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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일본 내각총리내신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는 미래의 공간들 사이의 관계를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주권선이란 국경을 의미하고, 이익선은 국경 밖에 있으면서 국가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20년 뒤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조선과 인접해 있던 만주는 이들에게 이익선으로 재인식되었다.
제국의 팽창이 야기하는 ‘문제 공간‘의 끊임없는 생성은 결국 수목의 나이테처럼 제국의 중심과 주변이 연쇄적 관계를 갖는 동심원적 구조를 만들어냈다. 제국의 법학자들은 동심원적 구조의 외연을이루는 ‘문제 공간‘에서의 국제적 분규나, 새롭게 획득한 공간과 기존 공간구조 사이의 정합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 P20
경성제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헌법학자 기요미야 시로(淸宮四郞, 1898~1989)는 ‘외지‘ 개념을 중심으로 제국 일본의 ‘문제 공간‘ 혹은 ‘문제 공간‘이었던 공간들에 대한 법적 규명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외지‘라는 말이 법률상의 용어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식민지‘라는 용어가 쓰였는데, ‘식민지‘는 정치·경제상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착취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그 사용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 - P21
결론적으로 그는 ‘외지‘를 내지에 미편입된 이법영역(異法領域)"으로 정의했으며, 그에 따라 혼슈·시코쿠·규슈 홋카이도 · 남사할린 · 류큐 · 오가사와라를 ‘내지‘로, 조선 · 타이완 . 관동주 · 남양군도를 ‘외지‘로 각각 분류했다. - P22
기요미야는 '외지' 개념을 밝히기 위한 검토로 '외국', '조차지', '위임통치구역' 같은 주변 개념들과 비교 검토 끝에 외지를 법 밖의 영역으로 정의하였다.
 
이 책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4권으로 현대의 공간과 다른 '근대'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공간의 변화를 밝히며 이를 이끈 권력의 실체와 배경 학문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저자가 검토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만철조사부이다. 만철 관련 연구를 위해 선택한 인물은 하타다 다카시인데 이는 그가 전후 조선사학을 이끈 인물이면서도 만철조사부에 참여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1940년부터 약 5년간 화북농촌관행조사(華北農村慣行調査)에 참여). 하타다 다카시는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권 만선사에서도 일본인 한국사 연구사로 소개된 바 있다.
그동안 읽었던 비판 총서들 중 가장 어려웠던 주제였다. 왜인가 생각해보니 공간 감각이 없는 내가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현대의 국경에 익숙해서 시대 상황과 권력의 구미에 맞게 변하는 공간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던 것도 있다. 하지만 독서가 의미 있었던 것은 공간과 권력, 이를 뒷받침하는 학문 간의 관계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 시기 조선의 내지는 조약상의 개항장 바깥에 해당하는 공간인 동시에, 적어도 경제상의 관세영역에서는 청국의 판도 내에 속한 공간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내지라는 하나의 공간에 대해 자주독립국화와 속방화라는 상반된 두 개의 기획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을 둘러싼 각국 간의 세력 균형과 그로 인한 현상 유지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의 발발은 그 균형을 깨뜨렸고 일본은 동아시아에 새로운 공간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후 청국이 한국 내지를 다시 자신의 판도로 취급할 여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의 ‘자주‘를 자명한 것으로 증명해줄 근거는 되지못했다. - P52
 
조선은 청의 조공 체제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과의 개항, 특히 영국과의 통상 조약 이후 외국 열강들과의 잇따른 조약 체결로 세계 체제에 편입된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청을 중심으로 하던 조공체제를 깨뜨렸다. 조선은 청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했으나 열강과의 이익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당시 한국 정부와 통감부 모두 근대적법제 정비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긴 했지만, 한국 정부 측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려 한 데 반해, 통감부 측은 관행적 거래를 통해 획득한 일본인의 소유 토지를 법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증명규칙은 통감부의 의도가 반영되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장치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증명규칙」 제8조에서는 당사자의 일방 혹은 쌍방이 외국인인 경우의 증명수속을 정하고,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또한 토지 · 가옥을 매매·증여 · 교환 · 전당할 때에는 군수 또는 부윤의 증명을 받을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통감부령 제42호로 공포된 「토지건물증명규칙」에서는 당사자의 일방 혹은 쌍방이 외국인으로서 증명규칙에 의한 증명을 받은 자는 이사관의 사증도 받도록 규정했다. - P63
 
