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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category 리뷰/책 2022. 7. 18. 13:59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반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또 어떤 사람은 두세 페이지만큼의 역사를 우리는 함께 시간의 책을 써내려간다. 저마다 자신의 진실을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뉘앙스의 함정. 그래서 이 모든 진실의 외침을 명확히 들어야만한다. 이 모든 것 안에 녹아들고 이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거리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를 하나로 잘 버무려내야 한다. - P26
 
전쟁을 겪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전쟁은 멀리하고 싶은 것일테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을 중심 으로 한 지역에 참전했거나 전쟁을 목격한 200여 명의 여성을 작가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2차 세계대전은 세계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때문에 여자들, 심지어 많은 10대 소녀들도 참전했는데 특히 소련에서는 10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웠다. 전쟁은 남자들만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200여 명의 여성들을 통해서 분명히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 P17
 
우리가 들어온 전쟁 실화(또는 영화 등의 픽션)는 몇 명의 사람이 죽었는지, 이겼는지, 졌는지만 이야기하므로 전쟁을 결과론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물론 과정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이는 전쟁터에 대한 잔혹한 묘사나 적에 대한 증오에 대한 감정 등을 표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독특한 지점은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어떤 배경으로 참전을 하게 되었고, 또는 전쟁을 목격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인터뷰라서 느낄 수 있는 가감 없는 당시의 솔직한 감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 군인들이 겪어야 했을 편견과 무시, 여성 보급품에 대한 배려 없음으로 생긴 불편함 등도 엿볼 수 있다.
 
지금 기억으로 대령 이름이 브로트킨인가 그랬는데, 아무튼 지휘관인 그 대령이 우릴 보더니 버럭 화를 내는 거야. ‘성가시게 꼬맹이들이 달라붙었군. 이건 뭐, 여성무용단이라도 온 거야? 무슨 발레단이 온 거냐 말이야! 여긴 전쟁터지, 무도회장이 아니라고! - P70
 
"다들 서둘러 병사가 됐어... 생각하고 말고 할 새가 없었거든. 자신의 감정을 고민해볼 시간이 없었지." - P75
 
나는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귀염둥이 딸이자 집안의 응석받이였어. 그런데 그 응석받이가 전쟁터로 간다며 그 긴머리를 댕강 자르고 남자애처럼 짧은 머리로 나타났으니. 엄마, 아빠는 한사코 나를 말리셨어. 하지만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 P97
 
남성 군인들의 편견과 무시, 조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을 그녀들을 생각하면 존경이 인다. 생각해 보면 다들 10대의 나이였을텐데 말이다.
 
우리는 여자인 우리보다 두세 배는 더 무거운 남자들을 부여안고 끌고 해서 전장에서 구해냈어. 부상자들은 특히 더 무거웄지. 부상자 하나만도 벅찬데, 무기도 챙겨야지, 게다가 부상자는 외투에 군화까지 신고 있잖아. 8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부상자를 둘러멘 건지 질질 끄는 건지 모르게 데려오다보면 부상자가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지.. 그러고는 또 80킬로그램 나가는 다음 부상자를 구하러 전장으로 달려갔어... 그렇게 한 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대여섯 번은 나가서 부상자들을 구해냈지. 정작 그러는 나는 몸무게가 48킬로그램이었는데 말이야. 발레나 해야 할 몸이었지. - P151
 
몇십 년이 지나서야 유명한 여기자 베라 트라첸코가 중앙일간지 '프라우다'에 처음으로 우리 이야기를 실었어. 여자들도 참전했다는 기사를 쓴 거야. 그리고 그 여인들이 지금 홀로 남겨져 집 한 칸 없이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렸지. 우리는 이 신성한 여인들에게 빚을 졌다면서. 그제야 사람들이 여성 참전용사들에게도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어. 마침내 정부에서도 나이가 사오십이 되도록 집도 없이 기숙사에 살고 있던 이 여인들에게 집을 내주기 시작했고. - P200
 
'존경하는 사령관님, 한번 말씀해보세요. 우리 소녀병사들은 지금 거의 혼자 살아요. 결혼들을 못했죠. 다들 콤무날카에 산다고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누구라도 있나요? 보호해준 사람은요? 전쟁이 끝나고 당신네 남자들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거죠? 배신자들!' - P224
 
