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물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타파를 외치고 민족개조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타파하면 땅을 찾고 수천 년 내려온 조선의 문화를 길바닥에 내다 버려야 땅을 찾고,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빨고 우동 사 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나 하마키를 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 버리는 족속 때문에, 그들 때문에 조선민족은 말살될지 모른다. 남부여대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 바가지 들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지게 지고 그리운 님 기다리듯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신세는 마을 큰 나무에 돌 얹고 절한 때문인가 성황당에 제물 바친 때문인가 용왕을 모시고 터줏대감을 모신 때문인가, 그것을 총독부, 동척 아닌 어느 곳에 가서 물어볼꼬. - P16
목욕탕 냄새를 기억한다. 그 물 냄새를 기억한다. 목욕탕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는데 과거의 유산이 현재까지 이어진 셈이다. 찜질방이 생기고 코로나19, 공공요금 인상 등으로 목욕탕의 수가 급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발소 간판도 기억난다. 그 회전하며 돌아가던 빨간색과 파란색이 교차되던 간판, 그 시절 남자들의 아지트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전통 문화는 낡은 대상, 타파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며 많은 것들이 이후 사라졌다. 취사 선택한 전통을 보수하여 지금까지 지켜냈다면 전통과 현대의 급격한 단절로 겪는 고통을 덜하게 겪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너무나 급격한 변화로 잃어버리게 된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움이 생긴다.
토지 4부 1권인 13권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20여년이 지난 1930년대 즈음의 조선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조선의 소도시나 읍면 도시는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양과점, 담배 가게, 이발소, 목욕탕 등으로 채워지며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 터의 주인이었던 조선인들은 일본 자본으로 잠식되어 가는 조선의 모습을 보며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더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한편으론 먹고 살려면 거기에 애써 적응해야 했기도 했을 것이다. 적응하지 못한 이들, 당장 오늘을 살아야 하는 뜨내기와 유랑민들은 거리를 떠돌 수 밖에 없다. 농촌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 소유권을 침탈당하고 지주와 마름은 자신들의 배를 불렸으며 소작인들은 소작할 땅이 없어 화전민으로 산천을 떠돈다.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 위계 질서는 공고해졌다. 차별과 억압 속에 조선인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일본인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수없이 많아졌다. 반면 일본인들은 안하무인,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당하지 않으려면 친일파가 되어야 출세할 길이 열리는 씁쓸한 현실이었다.
강쇠는 활동사진관 앞에서 외국인에게 눈이 팔린 사이에 술통을 싣고 가던 일본인 상인에게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잘못은 일본인 상인이 했는데 결국 파출소로 가게 되었으나 조선인 순사는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다. 조선인들의 피해는 이렇게 일상 속에서 수도 없이 벌어졌을 듯하다.
13권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중점적 사건으로 다룬다. 이 무렵이 되면 1920년대 이후 등장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과 학생들로 독립 운동 주체가 변화한다. 노동자들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 운동,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교육 차별에 따른 학생 운동이 활발해진 것이다.
노동자 운동이 증가한 것은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의 영향이 크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했고 이에 노동자들의 상황은 열악해질 수 밖에 없었기에 파업은 자연 수순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원산만 파업이다. 1929년 1월 원산의 한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파업이 벌어졌다. 조선총독부와 자본가들의 탄압에도 3천명의 단합한 원산 지역 노동자들이 4월까지 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 때 노동자들은 감독 파면, 최저임금제 및 해고수당제 실시 등을 요구하였다. 일본과 중국, 프랑스, 소련 등의 노동단체도 격려, 후원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총독부의 핵심 간부 구속, 무력 진압 진행으로 실패로 끝이 난다.