일본 정부는 "한국 내지를 개방하게 할 수단"으로 내지에서의 일본인의 토지 소유권이나 영대차지권 혹은 용지권을 강요하겠다는 계획 하에 1906년 10월 31일 「토지가옥증명규칙」을 공포했다. 이와 같이 내지에서도 외국인의 토지 가옥 소유가 공인되면서 내지와 조계 밖 10리 이내의 경계(간행리정)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제국헌법을 어느 영역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나, 한국의 보호국화와 식민지화라고 하는 일련의 사건 해석을 둘러싸고 일본의 법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근대적 학문을 통해 새로운 공간을 법적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제국 공간의 확장을 기정사실화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권력 ·공간·학문의 삼중주가 펼쳐낼 앞으로의 이야기들에 대한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 P72
 
국제법은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일본은 1894년 조약 개정을 통해 국제법상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1890년대 후반 한국 언론에서는 일본의 조약 개정을 독립국의 대등한 권리를 회복한 선례이자 본받아야 할 모델로 간주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아직 각국과 대등한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것이었다. 이즈음 일본 국내에서는 국경 밖 일본인에 대한 법률 적용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방면에서 검토가 이루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국경 밖 지배 영역의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법학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진다. 논점은 국제법상 국가의 의사와 국내법상 국가의 의사의 관계,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 주권과 통치권의 관계, 통치권과 영토권의 관계, 통치권이 이전 가능성이었다.
 
1909년 9월 4일 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일청협약(間島二關ㅈ八日淸協約)」, 즉 ‘간도협약‘이 조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룽징춘(龍井村), 터우다오거우(頭道溝), 쥐쯔제(局子街), 바이차오거우(百草溝)의 4개소를 상부지로 개방하고, 상부지 안에서의 한인과 일본인의 거주를 승인했다(제2조). 상부지 밖에서도 한인의 거주권(제3조), 토지소유권(제5조) 등을 인정했으나, 다만 청국의 사법권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문제 공간‘ 간도는 특수 공간인 ‘상부지‘와 그 바깥의 잡거 공간으로의 분할을 통해 ‘문제‘ 해소를 꾀했다. 그런데 이때 ‘만주문제‘에 관한 협약도 함께 체결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 공간‘은 이미 간도를 넘어 만주로 확장되어갔다. - P86
 
간도 문제를 둘러싼 청일 양국 간의 교섭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이루어졌다. 청국은 경계 문제 만이 아니라 청한 양국인의 생명 재산 및 사업의 보호, 재판 관할권 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말했다. 결과적으로 상부지와 바깥의 공간으로 분할하였다.
 
러시아와 청국은 동맹관계를 수립하면서 철도 부설을 위해 러청은행이 철도회사를 설립하는데 합의했다. 또 회사 설립으로부터 회사를 회수할 권리가 청국에 부여되며, 무상으로 인도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이에 따라 설립된 것이 동청철도다. 동청철도는 1896년 12월 4일 창립되었다. 1897년 랴오둥반도를 점령한 러시아는 1898년 청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랴오둥반도와 그 주변 도서를 25년간 조차할 수 있게 되면서 하얼빈에서 뤼순까지 이어지는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을 손에 넣게 된다. 하지만 러일전쟁 결과 남만주에서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이 이어받게 된다.
 
일본이 획득한 권익을 지배 영역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조차지인 관동주와 철도 연선에 설정된 철도부속지로 다시 나눌 수 있다.

 

본래 ‘관동(關東)‘이란 말은 산하이관 동쪽을 의미하므로, 랴오둥반도 남단에 설정된 조차지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그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 명명했고, 일본도 그를 따랐다. - P93
만주의 통치는 만철의 철도부속권을 시작으로 만주국 건립 이후에는 관동국의 행정권까지 아우르게 된다.
 