"우리는 애를 참 많이 썼어... '여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리고 우리가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하지만 남자병사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깔봤고 아주 거만하게 굴었어. '여자들이 무슨 전쟁을 한다고...'라는 식이었어.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남자가 되겠어? 그럴 순 없는거지. 우리 생각은 하나였어. '우리는 원래 남자와는 다르게 태어났다.' - P357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불을 뿜을 땐 나를 '누이! 누이!'라고 부르다가도 전투만 끝나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다들 기회만 엿봤으니까... 밤이면 막사에 틀어박혀 아예 나가질 않았어. 다른 여자들도 이 이야기를 하던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아마 말하기 창피했을 거야... 그래서 입을 다물었을 걸. 다들 자존심은 세가지고!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 있었어. 왜냐하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까. 새파랗게 젊은 나이게 죽어야 한다니, 억울하잖아... 그리고 남자들이 4년이나 여자 없이 지낸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우리 군엔 매음굴이 없었어. 그래서 알약 같은 것도 나눠주지 않았지. 4년 내내... 지휘관들은 그대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지만 사병들은 아니었어. 군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선 다들 침묵하지... 보통 그런 건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 P411
 
성폭행당한 독일 여자를 봤어. 여자는 알몸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어. 다리 사이에 수류탄이 박힌 채... 몇 달후에... 우리 대대로... 독일인 아가씨 다섯 명이 지휘관을 찾아왔어. 흐느껴 울더라고... 산부인과 의사가 아가씨들을 검진했더니 여자들 그곳이 많이 상해 있었어. 심하게 찢겨 있었지. 팬티는 온통 피로 물들고... 밤새 성폭행을 당한 거야. 병사들이 줄을 서서 그 짓을 한 거지. - P517
 
남자와 똑같이 참전하여 열심히 싸운 여성 군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도 그들의 참전 사실 자체가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심지어는 공훈도 주어지지 않아 힘든 삶을 사는 이들도 많았다. 부상을 당한 경우도 있을텐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을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막연한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심지어 남성 군인들과 한 공간에서 지내다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전쟁 후에 그들에게 남은 건 무엇일까 끔찍하다.
 
거긴 중립지대였어. 만약 적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채면 언제고 포탄이 날아들 수 있는 상황이었지. 그런데 우리 병사들이 아기가 태어난 소리를 듣고는 '만세! 만세!'하고 외친 거야. 최전선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거야! 물을 가져왔지만 데울 데가 없어서 그냥 찬물로 아기를 씻겼어. 아이 엄마가 덮고 누운 낡은 천조각들 말고는 집안에 정말 아무것도 없더라고. 나는 며칠을 그렇게 밤마다 농가로 찾아갔어. 진격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농가를 찾아 작별인사를 했지.
-이제 못와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곧 떠나요.
여자가 남편에게 라트비아어로 뭔가를 물었어. 남편이 통역해주었지.
-집사람이 당신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요.
-안나예요.
-집사람이 아주 예쁜 이름이라네요. 당신 이름을 따서 우리 딸도 안나라고 하겠대요.
여자가 살짝 몸을 일으키더니(아직 일어나 앉지는 못할 때였어) 나에게 조개로 된 아름다운 분톻을 내밀었어. 모르긴 몰라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인 것 같더라고. 분통을 열었지. 그러자 사방에 총탄이 날아다니고 포성이 울리는 그 한밤에 분 향기가 퍼지는데...
아, 그건 정말 특별한 무엇이었어...
- P360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매 페이지마다 눈물이 차올랐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누릴 수 있었을 일상이 빼앗긴 상황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녀야 했을 나이, 공부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하루 아침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부상 또는 사망으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렸다. 전장에서의 모습도 등장하지만 전쟁터에 가기 전 부모와 딸이 헤어지던 장면,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살아 돌아간 집에서 폭삭 늙어버린 딸을 못 알아보는  부모의 모습이 미어졌다. 살아 돌아왔으나 부상 등의 후유증으로 신체 장애를 입거나 성폭행 경험으로 영영 여성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많은 이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랴.
 
"엄마가 기차로 뛰어왔어... 우리 엄마는 무척 엄격했어. 우리가 귀엽다고 입을 맞춰주거나 칭찬해준 적이 한 번도 엇었지. 자식 중에 누가 뭘 잘해도 그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면, 그걸로 끝인 분이었어. 그런데 그런 엄마가 기차로 막 달려오는 거야. 와서 내 머리를 끌어안고 정신없이 입을 맞췄어. 입을 맞추고 또 맞추고. 그러고는 내 눈을 바라보는데... 하염없이... 그렇게 한참을... 나는 이제 엄마를 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알았지.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군용배낭도 내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 P104
 
