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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얄타의 딸들

category 리뷰/책 2022. 5. 16. 09:54
얄타회담은 막바지에 이른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 사후 관리, 폴란드 정부 협의, 소련의 전쟁 참전 여부에 대한 의견 교환을 위해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열렸다.
 
회담의 주인공은 연합국의 지도자들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었다.
하지만 이야기 주인공인 얄타의 딸들은 애나 루즈벨트, 사라 처칠, 캐슬린 해리먼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딸이 아니라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던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이 포함되었다.
 
여기서  애버럴 해리먼은 누구일까?
루스벨트는 1941년 2월 애버럴 해리먼을 무기대여 프로그램 책임자로 지명하였다. 무기대여 프로그램은 미국이 영국과 동맹국에게 전쟁 물자를 제공하고 영국은 종전 후 비용을 치르기로 정한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미국이 직접 참전하면서 무기대여 프로그램이 소련에도 제공되었다. 1943년 가을이 되자 해리먼은 루스벨트의 제안에 따라 모스크바 주재 대사 자리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향했고 회담 전까지 이곳에서 근무했다.
 
회담 장소가 얄타로 선정된 것은 스탈린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휴양으로 과거 황실이 소유했던 궁전을 자주 이용했던데다 흑해 연안에 위치한 섬들 중 그나마 덜 파괴된 곳이었고 많은 인원들이 묵을 정도의 수용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43년 11월 이른바 '3거두Big Three'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제2전선을 펼치는 문제를 놓고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졌다. 당시 스탈린의 마음을 사기 위해 루스벨트와 처칠은 런던이나 워싱턴보다 모스크바에 훨씬 가까운 테헤란까지의 고생스러운 여행을 기꺼이 했다. 이번에는 스탈린이 두 사람이 편한 곳으로 오는 것이 공평해 보였다. 두 지도자는 지중해 지역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소련을 벗어나 여행하기에는 자신의 건강이 너무 안 좋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주치의들의 권고를 내세우며 소련 국경 너머에서 회담 갖기를 거절했다. 소련이 동유럽을 거의 장악한 상태에서 서방의 두 지도자는 전후 민주 세계에 대한 비전에서 스탈린보다 잃을 것이 많았다. 스탈린이 서쪽으로 가장 멀리 여행할 수 있는 경계는 흑해였다. 오데사부터 바투미에 이르는 흑해 연안의 여러 장소를 후보지로 검토한 다음 소련 당국과 미국은 얄타와 리바디아 궁전을 최선의 장소로 결론 내렸다. - P19~20
 
캐슬린은 어떻게 회담에 합류하게 된 걸까?
캐슬린은 해리먼의 막내 딸로 위로는 언니 메리가 있었다.
캐슬린의 부모는 그녀가 10살 때 이혼했고, 어머니였던 키티 러니어는 캐슬린이 열일곱 살 때 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에버럴은 마리 노턴과 재혼했는데 캐슬린은 다행히 새어머니하고도 잘 지냈다.
캐슬린은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러시아어를 배워 할 줄 알았다. 또 사업과 정부 일을 맡은 아빠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업 대리 운영을 맡기도 했기에 여러 명사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해리먼 가문은 사업으로 성공하여 엄청난 부를 지녔는데, 부를 과시하지 않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다만 그 절제 기준이라는 것은 당연히 일반인들 기준에는 한참 높은 것이라 생각되기에 논외로 하겠다^^;)
애버럴은 가족과 함께 세계여행도 다니는 등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다. 모스크바에서 해리먼과 15개월을 함께 보냈고 이전에 런던에서 종군기자 생활을 2년 간 하면서 그녀는 얄타 회담에 참석하는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존재였다.
 
런던과 모스크바에서 캐슬린의 생활에는 승마, 사격, 스키가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새어머니는 당시 캐슬린이 '독신'인 점을 염려했지만, 그녀에게는 늘 열렬히 구애하는 남자들이 있었고, 그녀는 2주 전부터 스케줄이 꽉 찰 정도로 많은 남자를 만났다. 캐슬린 정도 나이에 여건을 갖춘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캐슬린은 가정을 꾸리는 것은 나중 일이고,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 P41
 
해리먼과 캐슬린은 크림반도에 도착한 지 3일 후 해리먼은 처칠과 루스벨트를 만나 회담 사전 협의 참여를 위해 몰타로 갔다.
해리먼은 대표단 전 리바디아 궁전의 회담 준비를 캐슬린에게 맡겼다.
 