중앙기관의 변천과는 별도로, 만주의 통치실상은 군부, 외무성, 관동청의 기관들뿐 아니라 철도부지 행정권을 갖는 만철까지 가세해 서로 착종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국 건립 이후인 1934년에는 만주에 관동국이 설치되어 행정의 일원적 운영을 꾀하게 되었으며, 그에 맞춰 1935년에 내각총리대신 소관의 타이완사무국을 설치하여 종래 척무대신이 소관하던바를 이관토록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에는 척무성과 타이완사무국을 모두 폐지하고, 내무대신과 신설된 대동아성(大東亞省) 대신이 각각 조선총독부 · 타이완총독부 · 가라후토청에 관한 사무와 관동국 및 남양청에 관한 사무를 나누어 관장하도록다. 이는 조선, 타이완, 사할린 등의 ‘외지‘에 대한 ‘내지‘화, 다시 말해 내 · 외지 행정의 일원화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동시에 관동주와 남양군도는 제국의 판도 내에서 ‘내지‘의 ‘외연‘으로 자리매김되었다. - P95~96
 
이는 마치 조약에 근거하여 외국인의 거류 및 무역을 위해 설치된 조계가 당초에는 일본인들의 한반도 침략 거점 역할을 했지만, 1910년 ‘한국병합‘ 이후로는 조선총독부의 일원적 지배를 방해하는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 상황과 유사하다. ‘문제 공간‘을 ‘통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통치의 예외성을 담보하는 그와 같은 공간들은 반드시 정리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1914년 4월 각국과의 협의 끝에 조계를 철폐하고 새로운 지방제도인 부제(制)실시를 통해 일원적인 통치를 실현했다. 만철의 철도부지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즉, 1937년 11월 만철의 철도부속지가 철폐되고 그에 대한 행정권은 만주국에 이양되었다. - P103
 
한국병합 이후 조계 지역이 필요없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폐지하면서 일원적인 통치를 실현했다. 만철의 철도부속지가 폐지되고 행정권이 만주국에 이양되면서 일본이 만주 지역에서 행하는 행정 통치는 일원화되었다.
만철의 조사기관으로 만철조사부는 1907년 4월 설립된다. 만철 창립 당시 조사부는 총무부, 운수부, 광업부, 지방부 등과 함께 만철 본사의 중심 부서로 출발했다. 조사부 기구로는 조사부, 중앙시험소, 지질연구소 등이 있었다. 1908년 1월 만선역사지리조사부가 설치되었고 11월에는 동아경제조사국이 개설되었다.
 
시라토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만한 지방에 대한 조사연구를 강조했다. 하나는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순연한 학술적 견지"에서이다. 전자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무릇 제반 사업이란 확실한 학술적 기초 위에서만 추진될수 있는 법인데,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만한 경영‘을 담임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를 뒷받침할 만한 학술적 기초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남만주의 권익 계승과 한국의보호국화로 일본 학자들이 해당 지역을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고, 게다가 해당 지역은 서구 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던 곳이므로, 일본 학자들이 "세계 학술"에 기여할 바도 크다는 설명이다. - P126
 
만선역사지리조사부는 초기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와 '학술적 견지'의 입장에서 만철 사업이 도쿄제대로 이관된 후에는 '학술적 견지'의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만한 경영에 관한 실제적 필요' 입장은 제반 사업은 학술적 기초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술 기초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학술적 견지'는 남만주 지역이 서구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아니므로 일본학자들이 학술의 기여고다 크다는 입장이다.
만선역사지리조사부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시라토리 구라키치, 야나이 와타리, 이나바 이와키치, 미쓰이 히토시, 쓰다 소우키치, 와다 세이, 세노 우마쿠마, 이케우치 히로시 등이 있었다.
랑케와 마찬가지로 시라토리 또한 일본을 구체적인 역사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천황제에서 ‘국민의 이념‘의 근거를 구했다. 그러나 랑케에게 ‘국민의 이념‘이란 어떤 민족이 특정의 국민이 되기에 성공하는 한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국가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민족은 역사 이전의 암흑 속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랑케가 목격한 역사의 종언이 유럽이라는 경계를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20세기 전환기에 시라토리가 목격한 세계는 랑케의 그것과 달랐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 혹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 비유되곤 했던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시라토리가 그려낸 역사 과정은 무질서에서 조화로의 낙관적인 이행을 담보하지 못했다. 국제관계를 남과 북의 항시적인 투쟁 상태로 상정한 그의 남북이원론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 P151
이케우치의 실증주의는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훈도 아래 탄생하였고, 시라토리의 실증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루드비히 리스(1887~1902년 사학과 강의) 지도가 매개(랑케의 실증주의) 역할을 했다.
 
