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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category 리뷰/책 2022. 7. 11. 13:33
대학에 들어가 과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남녀 성비는 대략 좀 더 보탠다고 해도 8:2 정도였다. 남자 과 동기들은 우스갯소리로 입학한 여자들은 꽃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과학기술계의 성비 불균형 현상을 찾을 수 있다(P185)고 한다. 졸업 후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관련 일을 찾아 시작했는데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자 동기들은 나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5~6년이 지나고 10년 쯤 지나도 이 일을 하는 나를 보고 동기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대학 졸업 후 과학기술인의 진로를 밟아 관리자 직책까지 올라가는 여성의 비율은 10.6퍼센트에 불과하다(P184).
 
내가 일하는 세계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이야기들한다. 실력이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관계 없다고 말한다. 나조차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작가는 실력만 있으면 여자든 남자든 누구라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과학자의 길을 단념하거나 힘겹게 과학자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못 본 체하는 말이다(P187)라고 말한다. 능력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과학기술계의 남녀 성비가 그렇게 꾸려진 것은 능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편견에 갇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10년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실력으로 꿇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이 견고한 성비 불균형의 바닥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뛰어난 여자들이 과학기술계에 진입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이 비율을 뒤집을 수 없다. 과학이 진정 변화하려면 잘하는 여학생이 아니라 평범한 여학생이 더 많이 필요하다(P190). 이는 내가 증인하다. 나는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어떻게 하다 보니까 공학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지금까지 일을 지속해서 하고 있다. 뛰어난 이들만 하라는 법 있나, 평범한 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뛰어난 여자들 몇 명이 과학기술계를 바꿀 수 있을까? 작가의 말처럼 평범한 다수의 여자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 열어 젖혀야 견고하다고 믿는 이 과학기술계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페미니즘과 과학기술이 만나는 여러 곳을 소개한다. 성염색체, 뇌과학, 임신, 난자 냉동, 인공지능, 로봇, 진화론, 사이보그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이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소개해본다.
 
성별 간의 능력이 다르다는 주장은 뇌의 성차 연구를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뒷받침되어 왔다.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의 크기는 다르니 능력의 차이도 다른 것 아니냐는 오래된 주장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듯이 남성의 뇌가 여성의 뇌보다 대체로 크다는 것과 남성이 여성보다 더 똑똑하다는 주장은 빈약하다. 2020년 7월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발달 뇌 유전학자 아민 라즈나한 연구팀은 남녀 뇌의 차이를 해부학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남성의 뇌는 시각과 기억력에 관련된 부위의 뇌가 더 컸고, 여성의 뇌는 의사 결정과 미각, 자기 조절 등과 관련된 부위가 더 컸다(P40). 특정 부위가 크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뇌를 가진 사람이 관련 기능을 더 많이 학습한 증거는 되지만 해당 기능이 우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작가는 성별, 국가 등에 따른 뇌의 차이보다 호르몬 활동성, 신체 크기, 직업 등 세부 항목을 만들어 뇌의 성차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P45). 성차로 구분하는 것은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새롭게 디자인하려면 '모자이크 뇌'라는 개념을 끌고 와야 한다. 실제 뇌는 남과 여가 구분되지 않고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되는 여러 특징이 중첩되며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나는 하는 행동도 모습도 남자 같아서 '선머슴' 또는 '톰보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의 범주에 갇히게 하고 젠더 정체성을 고정하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든 폭력이 될 수 있다.
 
젠더라는 신화는 내가 가진 시간과 돈을 어디에 투입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을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둘 것인가 등 삶의 모든 순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신화는 지금껏 과학적인 방법론과 언어로 충분히 규명되지 못했다. 젠더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화의 영역에 있는 젠더가 보다 적극적으로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모두가 각자의 모자이크 뇌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 P48
 
임신에 대해서 아버지의 역할에 주목하자는 저자의 말은 통쾌했다. 여성이 임신할 수 있는 시기는 20~30대로 경력이 중요시될 때이다.  30대 중반 이후 가임력이 떨어지므로 여성의 난자를 냉동하여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이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냉동 난자 산업이 등장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13~2015년 난자를 동결한 한국 여성들의 62퍼센트가 늦은 결혼 및 출산에 대비한다는 사회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P92). 같은 난자 냉동을 선택한 미국과 유럽 여성 응답자의 88퍼센트가 '현재 파트너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보통 나이가 많은 여성은 경력이 안정될 때쯤이면 좋은 파트너를 만날 확률이 낮아진다. 기껏 난자된 냉동을 꺼내쓸 수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난자 냉동 시나리오에는 남성의 역할이 없다. 정작 냉동 난자를 써야할 때 남성의 나이에 대한 고려는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녀의 생식 세포 모두 노화의 영향을 받고 남성의 나이가 들수록 정자의 질이 떨어지고 가임력이 감소한다는 연구는 많다(P95). 임신에는 난자와 정자가 필요하듯 남성도 반드시 자기 역할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한 여성은 임신을 한다고 해도 10개월의 시간을 태아에 좋은 것을 위해 노력하고 운동 및 식이 조절로 체중 감량을 해야 하는 고통에 시달린다. 자궁 속 태아는 어머니를 둘러싼 환경과도 연관이 있다. 빈곤한 환경이라면 부실한 영양 섭취로 제대로 된 몸 관리를 하기 어렵다. DNA 메틸화로 대표되는 후성유전학적 표지가 세대를 거쳐 전달된다는 보고가 있다. 지금까지의 사실을 보면 남성이 경험하는 환경이나 남성의 생활 습관이 정자 속 DNA의 메틸화 양상을 변화시키고, 이 변화가 수정된 배아는 물론 그 배아가 태어나 생산하는 생식 세포까지 전달된다(P83)고 한다. 아버지의 식습관이나 생애 경험이 태어날 아이의 습관이나 체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만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신생 학문인 후성 유전학은 아직 밝혀지지 않거나 논쟁적인 부분이 특히 많다. 그럼에도 이 분야의 최신 연구는 유전자와 환경이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밀접하게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건강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무엇보다 지금껏 유전자를 전달하는 역할만 담당한 남성에게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위한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나의 몸은 어머니의 자궁 밖 아버지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 - P84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헤러웨이는 남성적 기술로 여겨지던 사이보그를 무조건 비판하지 않고 기술이 여성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기술을 통해 해방되기도 한다는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기술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것에 여성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는 것에서 선구안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사이보그는 성형 수술의 현실로 나타난다. 성형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부러움과 비판,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데 정작 수술 이후의 효과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P164). 성형 수술 이후 변화한 몸과 적응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현실의 사이보그는 선언과 선택만으로만들어지지 않는다. 성형 기술의 실제 작동은 다른외과 수술이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성형 수술의 수행에는 의사 외에 간호 및 상담, 병원 경영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 필요하며, 수술중은 물론이고 수술전후 상담 및 회복 과정에 여러 약품과 도구, 장비, 공간 등이 동원된다. 성형 수술을 받는 여성이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에는 정상적인 몸을 규정하는 의학 지식체계와 외모지상주의 담론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물질과 지식, 노동이 개입한다고 보아야 한다. - P162
 
과학기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일상에도 다양한 과학 기술이 존재한다. 자연과 사물, 육체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몸을 이해하는 것, 나를 둘러싼 세계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 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눈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다는 것은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배움에는 실패와 반복이 동반된다. 당연하고 익숙한 방식으로는 새로운 것을 볼 수 없다. 자연과 사물 그리고 그것들과 얽혀 있는 우리의 몸과 삶도 그럴 것이다(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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