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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려거란전쟁

category 리뷰/책 2023. 10. 25. 17:46

기대 이상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고려사는 대부분 내부의 입장에서 쓰여져서 읽다 보면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 책은 요사, 송사, 일본사 등 주변 국가의 기록을 참고하여 거란과 송의 당시 상황과 관련 인물들을 설명해주어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지도와 그림으로 인물의 이미지, 도시의 위치와 경로의 이동 상황 등을 표현해주어 이해를 돕는다. 이미지가 정직한 2D 이미지여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귀엽게 느껴졌다. 

 

5대10국 시대를 정리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조광윤)은 북벌을 단행하는데 연운16주를 회복하여 거란을 북으로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연운16주는 거란에게 뺏길 수 없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 거란은 송나라 뿐 아니라 동쪽에서는 발해부흥세력과 여진족, 서쪽에서는 몽골 등이 압박을 하는 중이였다. 경종은 몸이 병약했다고 하며 승천황태후가 경종을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p45). 새로운 인물을 알아가는 것은 역시 재미있다. 승천황태후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그녀의 승하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기에 요사를 봐야만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승천황태후가 거란을 사실상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인 한덕양, 야율휴가, 야율사진, 소배압, 소손녕 등을 발탁했기 때문이다(p46). 

 

고려와 거란 사이에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 후에 공식 외교는 단절된 상태였다. 대신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고려의 유학생들을 송나라의 국자감에 입학시키는데 이 중 강전(~1006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강전은 송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사망했기 때문에 고려 역사에는 기록이 없고 송사에만 기록이 남아 있다(이런 인물이 많을 것 같다). 강전은 송나라 유학 전 발해부흥세력을 돕기 위해 거란으로 가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또 일단의 고려군과 함께 천 오백리 이상을 행군하여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그 길은 거란의 영토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 

 

거란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은 고려는 "전국에 군사들을 소집하라!" 하고 박양유, 서희, 최량을 보내 거란군을 막게 한다. 이때 성종도 친정을 단행했다. "지금 인근의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적을 물리치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p71). 당시 거란군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군대였는데 친정을 감행한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고려군 리더 서희는 거란군 리더 소손녕에게 화친을 제의하는데 소손녕은 먼저 항복해야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에서는 대책회의를 벌이고 대신들 간에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성종은 항복이 불가하다 생각했고 영토를 떼어주는 할지론에 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서희는 이 결정에 불복하며 "전투의 승부는 국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의 빈틈을 보아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p80)하며 영토를 언제까지나 내어줄 수는 없으며 승부를 본 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과 강화협상을 끝마친다. 

 

송 태조는 거란에 친정을 단행했다 패배한 후에도 거란에 연이어 대패하여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고려 성종은 994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거란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 고려와 거란 간에 강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전쟁이 휴전된 것일 뿐 종전은 아니었다. 양국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데 이 때 강동6주를 고려가 여진으로부터 뺏어 장악하고 성을 쌓아 방비하게 된다. 

성종이 승천황태후의 사위를 요청하자 거란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성종은 소손녕과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된다. 이후 거란은 고려 성종을 거란 황가의 일원으로 대우했고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는 아예 끊고 거란과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럼 이후 거란과의 싸움이 없었어야 하지만 성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양국은 다시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공교롭게도 성종이 사망한 다음 해 서희도 사망했다). 성종과 서희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만 둘은 굳건한 믿음 아래 서로를 믿어주는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신하였고 훌륭한 왕이었다. 

  

강조의 변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내부를 다스릴 새도 없이 거란의 침입에 맞닥뜨리게 된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공신으로 최고위직에 올라 있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거란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란군이 강조의 막사를 들이닥치자 그는 사로잡히게 된다. 

고려군 본진은 패배했으나 고려군에는 뒷배가 있었다. 통주와 곽주 사이에 완항령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에 일단의 군사들이 곽주 쪽으로 후퇴하다가 완항령에 매복한 것이다. 좌우기군들은 거란군들이 완항령에 접어들자 창과 칼 같은 단병기를 빼어들고 거란군에 돌격했다(p150). 그럼에도 거란군은 계속 진격하여 곽주, 안주, 숙주가 그들 수중에 들어가고, 거란군은 서경까지 들이닥친다. 결국 동북면에 있던 고려군 병사들이 서경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서경 방어를 책임진 여러 장수가 전사하거나 도망가자, 성안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진다(p164). 이 때 조원은 "서경이 없으면 고려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원은 비록 중하급 관료였을 뿐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이후 조원을 비롯하여 성안의 군민들은 합심하여 밀려드는 거란군을 막아낸다. 