-이곳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을까요?
엄마는 난로에 불을 지폈고, 남동생 둘은 입을 게 없어서 발가벗은 채로 바닥에 쌓인 짚더미 위에 앉아 있었어. 엄마가 나를 몰라보고 대답했어.
-아가씨, 당신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산다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봐요.
내가 가까이 다가갔어.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아가씨, 다른 곳을 찾아보라니까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몸을 굽혀 엄마를 끌어안고 조용히 말했어.
-엄마, 우리 엄마!
그제야 엄마도 동생들도 나를 알아보고는 그대로 나에게 달려들어... 울부짖는데, 아...
- P109
 
우리는 열여덟, 스물 나이에 전선에 떠났다가 스물, 스물넷이 돼서 돌아왔어. 처음엔 기쁨에 들떴다가 나중엔 무서워졌지. 이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데 뭘 해야 하지? 평온한 삶 앞에서 공포가 밀려왔어... 그새 다른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했는데, 우리는 뭐지? 우리는 우리의 전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우리가 아는 것도 전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전쟁이었지. - P220
 
창밖을 보면 겨울풍경이 너무 아름답잖아. 하얗게 눈을 맞고 선 전나무들은 무슨 동화 속 나라에 나오는 나무들 같고. 걱정이고 뭐고 한 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지... 하지만 또다시..." - P239
 
상냥하고 부드러운 되는 법을 배워야 했어. 연약하고 가냘픈 여자가 되는 법을. 하지만 발은 이미 치수 40의 군화에 길들여졌는데. 누가 나를 끌어안으면 영 어색했어. 그리고 내 일은 내가 책임지는 데 익숙했지.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바라면서도 정작 그 말을 들으면 이해를 못했어. 나한텐 그게 애들 장난 같았으니까. 전선에서 남자들과 지내며 러시아 쌍욕만 들었으니까. 거기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도서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시를 읽어봐. 예세닌을 읽어'하고 충고하더군. - P429
 
아직 아이를 가슴에 안고 다닐 때, 그러니까 아이가 채 돌이 안 됐을 때였어. 침대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리는 거야. '레나. 편지 왔어... 아이 아빠 소식이야.' 그 소식을 들은 게 부활제 직전 토요일이었어. 4월... 햇살이 제법 밝게 비치는 날... 편지에 우리 남편 이반이 폴란드에서 전사했다고 쓰여 있었어. 1945년 3월 17일... 우리 남편이 세상을 떠난 날이야.
그때 놀란 뒤로 딸아이는 오랫동안 아팠어. 학교 들어갈 때까지 그랬어. 문만 세게 여닫아도 누가 소리만 질러도 아파 누워버렸지. 아마 7년은 제대로 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나에겐 해가 비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어. 늘 눈앞이 캄캄했으니까. - P458
 
우리는 투쟁을 꿈꿨어. 무기력하게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지. 지하활동에 합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아들은, 큰애고 그래도 나이가 더 많으니까 시어머니께 보냈어. 시어머니는 아들을 받아주시며 한 가지 조건을 달았어. '그래, 내 손자는 내가 맡으마. 다만 이 집에는 더이상 발걸음을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우리 모두 죽을 순 없다.' 나는 3년 동안 아들을 못 봤어. 시어머니 집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 나는 딸을 데리고 빨치산에 합류했어. 딸아이는 1년을 넘게 그곳에서 나와 함께 지냈어. 1943년 5월에 나는 타자기를 가지고 이웃 빨치산 부대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어.
우리 부대가 봉쇄를 뚫고 나오자마자 나는 많이 아팠어.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고 피부가 흐물흐물 벗겨져나갔지.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우리 아이를 품에서 놓지 못했어... 딸을 보내던 순간이 생각나. 옐로치카의 얼굴을 보는데 온몸에 경련이 나는거야. '언젠가는 우리 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들은 해방되고 난 후에 만났어. 아이가 우리 시어머니는 티푸스로 돌아가시고 이웃집 여자가 료냐를 데려갔다고 말해주었어. 이웃집 마당으로 들어섰어. 우리 아들이 맨발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앉아 있었어.
-누구랑 살아?
-옛날에는 할머니하고 살았는데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제가 할머니 장사를 지내드렸어요. 날마다 할머니한테 가서 나도 무덤으로 데려가라고 빌었어요.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요...
-아빠는 전선에 나가셨는데 살아 계세요. 엄마는 파시스트들이 죽였어요.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왜 엄마도 못 알아봐?
아들이 나에게 와락 달려들었어.
-아빠!
그때 나는 남자군복에 군모를 쓰고 있었거든. 아들은 잠시 후에야 비명을 지르며 '엄마!'라고 불렀어. - P482~486
 