이나바와 이케우치는 1세대의 시라토리와 마찬가지로 지리 중심적 시각을 공유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중국 및 만주의 영향을 크게 강조했다. 그러나 이나바는 선불가분론의 입장에서 한반도 제 민족을 중국 및 만주계로 전제한 뒤 현 시점에서 조선인의 만주 진출을 촉구하는 사회적 발언까지 이어갔으나, 이케우치는 중국및 만주와 구별되는 한족(韓族)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그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 P157
고야마 사토시(小山)는 일본에서 루드비히 리스를 통해 아카데미즘 사학이 수입될 때 실증주의 연구 방법만이 아니라 랑케적인 ‘세계사‘ 이념이 함께 들어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측면이 각각 일본사학. 동양사학과 서양사학 역사철학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말했는데, 전자를 비판한 후자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일본 근대사학이 수용했던 랑케 사학의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사료 비판을 사상(象)하고 세계사적 파악만을 강조했으며, 랑케가「강국론」에서 묘사한 경합하는 국민국가군으로 이루어진 체계인 세계사를 유럽적 세계로부터 세계적 세계로 확대함으로써 역사학에서 ‘근대의 초극‘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증과의 긴장을 결여한 채 정치적 실천 - 세계사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전‘으로 돌진한 교토학파의 역사철학은, 스스로 내건 세계사적 사명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 놓인 간격을 대상화하지 못한 채 공전함으로써 파탄했다.
 
"실증과의 긴장을 결여한 채" 랑케로부터 ‘세계사‘ 이념만을 수용한 서양사학과 역사철학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실증주의는 그러한 전쟁책임, 더 나아가 식민지 지배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 P166~167
이케우치의 합리주의는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그것이 합당한 자료들에 모두 부합되면 진리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하타다는 학문과 사상의 통일을 주창하며 기존의 학문의 순수성을 강조하던 사가들을 비판하였다. 하타다가 내세운 것은 일본의 '아시아'로의 복귀였다.
 
일찍이 신문기자이자 정치평론가로 활약한 우자키 로조(鴻崎鷺城, 1873~1934)는 1913년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한 「현시의 지나통(時支那通)」이라는 글에서 청일전쟁 이전의 ‘지나통‘을 ‘구지나통‘, 그 이후의 ‘지나통‘을 ‘신지나통‘으로 구분하고서는, 전자의 경우 학자가 많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반드시 학자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학자가 아닌 경우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신지나통‘을 다시 네 부류, 즉 외무성파·육군파·순실업파·낭인파로 구분했는데, 이들은 말하자면 특수 기술자나 중국사정 조사자 혹은 소개자 정도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 P181~182
'지나통'은 중국전문가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중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하며 중국 관계 생업에 종사하면서 그 방면에 아는 것이 많고 경험이 많은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다만 시기에 따라 '지나통'의 개념의 실체가 변화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과 대결을 하게 되면서 '구지나통', '신지나통'이 만든 지식은 소용없게 된다.
 
화북농촌관행조사는 1939년 10월 동아연구조 제6조사위원회 내 학술부위원회에서 '화북농촌관행조사계획'이 수립되면서 실시되었다. 만철조사부가 북지경제조사소에 관행 조사반을 조직하였고 조사원 1명이 조수 1명을 동반해 농민들과 질의응답하는 형태로 현지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내용을 그대로 수록하면서 날 것의 자료로 모순된 내용들도 존재했다.
고바야시 히데오에 따르면, 만철조사부 내에는 리버럴한 분위기가 강하여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텍스트로 삼아 조사부원들이 독서회나 연구회를 열 정도였다. 그 때문에 세간에서는 만철조사부의 연구 경향을 가리켜 ‘만철 마르크스주의‘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타다 또한 만철조사부 시절을 "당시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회고했다.만철 입사 전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곳이 젊은 연구자들이 모인 역사학연구회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만철조사부가 그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동료들과 열띤 토론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가면서 희열을 느끼는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체득한 지식이나 방법론에 대해서 크게 비판을 받기도 했던 까닭에 분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 P196
하타다가 관행조사에 참여한 기간에 그가 맡았던 조사 대상은 '촌락'이었다. 그의 관심은 촌락공동체의 존재를 상정하고서 실태를 확인하는 데 있었고, 이는 당시까지 논의된 공동체 이론을 현지에서 검증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서 공동체 이론이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중국 사회의 특질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 공동체에 주목한 제반 논의들을 지칭하는 것인데, 중국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논의는 1920년대 후반 중국 혁명의 급격한 전개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중국에서 ‘공동체‘의 존재 여부에 대해 히라노는 긍정하고 가이노는 부정했다. 이는 각각 ‘대아시아주의‘와 ‘탈아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때 ‘공동체‘는 그들의 ‘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매개체이자 그들의 꿈이 투영되는 공통의 장소였는데, 공통의 장소를 대상으로 서로 다른 꿈을 꾸었다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논쟁은 ‘동상이몽‘이었다. - P204
하타다는 '히라노 가이노 논쟁'이라는 사례를 통해 연구 내용이 연구자의 시점이나 자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역사서술의 주체 문제는 역사상의 주체 문제와 함께 하타다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였다. 만철조사부는 역할이 축소되며 1939년 조사부로, 1943년 조사국으로 변화했다. 조사부의 활동은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유효성을 의심받으면서 군부는 '만철조사부 사건' 등을 일으키며 대조사부를 해체했다.
 
