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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국전쟁의 기원 2-2

category 리뷰/책 2023. 6. 27. 14:07
이런 불안한 시기에는 늘 그렇듯 대립과 음모의 흔적이 없는 주말은 없었다. 전형적인 여름 날씨와는 대조적인 기사, 그러니까 "(미)군 전투부대는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선항으로 얼마나 빨리 이동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있었으며 그 검증은 7월 1일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기사가 묻혀 있는 것을 주의 깊은 독자만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일본에 있는 미군 전투부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검증을 위해)경계 태세에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 가능성이 컸지만, 중국이 타이완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측과 관련된 것이었다. 6월에 세계에 배치된 미군 병력은59만1000명이었다. 거기에는 미국 국내의 10개 전투 사단 36만 명과 가장큰 규모의 해외 파견부대인 주일미군 10만8500명이 포함됐다(독일에는 8만명이 파병됐다. 일본에는 4개 사단-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갑사단이 주둔했다. - P243
 
한국전쟁 발발 한 해 전 1949년 6월 무렵 38도선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는 한국전쟁의 개전 초 작전과 복사판이었으며, 시간만 다를 뿐이지 특징은 같았다. 1949년 북한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덜 되어 있었지만 1950년은 그렇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1949년 전투는 남한 정부가 주도적으로 일으켰는데 이는 한국 정부 지도층의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며 자신들의 이익과 영토를 지켜주길 원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과 애치슨은 타이완 문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로서는" 타이완 방위 계획은 없다 밝혔다. 흔히 애치슨 라인은 남한이 범위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으로 오해되어 스탈린이나 김일성에게 청신호를 켜주고 한반도를 분열로 몰고 간 외부적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본은 방어되며, 위협받는 그 밖의 국가(한국 같은)는 공격받을 경우 처음에는 스스로 방어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상황은 다시 평가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었다(P70). 애치슨의 방위선은 정치와 경제적으로 "거대한 초승달 지대"를 만들어 일본부터 인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확보해 발전시키려는 구상이었다. 평양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믿었고 애치슨의 이런 의도는 북한 정권의 동요였다고 판단했다.
 
6월 7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북 정치 지도자들의 회담을 촉구하는 발표를 하면서 6월 19일 38도선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으며, 8월 초 한반도 전체에서 선거를 실시해 평화통일을 이루고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새로운 통일 국회를 소집하자고 요구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남한의 무소속 의원들에게 특별성명을 발표해 호소하면서 여운형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조선 민족의 애국자"라고 불렀고, 김구가 암살된 것을 애도했으며 김규식의 통일 노력을 칭송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의 복구를 요구했다. 무초는 북한이 이런 요구와 관련된 선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말하면서, 그 주장은 "겉으로 보기에 합리적이며 "아직도 38도선의 철폐를 갈망하는 남한 여론 대부분과 국회의 "혼란스러운 자유주의 세력"에게는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방의회가 구성될 가능성은 없겠지만, 한국 전역에서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는 "전면적 내전의 전초단계"가 될 수도 있다고 무초는 지적했다. - P160~161
 
북한은 6월 19일 남북 의원의 회의를 개최하고 8월 15일까지 남한 국회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에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이는 선전 책략이자 공격을 은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5월 30일 총선 결과 이승만 세력이 아닌 중도파와 온건 좌익이 승리했기 때문에 북한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조만식과 남로당 지도자인 김삼룡,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도 내건다. 하지만 교환 방식에 합의를 찾지 못했고 6월 23일 북한은 6월 26일 정오에 교환하자고 제안했다(교묘하다). 이건 대놓고 전쟁 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준비를 착실히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장제스가 직면한 난제는 타이완섬을 지키려는 국제협력주의자들과 총통을 옹호하는 반격론자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공군력은 나라를 구할수 있는 만능의 수단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국민당은 중국 본토의 연안 도시들을 폭격하고 남한에 공군기지를 확보해 만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미국 정치를 조종해 자신의 정권을 보호할 수 있는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 미 해군은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 P190
 
타이완은 설탕, 바나나, 원자재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기계와 기관차, 옷감 등을 수입하며 1948년 무렵부터는 미국의 태평양 영해에서 전략적 가치이자 경제적 효용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1950년 초 장제스는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하이난섬은 4월 셋째 주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워싱턴은 지원을 끊으면서 국민당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장제스는 쿠데타/암살 위기에 직면하고 필리핀과 한국에 망명을 신청하기까지 한다. 미국은 중국 정책이 위기에 빠졌다 판단했고 6월 초 타이완 문제는 유엔 위원회로 넘어간다. 하지만 6월 22일 무렵 맥아더는 타이완이 연합국에 갖는 가치가 크기 때문에 장제스의 권한은 유지시키고 타이완은 유지되어야 한다 주장한다. 러스크 장관은 장제스에 대한 쿠데타 계획을 애치슨에게 제안했고 트루먼에게 그 사안은 상신되었다. 트루먼이 결정하기 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 정권은 한국 전쟁으로 존속될 수 있었다.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저자는 세 가지 모자이크를 제시한다. 세 가지 모두 음모론(또는 가설?)이며 소련과 북한이 침공을 은밀히 준비했다는 설, 남한이 이유 없이 기습했다는 설, 남한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을 이야기한다.
 