저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전쟁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랐다. 전쟁이 아닌 세상을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것이 막연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현재의 대한민국도 휴전 상태일 뿐 언제고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애써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저자는 이들을 인터뷰하며 고통의 이야기를 마주했다. 책으로 읽고 있는 나도 힘겨웠는데 직접 그들을 마주하고 표정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란 어떤 것이었을지 그 고통과 무게감은 더 컸으리라 예상해본다.
우크라이나는 스탈린의 잔인한 집단화 정책을 실시하고 각종 명목으로 수용소에 가두거나 유형을 행했다.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곡식의 대부분이 스탈린의 명령 하에 수탈 당하면서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사상의 문제로 정치범으로 몬 것으로 인해 많은 동유럽 국가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유형을 당해 피해를 입었는데 연해주에 살던 한인들과 독립운동가들도 이때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된다.
책에는 특히 우크라이나 소녀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해서 더욱 심금을 울렸다. 그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이것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고 살육과 방화 등이 이어지고 있다니 꿈(이상)과 현실은 이렇게나 다를 수 밖에 없는건가 곱씹게 된다. 인간의 탐욕과 교만은 증오를 키우게 하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옥사나라는 아이와 친했는데,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굶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얼마나 먹을 게 없는지, 개구리고 쥐고 남아나는 게 없다는 거야. 사람들이 다 먹어버려서. 옥사나의 고향마을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죽어나갔대. 옥사나의 남동생들도 모두 굶어 죽고, 엄마 아빠도 돌아가시고. 옥사나만 밤에 몰래 콜호스의 마구간에서 말똥을 훔쳐먹고 살아남았어. 그래서 내가 그랬어. "옥사나, 스탈린 돟지가 적들과 싸우고 있어.  스탈린 동지가 불순분자들을 소탕하고 있다니까. 하지만 놈들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러자 옥사나가 대답했어. "그렇지 않아. 너 바보구나. 우리 아빠가 역사 선생님이었는데, 나한테 '언젠가 스탈린 동지가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라고 하셨는걸..." - P35
 
스탈린의 잔인한 집단화 정책과 1937년에 대해. 그리고 수용소와 유형에 대해. 1937년이 없었다면 아마 1941년도 없었을 거라는 대화도 오간다. 우리 군이 모스크바까지 밀리는 일도 없었을 거라는 이야기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 모든 일은 잊히고 말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 P26
 
소련군으로 참전했던 많은 이들이 독일군에 맞서면서 증오감에 치를 떨기도 했지만 막상 그들을 만나면 외면하지 못하고 동정심을 보일 때, 내 자식이나 손자/손녀가 죽은 것이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스러져간 많은 자식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인류애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분노에 짓이겨 싸울지라도 이 땅 위에는 이런 인간들이 있기에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사자들 중에 마을 청년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청년 어머니가 장례식에 오신 거야. 서럽게 우시더라고. '아이고, 내 새끼! 네가 살 집도 지어놨는데! 젊은 색시를 데려오겠다고 해놓고! 이제 차가운 땅속이 네 색시가 됐구나...' 부대 전체가 조용히 서서 침묵을 지켰어. 어머니가 마음껏 울도록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지. 잠시 후 어머니가 고개를 들더니 당신 아들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는 걸 아셨어.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죽어 누워 있는 것을 보신 거지.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 죽은 병사들을 위해 또 서럽게 우시는 거야. 자기 아들도 아닌 그 젊은이들을 위해서 말이야. '아이고, 내 새끼들! 너희 어머니들은 너희들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땅에 묻히는 것도 모르는데! 아이고 땅속이 얼마나 춥고 차가운데. 내가 너희 어머니들을 대신해서 울어주마. 불쌍한 내 새끼들아...' - P487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봉쇄와 격리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심해지고 인종 간 갈등이 더 격화되면서 분쟁이 더 심화되고 있는 것 같아 우려가 크다. 불평등은 심해지고 평등으로 향하던 정책들이 백래시하는 중이다. 이럴 때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통해서 현재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피해를 겪는 것은 아이와 여성들이 먼저라는 것을 말이다. 더 이상 이런 인간적 고뇌와 모순을 겪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내 전쟁에는 세 가지 냄새가 있어. 피냄새, 그리고 클로로포름과 요오드 냄새..." - P239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의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테러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한다. 우리는 자신이 편안하고 안락할 수만 있다면 타인의 고통과 아픔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냉혹한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것과도 기꺼이 손을 잡고 타협하는 비겁의 시대. -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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