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은 오랜동안 조선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게 하는 국가였다.
유학자의 나라를 자처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이민족의 집합체였던 청은 인정하기 싫은 존재였던 것이다.
조선인들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못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에 인질로 다녀온 후에 보인 다른 반응과 행보는 왕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었을 때 그는 북벌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여전히 지배층은 청을 하대하고 멸시하는 느낌이 강했다. 18세기까지 되면 유럽에까지 인식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이후가 되면 청은 내란과 외세의 개입으로 안팎으로 고전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 미래이기도 했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구성했던 민족으로 곧잘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청나라는 다양한 민족 구성원이 존재했고 심지어 만주족의 비율은 청 말에 가면 소수가 될 정도로 낮았다.
물론 만주국은 1930년대 일본이 만주에 세운 정권의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책은 만주족의 근원이 어디인지 찾고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세밀히 기록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몇 년전 구독하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그 때 찜해놓았으나 잊고 있다가 작년에 생각나서 구입했다. 출간된지 몇 년전이라 혹시나 품절이 됐을까봐 걱정했는데 남아 있는 것이 천행이었다.
책의 내용은 만주족에 대한 오해를 걷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다른 민족이지만 그들의 역사는 서로 얽혀 있다. 1600년대 이전까지 만주족으로 알려진 민족의 조상은 당시에 만주족으로 불리지 않았고 여진이라는 이름 등으로 불렸다. 동만주 지역의 몽골족은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청조는 1600년대 중반에 만주족이 중국을 침략하여 명 제국을 멸망시키고 들어선 정복왕조였다. 만주족은 모순된 정체성을 가진 민족으로 평가되었다. 사실 전통적 만주족 문화나 정체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주족의 문화와 정체성 모두 청 제국이 들어서면서 만들어졌다. 그들도 자신들을 자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청이라는 국가가 성장하면서부터였다.
만주족은 그들만의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旗)'라는 조직이었다. 이는 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일부 조직되어 있었고 1924년까지도 유지되었다. '기' 명부에는 누르하치가 초기 추종자들의 가족구성원과 조상에 관해 기록이 되어 있었다. 기 구성원들은 지휘계급에 따라 조직되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되었으며, 부대에 임금과 보급품 토지 지급 등이 이루어졌다. 청 제국 아래에서 모든 만주족, 몽골족과 한군은 '기인'이라고 불렸다. 17세기에 정치적인 신분이었던 기인은 19세기까지 민족적 정체성이 되었다(P32~33).
만주족의 기원은 어떨까. 그들은 최초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섬에서 온 이주자들로 바다를 건너 북상하여 후기 구석기 시대 즈음 만주 지역에 도착했다. 대략 2,500년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던 많은 이들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만주에 거주하는 민족들을 정주 경제와 유목 경제로 구분하는 일은 결코 명확하지 않았다(P48). 일부는 수렵과 채집 등 유목 생활을 하기도 하고 다른 일부는 농경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의 생활을 겸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여와 발해가 이 지역 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제국이 되기 전 여진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여러 민족과 어울리며 사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외부에서 부르던 이름들도 '골드족', '오로촌족', '오로크족'이었는데 자신들은 '나나이족'이라고 지칭했다.(나나이는 송화강의 지류를 가리킨다.)
1234년 금이 몽골족에게 멸망당한 후 여진족 중 일부는 한족에 동화되고 다른 일부는 만주 지역에서 그들만의 관습을 지키며 몽골로부터 작은 간섭을 받으며 생활했다. 원이 멸망한 후에도 여진족은 명과 조선과 계속 교류하였다. 1500년대 후반 건주여진과 조선 사이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는데 건주여진과의 충돌로 인해 조선 조정에서는 신충일을 누르하치의 성으로 파견한다. 신충일은 누르하치의 기 조직을 확인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누르하치은 말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칸khan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사후에 개정된 기록에서는 그를 항상 황제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일생 동안 버일러라고 인식되었다. 버일러는 여진족의 종족 또는 연맹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P107). 건주연맹의 지휘권은 오도리 여진의 족장이 가진 지휘권에서 기원했다. 오도리 여진의 지도자는 몽케 테무르였는데 그는 명조와 조선왕조 모두에 인정을 받았다. 여진족 일족의 구성원들은 12세기에 한자로는 '가고'로 표현되었고 만주족 이름으로는 '기오로'였다. 누르하치는 마침내 명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1619년 사르후에서 명의 첫 원정군을 격퇴하면서 명조 요동 행정수도인 심양을 차지한다. 누르하치는 여진족, 요동에 근거지를 둔 몽골족, 요동에 있던 일반 농부들을 모두 소중히 여겼고 그들을 자신의 정치조직 안으로 통합시키면서 팔기 체제 안으로 끊임없이 편입시켰다. 누르하치의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P140).
