 아니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5권 P54 >

 

고려와 거란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았다. 이 때만 해도 고려는 거란이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건은 여전히 후백제와 지난한 싸움을 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고 거란도 분열되어 있던 중원 땅을 바라보고 있어 고려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중원 땅은 후진이 들어선 상태였다. 

 

거란은 후진의 황제가 새로 즉위하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는 거란이 사신을 파견하자 무도한 자들과는 거래할 수 없다 하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회동 5년(942) 6월 초하루 계축일에 후진 제왕 석중귀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사일에 도도고(徒覩古)와 소살(素撒)에서 조공하였다. 을축일에 후진 황제 석경당이 붕서하고 아들 석중귀가 제위에 올랐다. 무진일에 후진에서 사신을 보내 대행황제의 상을 알리자 7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경오일에 후진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치제하게 하였다. < 요사 권4 태종 야율덕광 >

 

〈임인〉 25년(942) 겨울 10월 거란(契丹)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보냈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지속적으로 화목하다가 갑자기 의심을 일으켜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친선관계를 맺을 이웃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교빙(交聘)을 끊고 사신 30인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어두니 모두 굶어죽었다. < 고려사 태조 25년 10월 미상(음) >

 

최광윤은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가 거란 정탐꾼에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고 만다(아버지 최언위는 고려 초기 조정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 인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큰 명망을 떨친 인물이었다). 다행히 재주를 엿본 거란인들이 그를 죽이지 않았고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최광윤은 거란이 앞으로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여진인을 통해 고려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다. 고려 조정은 947년 특수군단인 광군사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요는 후진을 병탄하였으나 한족은 후진에 이어 후주를 세워 요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조광윤이 반란을 일으켜 960년 송나라가 세워졌고 그는 탁월한 수완으로 중국 중남부를 모두 섭렵하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요를 정복하기를 기도했다. 송의 요 정복은 뒤이은 태종 대에 실현이 되었으나 요가 송을 철저히 무너트리면서 작전은 실패했다. 고려는 송과 연대하여 요의 침략을 막고자 했고, 송은 고려의 후원을 받아 요를 제압하고자 하면서 둘의 이해 관계는 맞아 떨어졌다.  

 

통화 22년(1004) 9월 기축일에 남쪽[송]을 정벌하는 일을 고려에 알렸다.

윤 9월 기미일에 남쪽[송]으로 정벌을 나갔다. 

겨울 11월 갑자일에 동경유수 소배압이 송나라 위부의 관리를 사로잡아 바쳤다. 정묘일에 남원대왕 야율선보가 아뢰기를 '송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왕계충의 활과 화살을 건네면서 은밀히 화친을 처앟였다.'고 하였다. 왕계충에게 조서를 내려 '사신을 만나 화친토록 하라.'고 하였다. 

12월 무자일에 송나라에서 이계창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면서, 태후를 숙모라 하고 해마다 은 10만 냥과 20만 필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에 화친을 허락하고, 곧바로 합문사 정진을 보내 국서를 가지고 보빙하게 하였다. 이 달에 회군하였다. < 요사 권14 성종 야율융서 >

 

거란은 고려와의 화약을 바탕으로 1004년 전투를 벌여 송을 굴복시킨다. 이 전투에 패함으로써 송은 이른바 '전연의 맹'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은 유목민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11세기가 되면, 이들은 요새화된 성읍을 점령하여 국가의 영토를 확장했다. 982년 10월 14일, 11세의 야율융서(사후 성종으로 추존)가 요의 제6대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요 제국의 유능하고 균형감 있고 공정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성종의 장기간 치세 중에서 전반기는 성종의 모후 승천태후(953~10009)가 정부와 왕조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승천태후는 심지어 송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요사는 성종의 통치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성종은 가장 성공적인 요 황제로 간주될 것이며 (그러나 그 성공은) 거의 그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 하버드 중국사 송 P57~58 >

 

전에 읽었던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나왔으나 성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데다 몸이 병약했기에 승천황태후가 그를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 송과의 전쟁에서 직접 지휘를 했다는 기록에서 장부의 모습이 엿보인다. 극은 안타깝게도 시작하자마자 1009년이라 죽음이 임박하여 누워 있는 상태로 나왔다.

 

통화 11년(993) 고려 왕 왕치(고려 성종의 이름)가 박양유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죄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여진에게서 취한 압록강 동쪽 수 백리 땅을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통화 12년(994) 3월 정사일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사로잡힌 포로와 가축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속전을 바치고 데려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인일에 사신을 보내 고려를 어루만지고 달랬다. <요사 권13 성종 야율융서 >

 

993년 요는 대대적으로 송을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후방의 고려를 먼저 복속하고자 대군을 모아 집결했다. 고려 조정은 군사 책임자로 서희를 임명하였고 거란의 상대는 소손녕이었다. 서희의 담판 외교로 고려는 압록강의 강동 6주를 개척하는 쾌거를 일군다.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었으나 회유책일 뿐이었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강조의 변 이후 현종이 즉위하고 거란의 2차 침입이 있기 전의 상황까지를 정리해보았다. 앞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관련 내용을 읽고 기록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