캐슬린이 리바디아 궁전에 도착해보니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모스크바 호텔에서 자재들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궁전은 벌레와 해충이 들끓고 벼룩과 빈대가 넘쳐났다. 이 때문에 등유에 DDT를 섞은 용액을 가구에 살포하고 침대포에도 DDT 가루를 뿌렸다.
 
캐비아는 작은 도시 사람들 전체가 먹고도 남을 만큼 준비되었지만, 대가족이 사용할 만한 화장실은 부족했다. 해충이 들끓는 얄팍하고도 딱딱한 매트리스는 세계 최고의 호텔에서 공수한 침대보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온갖 극단과 모순이 가득하고, 종종 현실 인식이 안되는 러시아였다. 모스크바 상점 쇼윈도에 전시된 물건들은 행인들을 유혹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살 것이 없었다. 아침 식사에 반주로 마실 샴페인과 캐슬린의 침대 옆 탁자를 장식할 붓꽃, 달리아 같은 사치품은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전투 때 박살 난 대사관저 남쪽과 동쪽 창문 유리를 2년 이상 갈아 끼우지 못할 것이라고는 대사관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 P42
 
사라 처칠은 전쟁 전에 연극 배우의 이력을 갖고 있었는데 연극 극단과 함께 순회공연을 하면서 아빠와 떨어진 시간이 길었다.
사라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연극배우인 빅토르 올리버와 결혼하기 위해 뉴욕으로 도망가자 부녀 사이는 냉랭해졌다. 하지만 전쟁으로 부녀는 관계 회복의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영국 황실 공군의 여성항공대 소속 정찰 장교였기에 2년 간 몰타와 지중해의 항공 사진을 판독하며 근무하고 있었다.윈스턴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 이어 이번에도 그녀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그녀는 똑똑했고 군사와 정치 현안에 이해도가 높았다.
그녀는 근무지인 런던 서쪽의 영국 공군 메드멘햄 기지로부터 특별휴가를 받아 아빠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사라는 예민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또래 소녀들과 활발히 어울리며 우정을 쌓지 못했다. 중요한 메시지는 메모에 적어서 전했다. 다른 가족들이 그녀의 과묵함을 놀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바로 나서서 이들의 말을 가로막고, "사라는 조개처럼 자기 비밀을 내면에 간직하려는 거야"라고 했다. - P56
 
루스벨트는 신체적 제약이 있었기에 주변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테헤란 회담 때는 아들인 엘리엇과 사위인 존 보티거가 그를 수행했으나 이번에는 애나가 선택된 것이다.
애나 루스벨트는 다섯 자녀 중 장녀이자 외동딸로 이전까지 그녀는 아빠를 따라 나선 적이 없었다.
38세의 애나는 세 자녀가 있었다. 증권거래사인 커티스 달과 첫 결혼으로 얻은 10대 딸과 아들, 존과의 두 번째 결혼 후 낳은 아들이었다.
1944년 남편이 북아프리카와 지중해로 군입대하자 애나는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그녀는 출장을 자주 다니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면서 눈에 띄는 명사가 되었다.
 
외모를 떠나서 애나는 편하고 유쾌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 P61
 
몰타에는 미국의 애버럴 해리먼, 해리 홉킨스 대통령 특별 보좌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과 영국 외상 앤서니 이든이 이미 와 있었다.
루스벨트는 2월 2일 미 해군 순양함 퀸시호를 타고 도착했다.
 
루스벨트는 회담 참석 당시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 애나는 그런 루스벨트가 걱정스러웠으나 아빠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자 생각했고, 아빠에게 마음으로 다가서는 마지막 기회를 만들자 생각해서 따라나섰다.
애나는 아빠와 거리감이 있었지만 반대로 루스벨트는 딸 옆에서야 마음이 편했던 모양이다.
 
루스벨트는 애나와 같이 있을 때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애나는 여자로서 "다른 속셈을 품을 줄 모른다"고 루스벨트는 생각했다. 그녀는 가족을 위한 봉사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었고, 특히 가족의 남자들이 차분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데 성심을 다했다.
 