홍타이지는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난 뒤 수년간 일족을 교묘히 조종하면서 버일러들 중 칸으로 선출되었다. 1635년에서 1636년 사이 홍타이지는 칸이 다스리는 지역을 제국으로 변형시켰다. 여진족이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아이신 기오로 일족의 공식적인 역사를, 본질적으로 만주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확고히 정립했다(P148). 만주족은 만주 동부에 정착하면서 국호를 청으로 개정했다. 이 때 한군기인은 팔기제도 내에서 만주족과 몽골족의 수를 이미 초과한 상태였다. 홍타이지는 정복한 한족 관리들을 믿지 못하여 행정을 맡을 기인 계층을 양성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만주어와 중국어로 응시할 수 있는 과거 제도를 시행했고 합격 할당제로 5(만주족):5(한족):2(몽골족) 비율을 고수했다. 1669년부터 엘리트 사이 균열이 일어나며 만주족과 몽골족 사이에서, 만주족과 한군기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강희제 현엽은 부친과 달리 어려서부터 정치에 능력을 보이면서, 임기 동안 눈부신 치세를 이루었다. 몽골족은 팔기군에 편입되면서 몽고팔기가 되는데 그들은 만주팔기와 비견할 만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당시에도 중국 내에는 비(非)한족이 많았다. 요족, 장족, 묘족, 동족, 이족, 태족 등은 토착적 색을 가진 민족들이었던 만큼 한족 정권에 맞서 끊임없이 이주와 동화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강희제는 티베트와 중앙아시아 지역과 몽골족의 전략적 결합을 경계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로 인해 티베트는 정치 독립권을 박탈당한다. 몽골 지역이 재편되면서 스텝지대의 몽골족은 청 황실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행정관 직위의 세습을 보장받았고, 혼인동맹을 통해 황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북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갈등의 결과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과 캬흐타 조약(1727)이었다. 양국은 만주 지역에서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확정하고 관세제도를 확립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중국 열풍이 불었다. 중화제국은 유럽의 중산층과 상류층이 높게 평가하는 물건들이 생산되는 원산지로 높게 평가받았다. 건륭제 시대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청에 와서 고문관, 의사, 조정의 건축설계자 겸 화가로 활동했으나 예수회 선교사들의 종교활동은 어느 순간 청 조정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 북미를 안정시키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국내 영향력을 낮추고 아시아산 차 접촉을 통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무역 구조가 재편될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 정부는 매카트니 사절단을 청에 파견였으나 삼궤구고두 문제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런던으로 돌아간다. 이후 토머스 스톤턴 사절단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그들의 임무는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1842년 남경조약을 맺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이 난다. 청이 남경조약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자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재침략하며 청에 대한 배상금을 늘렸다. 여기에 홍수전이 이끄는 태평군의 난까지 벌어지며 청조의 국고는 바닥나고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까지 더해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다.
중국에 살든 대만에 살든 이제 자신을 만주족으로 규정하기로 한 최근의 젊은 세대에 의해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다시 회복되었다. 20세기에 만주족이 겪은 고통은 많은 근대 소수 민족집단이 겪은 공동의 경험이다(P322).
이 책은 누르하치를 비롯한 광서제, 건륭제, 도광제, 자희태후, 푸이 등의 인물을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어떤 입장을 세워놓고 그것에 맞추려하다보면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지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인물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기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늘린다.
또한 짧지 않은 만주족의 역사를 대중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당연히 번역자의 공이 커 보인다. 흐름이 끊기지 않고 부드럽게 읽히는 역사 번역서를 자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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