거란군에 의해 점령당해있던 곽주에 포로들이 남아 있었다. 이 때 양규는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서, 거란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구하여 통주로 옮겼다. 그는 단 7백명의 결사대로 6천명의 군사를 막아내었는데 방어하는 성을 공격하여 군민들을 빼내고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곽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거란군 황제 야율융서는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돌아가지 않고 개경으로 남하한다. 야율융서도 정말 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허를 찔린 공격에 고려군은 대책을 세우는데 이 때 강감찬이 현종을 이렇게 설득한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때 굳이 몽진을 해야 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그들을 맞아들여서 피해를 당하기보다는 시간을 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현종은 강감찬의 말에 따랐는데 몽진길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고려 군민들의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속사정을 알 수 없는 군민들이 보기에 현종의 나주행은 피난이었고 도망길이었을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 현종은 울분을 삼키며 고스란히 감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때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식으로 벌을 주었다면 그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왕위를 순탄히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몽진길에 공주에서 김은부를 만난 것도 그에게는 운명이었다. 김은부는 현종을 극진히 대접했기에 현종은 감읍할 수 밖에 없었고 김은부의 딸들을 현종이 비로 맞아들이면서 이후 이 사이 낳은 혈통이 고려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야율융서는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를 잃고 물자의 손실을 감당했기에 고려 왕이 친조하기를 원했고 현종이 오지 않는다면 강동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는 강동6주를 포기할 수 없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강감찬은 1012년 동북면병마사로 군대를 지휘 중이었다. 감찰어사 이인택이 그를 탄핵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현종은 감찰어사를 파직하면서 강감찬을 지켰다. 만약 이 때 강감찬을 파직시켜버렸다면 이후 거란과의 싸움은 힘들었을 것이다. 1013년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다. 이때 거란군을 리드하는 이는 소배압이었다. 그는 북쪽에 있는 모든 성을 무시하고 개경을 향해 직진했다. 어느 정도 병력의 희생을 감수하고 평지인 개경에서의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자가 아닐 수 없다. 개경은 청야작전으로 들판이 모두 비워져 있었고 고려의 백성들은 궁궐 안에 피신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궁궐 안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야율호덕을 개경 통덕문에 파견해 철군하겠다고 통보한 뒤, 몰래 기병 300기를 금교역으로 진입시켰다. 김종현과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은 아직 개경에 도착하지 않았다. 개경 안의 병력은 절대 부족했다. 거란군 선봉대가 금교역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현종은 결단했다. "출격하라!"(p296).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현종은 현재의 군민으로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다행히 고려는 앞선 거란과의 전투들을 치르면서 거란군과 맞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깃발들이 순간 북쪽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갑자기 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비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름 아래, 하나의 깃발이 있었다. 구름은 마치 그 깃발 끝에 걸려서 오고 있는 듯 보였다. 깃발을 필두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군사들. 개경을 호위하러 갔던 김종현과 1만 정예군이 도착한 것이다(p306). 

 

건조한 역사서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장면이라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다. 

 

아무튼 이 순간 개경군은 얼마나 큰 안심이 되었을까. 고려는 전군을 좌우로 좁혀가며 거란군을 압박하여 승기를 잡았다. 거란군 진영이 무너지며 북쪽으로 내달리자 고려군은 그들을 공격한다. 거란군 10만은 전투에서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살아서 돌아간 인원은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고려군의 피해는 겨우 173명이 전사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에도 거란과 소소한 전투는 이어졌지만 더 이상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고려 군민의 힘이 있었지만 현종의 역할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공격한 이를 용서할 줄 아는 관대함을 지녔고 거란군에 맞서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고려를 지켜냈다. 고려 후기 대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현종을 논평했다. "현종은 무엇 하나 흠을 잡을 수 없는 분이라 할 것이다."(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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