회담의 주요 의제였던 폴란드 정부 처리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자.
애버럴 해리먼은 소련과 서방의 목표가 부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칠과 루스벨트도 마찬가지로 소련 지도자들과의 강한 유대관계의 힘을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해리먼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사업가였기에 기업가나 사업가들에게 하는 방식을 사용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194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의 전력이 약화되고 소련이 접근하면서 폴란드인들은 위기를 감지했다.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도착하기 전 폴란드 저항군은 바르샤바를 해방시키기 위해 8월 1일 봉기했다.
 
처칠은 스탈린에 맞서 영국 공군에게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보급품을 전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해리먼은 당시 4선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던 루스벨트를 설득해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하기 전에 미국이 스탈린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국무부는 다른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그러한 간섭은 앞으로 군사 부문과 국제평화기구 설립에 있어 미-소 협력을 자칫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바르샤바 시민들이 치른 희생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또 하나의 인명 손실에 지나지 않았다. - P89
 
폴란드 저항군은 바르샤바 중심부를 장악했으나 식량과 탄약이 바닥났고 보급품이 떨어진 저항군은 독일군의 사냥감이 되면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해리먼은 심각성을 파악하고 루스벨트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다. 그러는 동안 바르샤바는 계속 파괴되었다. 9월이 되어서야 스탈린은 폴란드를 원조하는 데 동의했으나 바르샤바 인구의 1/4이 이미 희생이 된 상태였다.
 
"대통령은 미국 여론에 영향을 주는 사안을 빼고는 동유럽 상황에 여전히 별 관심이 없었다. 소련이 자신들에게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렸다고 생각하는 문제, 특히 폴란드 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P93
 
바르샤바 봉기 중 수도 없이 시도한 설득이 실패로 돌아가자 해리먼은 루스벨트에게 실망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개진하지는 못했다.
해리먼은 대신 영국 주재 미국 대사 길버트 위넌트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그대로 전달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길버트 위넌트는 회담 대표단에서 누락되었다.
 
캐슬린은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를 처음 만났다.
스탈린은 1944년 10월 모스크바의 발레극장에서 만났었고, 처칠 가족은 이미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자국 대통령을 가장 마지막에 그것도 자국이 아닌 얄타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캐슬린은 회담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파멜라 처칠에게 편지를 보냈다.
파멜라 처칠은 윈스터 처칠의 며느리로 러시아의 정치 사안과 인물들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언니인 메리에게도 자주 편지를 보냈으나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나 심경을 토로한 것이였고 회담 관련 이야기는 파멜라 처칠에게 전했다.  파멜라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회담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뒷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여다볼 수 있다.
 
2월 4일 스탈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그는 코레이즈궁 방공호에서 대표단의 도착 상황을 상세히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첫 일정으로 처칠이 머무는 보론초프 궁전을 방문했다.
처칠은 스탈린에게 독일 전선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으나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이후 스탈린은 리바디아 궁전에서 루스벨트와 회동을 가졌다. 이는 해리먼이 몰로토프와 합의하여 마련된 자리였다.
처칠은 전후 소련 세력이 부상할 것을 경계한 반면 루스벨트는 서방과 소련이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연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도 루스벨트는 이를 강조하였고 스탈린은 전후 프랑스 하의 독일 점령 구역 문제에 대해서 고려가 필요하다고  한 뒤 둘은 대화를 마쳤다.
 
오후5시 3국 대표들이 전체회의를 위해 리바디아 궁전에 모였다.
비로소 연합국 지도자들과 참모들이 진행하는 첫 회의였다
3국의 지도자들 모두 각자의 군대가 독일군을 만나기 전 혼란을 극복할 합동 전략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회의록은 볼런이 기록했다. (볼런은 루스벨트의 통역관으로 자리했지만 미 국무부 내에서 소련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다. )
루스벨트는 낙관적 미래를 그리고 있었으나 볼런은 스탈린이 자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언제든 자기 길을 가는 데 주저함이 없을 거라고 적었다.
 
2월 5일 전체회의는 오후에 리바디아 궁전에서 열렸지만, 매일 열리는 군사회담, 외무장관회담은 세 궁전을 돌아가며 열렸다.
분위기는 유쾌했으나 해리먼은 이런 분위기가 오래 갈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소련의 회담 패턴을 알고 있어서였다.
 