널리 제기되는 주장 가운데 하나는 북한이 지도부의 파벌 다툼 때문에 침공했다는 것이다. 박헌영과 그 세력은 남한에 있는 자신들의 기반을 잃을까 우려했고 전면 공격을 일으키면 대중이 호응해 봉기해 공산주의의 승리를 신속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런 가설은 CIA, 김일성 지도부, 일본에서 작성된 한국 관련 자료 그리고 미국의 중요한 일부 학자가 동의한 특이한 사례다. 그 가설의 장점은 6월이라는 시점에 공격이 시작된 까닭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에 있던 유격대가 1950년 봄에 정말 소멸되고 거기에 토지문제가 더해졌다고 가정하면, 그 가설은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 - P116
 
또 다른 학설은 북한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하기 전에 통일을 추구하려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지금 독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묘한 시점이라는 요소가 있다. 몇 년 동안 북한은 이승만이 "북침해 한반도를 강제로 통일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1945~1946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요구와 1948년 5월 총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분단주의가 아니라 북침의 기반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언제나 해석했다.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1950년 5월에 처음으로 북한 문서는 이승만이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 이후 상투적 표현으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전쟁 이전 북한의 표현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앞의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어떻게 남한이 한반도의 항구적 분단을 바라는 동시에 북한을 공격하려고 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 P120
 
6월 25일 이른 아침 전쟁이 서부에서 동부로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첫 번째 모자이크, 다시 말해 잠들어 있고 준비를 갖추지 못한 남한을 38도선 전역에 걸쳐 갑자기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조지프 대리고는 전투가 시작됐을 때 38도선에 있었던 유일한 미군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포성에 잠을 깼다. 초기 전투에 관한 그 밖의정보는 모두 한국군 정보원에서 나왔으며, 1949년 여름에 얻은 증거가 보여주듯, 그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전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에 걸쳐 번져나갔으며, 한국군 제6사단은 적어도 하루 정도 먼저 경고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문산·춘천이나 동해안에서 그리 좋은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남한 부대들이 저항으로 보기 어려운 반격을 하거나 싸움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군은 개성과 의정부를 돌파할 수 있었다. 북한이 투입한 병력도 군사전략 측면에서 보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존미어 샤이머는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 저작에서 전격전술을 사용할 때 "전략적 돌파"를 성공시키려면 공격 측의 병력이 3대 1 정도 우세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6월 25일 이후의 전투 과정은 고전적 전격작전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투 데이터의 순서를 따라가보고 증거들에 살펴보더라도 이는 비슷한 규모이거나 더 큰 규모의 적을 상대로 진행된 전격전이었다. - P296~297
 
국내와 국외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던 이승만과 장제스는 봉쇄를 먼저 실시한 뒤 반격을 추진하기를 바란 반면, 애치슨은 한국과 타이완을 모두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장제스를 축출하려고 했으며 봉쇄 지역 주변에서 공산 세력이 먼저 공격하기를 바랐다. 당시의 모든 상황은 이처럼 긴장되고흥미로웠다. 1950년 여름 헨리 월리스는 딘 애치슨에게 분노가 담긴 서한을 보내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애치슨은 격렬히 반대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무의식적 실언 가운데 하나가 담겨 있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라면 거기에 아무 의문을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도발을 받기는 했지만 경고도 정당한 이유도 없이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증거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이 먼저 공격했음을 여전히 입증하지 못한다.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면 다음 두 사항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첫째,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그런 도발을 이용해 남한을침략할 태세를 갖췄다는 명백한 증거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북한의침공을 정당화해주는 한국적 맥락일 뿐이다. 둘째, 정말 남한이 38도선을넘어 공격했다면, 1년 전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것을 감안할 때 도발은북한에 동조하는 내부의 적이 일으킨 자작극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침공은 북한이 일으킨 것이 된다. - P320
 
북한이 명분 없는 공격을 시작했다는 판단은 한반도가 놓인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바로 2년 전 38도선을 "국제적 경계선으로 만드는 데 유엔이 이용됐다(이승만을 포함한 어떤 한국인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5년 전 미국은 고대부터 이어진 통일국가를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소련의 큰 도움을 받아)때 이른 "냉전"을 심화했으며, 반동·친일 세력을 후원해 한국인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국무부의 정책에도 역행하면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일이 모두 이뤄지면서 한국인들이 한국을 침공하는 최악의 역설이 가능하게 됐다. 진실은 남한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는도발이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 P341
 
저자는 세 모자이크 중 두 번째 모자이크의 가능성이 그나마 높다고 이야기한다. 2권 첫번째에서도 의견을 냈지만 어느 것도 100% 증명할 수 있는 설은 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 6월 시작된 전쟁은 1953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스탈린이 더 이후에 죽었다면 미소 지도부의 교체가 늦어져 전쟁이 더 길어졌을지 모르겠다. 한반도의 내전은 군인들 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의 사상이 잇따르고 주요 기반 시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분단 체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다.
 
이 책은 미국과 북한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그 부분은 세밀한 반면 중국, 특히 소련에 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많이 약하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입장은 빈 공간이 많은데 소련의 기밀 문서는 나중에 해제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이조차 여전히 기밀 자료들이 있을 것으로 판단).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한국 전쟁 책들로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내부적 입장을 이만큼 잘 다룬 책은 드물 것이다. 궁금한 독자들은 일독을 권한다.
 
『타임』지는 소련이 "미국의 시간"을 잘못 계산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36시간 동안 ‘침묵‘했던 것이었다. "미국의 행동을 예측했다면 소련은 말리크를 유엔으로 보내 미국이 주도한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소련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였다. 달리 말하면 스탈린은 은밀히 침공을 계획했고, 물질적으로 소련을 능가하는 초강대국과 세계 전쟁을 벌일 위험을 각오했으며, 전략과 전술 모두 차례로 큰 실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는 소련의 전략에서 남한이 지닌 가치와 전쟁이 일본과 서방의 재무장에 줄 영향  그리고 미국의 참전 의지를 잘못 판단한 것이다. 그는 시간조차 잘못 계산했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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