"원산 일이 있고부터는 경찰 놈들 지랄발광하는 바람에 고무공장, 방직공장 아이들이 얼어부맀다.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겉지만 서로를 못 믿는기라. 부두에서 몇 명 풀어넣기는 했다마는, 조심스럽고 신실한 사람들이라 걱정은 안 하는데 그래도 살얼음 밟는 것 같다." - P35
1911년 제2차 조선교육령의 발표 이후 초등교육은 일본인은 소학교, 한국인은 보통학교, 중등교육은 일본인은 중학교, 여자중학교, 한국인은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로 나뉘게 되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수업 연한 차이를 없애고 한국인이 다니는 보통학교와 교원 수를 늘렸는데 보통학교의 입학 정원이 제한된 가운데 지원자가 늘어 경쟁이 심해졌다. 총독부나 지방 관립 혹은 공립 중등학교 중 한국인이 진학할 수 있는 학교는 얼마 되지 않았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사립 고등보통학교 허가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0년 인구 만 명당 중등학생 수를 확인해보면 일본인은 373명인데 반해 조선인은 15명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1920년대부터 전국 각처 수없이 많은 학교에서 항일운동이 계속되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표면상으로 일인 교사 혹은 일인 교장의 배척, 식민 노예교육인 차별제도 철폐 등을 내세운 맹휴였으나 그것은 물론 항일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비밀조직이 있어 학생들을 지도한 것도 사실이다. 전국 각처 학교에 불을 지른 11.3 사건 역시 우발적인 단순한 사건을 아니었다. 11월 3일, 12일 민족차별 철폐와 식민지교육 반대를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신간회 본부 등은 진상조사단을 꾸려 광주에 파견하고 12월 9일 서울에서도 시위가 열리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서희의 둘째 아들 윤국은 이 학생 사건에 가담하여 유치장에 갇혔다 풀려나지만 서희는 걱정하고 환국은 동생을 '근간과 지엽을 모르는 이'로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윤국은 현실을 외면하는 환국이 답답할 뿐이다. 자신은 이제 어리지 않는데 어머니나 형이 모두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데서 받는 설움이 폭발한다. 당시 학생들의 마음이 윤국이 같았을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는 고국의 현실을. 하지만 2달 후면 졸업인 윤국이의 선배 홍수관처럼 유치장에 갇혀 까딱하면 퇴학 처리되어 그 때까지 공부한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날아가버릴지도 모르는 현실도 있었다.
"당신네 일본은 일로전쟁 당시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국력으로 볼 때 분명히 영국은 형의 나라였을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는 그 강대국에서 대가의 약속을 받고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땅도 러시아의 땅도 아닌 우리 땅이 제물로 넘어갔습니다. 과거 우리 조선도 오랑캐로 모멸했던 청나라와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명나라와의 우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분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대가도 지원도 없는 외로운 싸움, 만일에 지금 말하듯 속국이거나 식민지였었다면, 누가, 하라 하지도 않았던 전쟁을 왜 합니까. 억압해온 힘에서 벗어난 기쁨 때문에 만세를 불렀음 불렀지, 검을 싫어하기에 뺀 검이었고 야만을 싫어하는 검. 침략을 싫어하는 검, 그래도 조선이 미개국입니까?" - P123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었고 연도 연줄이 있어야 창공을 날지 연줄이 끊어지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지붕 위에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고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나이가 어려, 목적은 크고 뚜렷하다 하더라도 방법은 캄캄절벽 아니겠느냐, 방법이란 분별이며 분별은 나이와 더불어 정교해진다, 어떤 사람은, 자리를 잃으면 아무일도 못한다, 소년은 본시 있던 그 자리에서 일하라, 호구를 위한 일자리를 구한다든지 고학을 해보겠다면 별문제겠으나 학생운동도 학교를 잃고는 못해, 학교가 바로 현장이다. 노동자는 공장이 현장이듯 농민은 농토가, 룸펜은 도시 뒷골목이, 또어떤 사람은, 덤빈다는 것은 나를 망치고 동지를 망친다고 했다. 또아리를 틀어 지금은 도사릴 때라고도 했다. 다 옳은 말이었다. 앞뒤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국은 너무 옳기 때문에 너무 앞뒤가 맞기 때문에 석연치 않았다. 옳은 만큼 앞뒤가 맞는 만큼 그런 만큼 지혜롭고 순수할까 싶었다. - P259
