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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category 리뷰/책 2023. 7. 10. 11:24
6년 전 이 책을 봤다는 것을 북플의 기록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읽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뒷부분인 송나라 역사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용 무협 소설 읽는다고 배경이 되는 역사를 훓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덕분에 지금까지도 당시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고 읽은 책은 기억에 남는 법인가보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권은 우리에게 익숙한 수, 당, 그리고 짧은 분열기였던 오대십국, 북송 시기까지를 다룬다.
 
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 왕조가 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 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 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 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건의 난부터 시작된 중국의 분열기를 넘어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수나라 왕조였다. 수나라 시조인 문제는 북주의 중신인 양견이었다. 북주는 선비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였으나 수나라는 한족 왕조임을 내세웠다. 수나라는 지방 행정기구를 정리하여 기존의 주군현 제도에서 군을 폐지하고 주와 현으로만 구성하는 대신, 지방관이 임명하던 지방 속리를 중앙 임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햇수로 38년(581~618)밖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후계자 문제, 고구려 원정, 수도 건설과 무리한 대운하 사업, 2대 황제인 양제의 사치 때문이었다.
당나라 고조인 이연은 그다지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결단력도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뒤이은 태종이 형인 이건성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컸을 것이다. 거병했을 때 이연은 태원 유수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을 반란군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수나라 말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도적떼들이 황제나 천자를 자칭하며 일어났으나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은 고조였다. 태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책사인 위징은 이밀의 부하였는데 이밀은 수나라 말기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과 더불어 경쟁했던 상대였다. 게다가 위징은 황태자로 장자인 이건성을 밀었는데도 태종은 그를 국사로 임명한다.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안녹산은 재치 있고 붙임성이 좋았던 모양이다. 현종과 양귀비 모두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안녹산은 거란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양귀비의 일가라는 사실만으로 출세한) 양국충과 손잡고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임보 배척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임보가 죽자 안녹산과 양국충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양국충은 수도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반면 안녹산은 외지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 간했고 불리함을 느낀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다. 그 때 안녹산은 3군 절도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이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 이듬해 마침내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현종은 이 때 촉으로 피신을 갔고 왕위를 이어받은 숙종은 위구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의 구원병을 모아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겨우 수복했다.
당은 시 문학이 활발했다. 이백, 두보, 왕유, 백거이 등 지금도 당시(唐詩)의 대명사가 된 이들이 이 시기 차례로 등장했다. 성당시는 당의 국력이 번성했을 때의 시를 말한다. 이백은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성당시인이었다. 그는 당의 국력이 약해질 무렵 죽었고 당 말기가 되면 혼란스러운 사회가 된 만큼 사회성이 강한 풍조를 담은 두보나 백거이 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 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 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할 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 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 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송나라는 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켰고 과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당나라 때도 과거 제도를 활용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소수였다. 과거제는 진사과와 제과로 나뉘었는데 진사과는 시문을 짓거나 논술을 하거나 고전을 일부 발췌하여 적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면 제과는 문장을 베끼는 종류의 시험이었다. 진사과는 주로 고급 관리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제과는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주로 차지했다. 강남 지방은 예로부터 문인의 기풍이 높았고 화북 지방은 무인 기질이 넘쳤다(남북조 시기까지 거슬러 감). 송나라 초기에는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당나라 말기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기가 되면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는 과거제와도 연결되어서 진사과에 지원한 이들이 강남 지방의 문사들로 채워졌다. 화북 관료와 강남 관료 간의 경쟁은 북송 시기 내내 화북과 강남 인력 사이에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 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 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 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P304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신법 실시가 아니라 그것의 폐지와 부활이라는 변동, 즉 당쟁이었다. 역대 중국의 역사가는 북송의 쇠망을 신법 탓으로 돌리는 자가 많아 왕안석은 악역으로 몰려 버렸다. 개혁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왕안석의 집정은 겨우 6년이었다. 시간을 두고 일관되게 실시해야 효과가 나타나는데도, 정국은 긴 안목으로 지켜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신법은 높은 이상을 내걸었으나, 새로운 정책을 실시할 때 일어나는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구법의 의식적인 방해도 있었지만 말단 정책을 이해하지 못한 혼란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역사가처럼 모든 죄를 왕안석과 신법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 P489
 
송나라는 대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관료사회였던 송은 갈수록 국가 방비에는 허술해진다. 내부적으로도 주전파보다는 주화파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요와 강화 조약을 맺고 대하(중국에서는 서하라고 부름)와도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였으나 그만큼 국방에 투자하지 않았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송나라는 세력이 커진 금에게 결국 수도를 뺏기고 남으로 내려가야했다. 이때까지가 북송 왕조다.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 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 송은 형, 요는 동생의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2~46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 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 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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