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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category 리뷰/책 2023. 7. 17. 09:06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루쉰이 '문학가∙사상가∙혁명가'로 규정되면서 주안의 지위가 어정쩡해졌다. 루쉰은 문학혁명의 선구이자, 외치는 자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였지만, 그의 혼인이 중매결혼이었던 것이다. 루쉰 세대에게 중매결혼은 보편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루쉰이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1949년 이후 루쉰 연구가 전례 없이 중시되며 연구자들이 자료 발굴과 정리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유독 주안만큼은 배제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특히 극'좌'의 시대에 루쉰이 신단(神壇)에 오르며 우상으로 봉해지자 주안은 더욱 기피 대상이 되어 루쉰 연구의 금기(禁忌)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루쉰 전기에서 주안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 P36
 
최근 들어서야 주안의 이름은 알려졌을 뿐 그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은 잊힌 존재였다. 루쉰의 문학, 사상적 위치 때문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녀는 왜 그동안 잊힌 존재여야 했을까.
 
 
중국 다섯 개 왕조의 옛 도읍이었던 베이핑(北平)도 떠들썩해서 고관대작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 곳곳에 널려있다. 하지만 베이핑 궁먼커우(宮門口) 시쌴타오(西三條) 골목은 떠들썩한 세상의 적막한 구석이다. 이곳은 연탄을 실어 나르는 차가 오가는 푸청먼(阜成門) 성벽 부근에 있으며 인력거꾼과 장인, 빈민이 뒤섞여 사는 곳이었다. 이 시싼탸오 21호의 작은 사합원(四合院)에 한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왜소하고 얼굴이 좁고 길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전족(纏足)을 하고 있어서 걸을 때 조금씩 비틀비틀헸다. 그녀는 명목상의 남편과 각방을 썼고 하루에 거의 세 마디만 나누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부르면 '응'하고 대답하고, 자기 전에 북쪽 방 통로의 중문을 닫을지 말지 물으면 '닫아라' 또는 '닫지 말아라'로 대답했다. 간혹 생활비를 요구하면 '얼마나 필요한가?' 하고 묻고는 달라는 대로 주었다. 되도록 불필요한 말을 줄이기 위해 명목상의 남편은 갈아입을 옷을 버들고리의 뚜껑 위에 놓고 자신의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하인을 시켜 깨끗이 세탁한 후 버들고리 안에 잘 개어놓고 위에 흰 천을 덮어 자신의 침실 문 옆에 두었다. 이 여성은 바로 루쉰(魯迅)의 본처 주안(朱安)이다. - P6
 
 
주안의 주변의 사람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바느질과 자수에 능숙했으며, 예법을 잘 지켜 부모가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사랑했다." 주안 집안의 여자아이들은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규훈(조선 시대 '가훈' 같은)을 조금 읽을 뿐이었다. 1916년, 주안의 처가가 있던 사오싱에 간 쑨중산(孫中山)은 "사오싱에는 세 가지가 많다"라고 개탄했는데, 석패방(관아에서 절부와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많고 무덤이 많으며 분뇨통이 많다고 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주안이 살던 사오싱에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희생은 계속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루쉰은 친한 친구인 쉬서우창에게만 다음과 같이 침통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어머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네. 나는 그를 잘 부양할 뿐 사랑 따위는 모르는 일이네."
가문과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루쉰은 주안과 결혼했지만 그는 며칠도 되지 않아 둘째 동생 저우쭤런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고 주안은 독수공방 처지가 된다.
 
 
루쉰의 어머니인 루 부인은 그들 사이에 정이 없고 부부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왜 며느리를 탐탁치 않아 하는지 궁금해 했다. 루쉰은 "그 사람과는 대화가 안 통합니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가치를 지닌 환경에서 살아온 주안과 일본 유학을 하는 등 당시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혁과 진보를 외치던 루쉰은 맞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주안 입장에서는 외부의 잘 모르는 이야기만 하는 루쉰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을 테고 열등감은 커지지 않았을까.
 