나폴레옹은 불가능이라는 글자를 사전에서 빼버리라 했다. 나는 나폴레옹 같은 것 존경 안 해. 그러나 저 높은 하늘과 광활한 대지에 내가 서 있고, 나는 어디든 걸을 수 있다. 나는 불가능을 향해 걸을 수 있다! 불가능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은 목표가 된다. 따뜻한 밥, 따뜻한 옷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매달리어 노예가 된다! 부자일수록 더욱 더 노예가 된다! 내가 나에게 노예 되기를 거부해야만 남도 해방시킬 수 있고 내 나라도 찾을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은 뭔가 모르지만 훌륭한 말들은 하고 있지만 어째서 거미줄에 묶인 사람같이 보였을까. 나는 수관형이나 숙이를 보았을 때만큼 감동하지 않았다. 방법, 방법, 방법이라 했다. 자리, 자리, 자리라고도 했다. 나는 그것을 많이 생각해보아야 해.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 P260
명희는 귀족인 조용하와 결혼한 이후 영혼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조용하의 동생 조찬하는 명희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일본 여자와 결혼을 했고 남편 조용하는 성악가 홍성숙과 바람을 피웠지만 명희는 그마저도 질투의 감정마저 느끼지 못했다. 그 시절 동경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여성이었으나 가부장제는 공고했고 결혼이란 제도에 이끌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패잔병들의 은신처가 결혼이라는 거지 뭐. 여자가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요원해. 뭐 나야 별 재간도 없었던 여자지만 말이야. 결혼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혼자서는 견디어 배기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될 게야. 배운 여자가 하면 그건 언제나 질책이었고 어떤 때는 숫제 화냥년 취급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배운 여자가 나가야 할 문은 한 군데도 열려 있지 않으면서, 철저하지 철저해, 조선 사람들 보수적인 것." - P160
조용하는 명희에 대한 조찬하의 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함정을 여러 번 파기도 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함정을 판다. 임명희의 오빠 임명빈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이혼을 선포한 것이다. "이유는, 내 동생과 임명빈 누이동생 두 사람한테 물어야 할 겁니다."
조찬하는 "이제부터 불륜에 빠질 겁니다. 형은 이혼을 선언했습니다. 저는 이제 당당하게, 현재 처와 이혼하고 임명희 씨를 아내로 맞겠소."하고 말한다. 조용하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것이다. 본인은 명희와 이혼할 생각이 결코 없었으니 말이다.
그 이후 조용하는 복수를 다짐하고 그 대상을 명희로 삼는다. 불평등, 여기서도 철저한 불평등을 발견한다. 남녀의 불평등, 위계의 불평등, 힘과 권력의 불평등. 동생과의 싸움에서 진 것은 자신이었는데 왜 명희는 걸고 넘어지는가. 자신보다 힘이 약한 대상, 귀족인 자신과 역관의 딸인 명희, 그런 명희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으니 괘씸했던 것이겠지. 당연히 엎드려야 할 존재가 고개를 빳빳이 든 모양에 열이 받은 것이겠으나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고 못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지금도 이런 허접 쓰레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다행인 것은 명희 스스로가 이 긴 암흑의 터널에서 비로소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절실하게 해본 것이 없었음을 인지한 것이다. 창조할 능력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신은 그런 사랑이 없었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이제 명희는 새로 태어났다.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도끼로 깨부술 힘을 스스로 갖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훈장질도 했고 결혼생활도 했고 그러나 그것은 하고 안 하고 한계 지을 수 없는 멀미였을 뿐이었지. 난 사실 말을 하면서도 지금 나를 명확하게 느낄 수 없고 앞이나 뒤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창조의 능력이 없다,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거야. 의식하건 안 하건 생활 그 자체는 창조여야 하지 않을까?"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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