하타다의 ‘민족‘은 민족 내 계급 대립을 인정하고 있다는점에서 이시모다의 1953년 이후의 ‘민족‘ 개념을 선취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하타다는 전전의 경험에 비추어 전후 공간에서의 ‘민족‘의 복귀 또한 경계함에 따라 ‘전후 역사학‘과의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마에가 이시모다에게 행했던 비판, 즉 "이시모다의 논의는 근대를 넘어 역사를 관통하는 연속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것으로, 민족이라는 주체 그 자체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상화하지는 못했다"는 말은 하타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비록 하타다의 ‘민족‘이 사회적 조건에 제약을 받고 계급 대립을 내포하는 단위라고 할지라도, ‘민족‘ 자체는 그 성격을 바꾸어가면서도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지는 초역사적인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하타다의 논의가 갖는 한계점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타다의 ‘민족‘은 이시모다의 그것과 달리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일본 민족‘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조선 민족‘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P222~223
하타다의 전후 조선사학은 역사학연구회의 비판적 역사의식 속에서 탄생했고 이로 인해 역사학연구회가 창립되었다(1932년). 역사학연구회는 민족문제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패전 후 내셔널리즘이 쇠퇴하면서 민족주의의 소멸을 보증할 수 없었고 1951년부터 굴욕과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민족 문제가 대두되어 전쟁 가해 책임은 방기한 채 '민족'만이 복귀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와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서로 조직원리를 달리하며 대결했다. 전자는 외국인으로서의 독자성을 주장했고, 후자는 일본 인민과 함께 일본 국가권력에 싸움으로써 일본 내 혁명운동을 담당하자 주장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10회에 걸쳐 일본에서의 조선 연구 결과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란 주제를 두고 10회에 걸쳐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하타다는 '전후 조선사학'이 이전 연구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했으나, 그 비판 자체가 철저하지 못했고 일본인의 조선관에는 이전 연구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다 주장했다. 이로써 이전 연구 결과를 철저히 검토해야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 일본인의 대조선관 변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일본 조선 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이 새로운 방법론으로 대두한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일국/세계, 보편/특수, 경제/문화 중 어느 한쪽만 강조하는 대립 구도를 넘어선 내용를 심화하자는 움직임이었다.
 
하타다가 말하는 ‘동양사의 전통적 사고방식‘이란, 현실과 거리 두기, 그러한 단절을 학문 성립의 요건으로까지 간주하는 연구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학문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P250
전전 '화북농촌관행조사'와 전후 '관행조사' 사이의 인적 구성과 방법론의 단절로 인해 관행 조사 평가는 긍정/부정으로 양분되었다.
 
일본인에게도 조선인의 고뇌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으며, 공감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생각합니다. 같은 입장에 몸을 두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상대를 인식하고 이해하여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전전의 조선사 연구에서는 매우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 P252
하타다는 조선사의 문제 제기가 경솔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와의 공감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만 역사의 체계적 인식을 방기한 연구자들은 학문의 순수성을 대가로 도리어 권력과 무책임하게 결합했다는 한계가 있다.
 

공간은 지리적 영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 움직이는 권력이 있고 권력자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배경 지식을 만들게 되어 있다. 이 책은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면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만철조사부의 활동의 변화와 하타다 다카시라는 인물의 발언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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