 
루쉰은 일기에서 단 두 차례 주안을 직접 언급했는데(앞서는 1914년 11월 26일자 일기) 모두 그녀를 '부인[婦]'이라 지칭했다. '婦'의 본래 의미는 '결혼한 여자'로, '아내', '며느리' 등을 지칭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여성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婦'는 복종의 뜻을 지닌다. '婦'에도 아내라는 뜻이 있지만, '妻'가 가리키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다. 루쉰은 편지나 글에서 주안을 언급하며 '우처[賤內](천한 안사람)', '안사람[內子]', '부인[太太]', '큰마님[大太太]' 등의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제3자에게 주안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자조적인 말투였다. - P185
 
 
루쉰은 초기 소설에 '신여성'에 대해 별로 쓰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이런 부류의 여성과 교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베이징은 신문화의 발원지로서 수많은 지식인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중에는 각지에서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온 여학생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5∙4신문화 운동 초기보다 '자유연애', 남녀의 사교에 대한 사회적 포용이 더 커졌다. 이때의 루쉰은 더 많은 여성과 접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루쉰이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의 강사를 맡은 후에는 여학생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녀들은 주안과는 사뭇 다른 신여성들이었다. 이 중 루쉰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게" 한 여성은 쉬광핑이었다. 그는 1926년 8월 26일 베이징을 그렇게 떠나 쉬광핑과 동거를 시작했다.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쉬광핑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남녀가 함께 살면서 당사자 외에는 그 어떤 부분도 구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의기투합해서 동지처럼 대하며, 서로 친밀하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를 신뢰한다면 어떤 상투적인 격식도 필요 없다. 우리는 일체의 봉건 예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 자신은 항상 자립해서 먹고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함께 살 필요가 없어진다면 곧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주안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아파했고 주변 사람이 그녀에게 앞으로 어떡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그분 뜻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좋아질 날이 올 줄 알았단다. 나는 담장 밑에서 조금씩 조금씩 위로 기어 오르는 달팽이처럼, 느리긴 해도 언젠가는 담장 위로 오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구나. 더 이상 기어오를 힘이 없어." - P233
 
 
루쉰은 상하이에서 쉬광핑과 10여년 간 동거한 끝에 1936년 10월 19일 사망한다. 루쉰의 장례식은 상하이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사망 당일 오후 만국(萬國)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어 빈소가 마련되었다. 각계 인사들이 루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으며, 22일 오후 수천수만 명으로 구성된 장례 행렬이 그의 영구가 만국공묘로 운구되어 천천히 매장되는 것을 목송했다. 베이핑 집에도 20일부터 빈소를 마련해 조문 온 친지와 친구들을 맞이했다. 주안은 소복을 입고 향을 피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추모했다. - P269
 
 
루쉰이 세상을 떠난 후 쉬광핑은 루쉰 전집의 출판과 편집에 전력을 다하여 그의 작품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루쉰 전집을 출판하기 위한 저작권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부탁했고 루 부인은 동의했다. 주안은 쉬광핑이 저작권 수입의 일부를 부쳐 자신의 생계를 부양하는 것에 고마워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그녀를 찾아 상의하는 등 가족으로 여겼던 것 같다. 쉬광핑도 전쟁 막바지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모든 사람의 형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방법을 강구해 생활비를 부쳐 그녀의 생활을 보장했다. 두 여성은 다른 삶을 살았으나 루쉰에 대한 애정만큼은 공통적이었다.
 
 
1947년 6월 29일 주안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유언으로 남편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시즈먼 밖의 보복사에 임시 묘소에 묻혔다. 쉬광핑은 "노부인의 묘소 옆에 땅을 사서" 그녀를 루쉰의 어머니와 함께 반징촌에 있는 묘지에 매장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 곁에도, 시어머니 곁에도 묻히지 못한 그녀의 묘는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의 '사구(四舊)'(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타파 운동 때 훼손되었다. 죽어서도 이런 취급을 받다니 참 너무한다 싶다.
 
 
주안은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우 선생은 나한테 결코 나빴다고 할 수 없어요. 서로 다투지도 않았고 각자의 삶을 살았을 뿐이죠. 저는 선생을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쉬광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쉬 선생은 제게 정말 잘해주었어요. 제 생각을 이해하고, 저를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부쳐주었죠. 그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주안이 루쉰과 차라리 붙들고 싸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둘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억지로 맺어진 연인지 모르겠다. 집안의 명에 따라 결혼을 한 주안은 평생을 시부모를 봉양하며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루쉰은 형식적으로만 그녀를 대했을 뿐 애당초 그를 부인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그녀의 운명에 가슴이 쓰라린다. 이런 여성들이 당시에 얼마나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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