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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category 리뷰/책 2022. 11. 14. 09:45
경성제대는 학문의 전당을  표방하면서 제국과 식민이 중첩된 공간 위에 서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국책(國策)과 학문 사이의 균열'이라는 모순된 운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이런 균열의 간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메울 것이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 P18~19
 
그동안 대한민국 사학계를 지배해온 식민사관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제기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총서 지난 시리즈 5권에서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 편찬을 위해 자료 수집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그들의 논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조작 및 왜곡을 얼마나 서슴없이 자행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여다본 바 있었다.
하지만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관점에 입각한 연구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그로 인해 진실과 거짓의 중간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수많은 일본인의 조선 연구가 충분한 고려 없이 더 교묘한 왜곡으로 미리 단정되기 일쑤였으며, 모호함 그 자체에 주목할 여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P9). 저자는 이런 기존의 한계를 넘어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을 검토하고자 했다. 경성제국대학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적 지향이 관철되는 공간인 동시에 학술적 연구가 허용된 제도적 공간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독특한 위치를 점한 공간으로 선택되었다.
 
이 책은 경성제대 초대 총장과 법문학부 일본인 학자 5인을 기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식민지 조선 연구의 흐름을 살펴본다.
 
국책과 학문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으로 경성제대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조선 연구, "동양 문화의 권위"라는 지향을 내세웠다. 이 관점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연구만으로는 안 되고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이 주도한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까지 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방향성을 위해 조선총독부와 날을 세우면서 자신의 입김에 맞게 대학의 인력을 구성했다.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2강좌' 초대 주임교수였던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는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교과서 편찬과 각종 고적조사사업을 주관한 식민지 관료로 출발하였으나 1923년 조선사학회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사학회는 식민사학의 제도화라는 흐름에서 보면 과도기적 성격이 강했다. 의욕적으로 출발한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전문 연구자를 본토에서 촉탁으로 끌어오는 것으로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는 무리였기에 경성제대 설립이 추진되었다. 또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도 기존의 조선 연구의 전환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조선사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사강좌』 발행을 주도하고 경성제대 창설 작업에 참여하며 대학 예과의 형태와 대학 학부의 구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식민주의 역사학은 식민지 조선에서 제도화되었으며, 경성제대는 이런 식민주의 역사학의 제도적 중심으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P89).
 
경성제대의 조선사학 제1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인 이마니시 류는 당시 일본 학계에서 조선사 연구를 대표했던 인물로, 조선 고서적을 광범하게 수집했던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오다 쇼고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선사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오다 쇼고는 식민지 관료 출신으로, 조선사학이라는 학문 영역의 제도적 정착에 지원을 한 인물인 반면, 이마니시 류는 일본 제국대학 아카데미즘에서 '조선사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최초의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조선사학'에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마니시는 조선 고대사를 중국 제국주의로의 종속의 역사로 보았다. 그는 한반도 속의 중국이었던 한사군과 낙랑군을 조선 민족의 종속화의 사례로 보았다. 그는 고대 중국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속성을 읽어내면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중국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제국의 가능성을 조선 고대사, 고대 한일관계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조선 민족의 종속을 '중국화'에서 찾고 조선이 일제의 일부분이 되었고 이것이 영원하려면 중국화를 걷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인에게 '지나화'를 벗겨내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곧바로 강제로 '지나화'를 벗기는 폭력적 행위를 유발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는 동양학자들 그룹이 있었다. '지나철학 강좌', '지나어학 · 지나문학 강좌', '동양사학 강좌' 등의 강좌를 기본으로 삼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인들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나철학 강좌'의 초대 주임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와 1941년 '지나철학 강좌' 후임을 맡은 아베 요시오가 있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교수 부임 이전 일본에서 중국 고전 경전에 대한 권위자였다. 그는 고증학을 중심으로 하는 청대 중국의 학술문화가 어떻게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 주변 세계로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청대 중국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조선의 지식인들(홍대용, 박제가, 김정희)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의 고증학은 청조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인이 있었음에도 그들 개인의 업적에 그친 반면 일본의 고증학은 서구의 근대 학문과 연계하며 발전해 나갔다고 주장했다. 아베 요시오는 퇴계 이황과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적 혈연 관계를 통해 퇴계 사상의 흐름은 조선에서 제국대학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일본의 도학파에게 전해져 황도 철학으로 만개했다고 보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국제공법 강좌'와 '외교사 강좌'를 맡은 '이즈미 아키라(1873~1943)가 있었다. 그는 경성제대 부임 전 국제주의를 준거로 강제적 동화주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고 비동화주의 식민정책을 주장하였다. 타이완 현지 지식인들이 그의 이론을 수용하고 적극 호응하며 1920년대 '타이완의회설립 청원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식민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이주와 식민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식민은 "생애거주"의 목적, "집단적", "가족과 더불어", "본국은 아닌", "무소속의 토지나 자국의 영토"일 때만이고 그 이외는 이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점진적 진화론에 가까웠고 이상적인 방향이었으나 현실의 식민정책과는 때문에 타협이 어려웠다. 그는 일본 식민정책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반대를 주장한 이였지만 민족자결은 혁명의 자유나 식민지 독립운동과 어떤 관련도 없다고 주장하는 등 한계를 보였다. 1927년 경성제대 부임된 이후 그는 퇴임 때까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기존의 식민정책학자로서의 활동은 일체 하지 않았다. 1928년 《외교시보》에 발표한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논문에서 비동화주의와 조선의 여러 분야의 문제를 분석한 내용이 문제가 된 것이 발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으로 이즈미 사상에 문제를 삼아 교수 해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아무리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가 학문적 자율성과 과학적 엄밀성, 그리고 제국적 보편성을 지향한다고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그 배후에 식민지배의 폭력적 현실이 최종심급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조선 연구를 설명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자 핵심적인 배경이다. - P243
 
1930년대 만주 사변 후 경성제대의 조선 연구는 '지나'에서 '대륙(만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31년 경성제대 제4대 총장으로 온 야마다는 사명을 변경하며 조선은 '만몽 개발'의 적임자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연구'라는 용어 대신 '개발'이라는 용어를 쓰고 '지나'는 '만몽'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경성제대는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으로 발돋움하였으며, 개별적인 전문 연구활동 대신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조선 연구는 경성제대에 의해서 비로소 제도화된 분과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고, 분과학문이 된 조선 연구가 체계적으로 양성해낸 인력들이 통치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 참여하여 식민권력에 이바지한다. 매번 전문가를 촉탁이라는 형태로 일본 본토에서 초빙해 학술 조사를 수행해야 했던 조선총독부의 처지에서도 경성제대의 설립은 인력 수급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했다. - P241
 
다만 이들은 여러 조선 연구 중에서 극히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고, 시기적으로도 앞쪽에 치우쳐 있다. 저자는 이렇게 조선 연구의 해당 분야와 연구자 세대에 대한 편향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도한 바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먼저 일본인들이 수행한 조선 연구가 가진 특징을 식민주의 역사학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경성제대 조선학의 기원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들과 자유주의적 식민정책학자로서 식민지 사정을 비판했던 이가 경성제대 조선학의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형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 연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기존 조선 사학계를 대표하는 오다 쇼고나 이마니시 류 말고 동양학자 그룹들의 학자였던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  국제법 학자인 이즈미 아키라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청대 고증학 지식인들과 교류한 조선 지식인들에 주목한 후지쓰카 지카시와 퇴계 이황에 주목한 아베 요시오, 그리고 비동화주의를 주장한 이즈미 아키라. 이런 학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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