처음에 소련 측은 과도할 정도로 다정하고, 친절하고 협조적이며, 특히 중요성이 크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두 번째 단계에서 분위기는 급격히 바꾼다.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한다.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상대의 입장을 배려했는가를 강조하면서 특정한 입장을 굽히기를 거절하고 무뚝뚝하고 거칠게 나오며 심지어 적대적 태도도 보인다. 그러나 협상이 끝날 때쯤이면 다시 유쾌한 친근감을 보이고 동맹의 힘과 협력 정신에 대한 건배를 거듭하며 축제 같은 분위기로 손님을 보낸다. 소련 대표들은 이런 협상 전술의 대가이고 필요할 때마다 이를 동원했다. - P193
 
오후 전체회의가 진행되었다. 루스벨트는 전날 무척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지만 오늘은 훨씬 나아보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재무장하지 못하도록 독일을 완전히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독일의 역사, 문화, 경계를 연구하지 않은 채 무 자르듯 독일을 분할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루스벨트는 이 문제는 지금 논의할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에 스탈린은 독일 분할에 대한 조항을 독일의 최종 항복 조건에 추가해 넣는 정도로 만족한다고 의견을 피력했고 루스벨트와 처칠도 이에 동의했다.
다음으로 프랑스 점령 지역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프랑스 자체에 관심이 없었지만 프랑스에게 점령 지역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 스탈린은 주변 지역도 점령 지역을 요구할 수 있으므로 강력히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처칠은 프랑스가 독일을 관리하여 서방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야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소련 외무차관인 이반 마이스키가 이 때 나서며 소련이 독일군에 입은 피해가 막심하므로 이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처칠과 루스벨트도 이는 인정했으나 이 문제는 외무장관회의에서 배상 문제를 따로 다루는 것으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스탈린은 자식 중에서는 아무도 회담에 데려오지 않았으나 최측근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데려왔다. 그는 크림타타르를 독일군에게 협력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이주시킨 장본인이었다. 회담장에는 그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도 함께 왔다. 아들인 세르고 베리야가 맡은 역할은 소련 측이 설치한 도청장치를 운영하는 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회담장에서 이 도청장치가 늘 따라다닌다. 미국 측과 영국 측도 소련 도청 가능성을 짐작하고 찾으려 노력했으나 도청장치가 금속제가 아니어서 찾는 데 실패했다.
 
2월 6일 3정상이 평화 진작을 위한 국제기구 구성 문제와 폴란드 주권 문제를 논의하는 동안 세 딸은 흑해 연안의 역사 도시인 세바스토폴을 방문한다.
세 사람은 세바스토폴의 참상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사라는 런던 대공습을 경험했고, 영국 공군에서 항공정찰사진을 분석하며 황폐화된 도시를 많이 봐왔는데도 세바스토폴의 처참한 광경과 인명 피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기자였던 캐슬린과 신문 편집자였던 애나는 그동안의 경험 덕분에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었다.
 
캐슬린과 애나의 편지에는 전쟁 파괴의 범위가 신문처럼 상세히 서술된 반면 사라의 서정시적 관찰에는 감정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사라가 세바스토폴에 대해 엄마에게 쓴 서술은, 아버지 처칠의 설득력 있기로 유명한 산문과 인간 감정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 - P237
 
세 번째 전체회의에서 폴란드 문제가 제기되었다. 스탈린은 폴란드 문제는 소련에게 있어 안보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처칠은 소련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술을 마시고, 약탈하고, 강간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또, 현재 폴란드 루블린 정부는 폴란드 국민의 1/3도 대표하지 못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지난 5백년 간 폴란드가 갈등의 진원지 였다고 말했고 처칠은 이에 이 갈등을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루스벨트는 이날 회담에 불만이 생겨 스탈린에게 편지를 적어서 전달해 스탈린에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는 교회와 학계 인사를 포함해 국가 내 존경받는 폴란드 지도자 두세 명과 루블린 정부 대표 몇 명을 얄타에 오게 하여 루블린 정부와 런던 정부 간 중재자 역할을 맡기자고 한 것이다.
 
캐슬린은 2월 7일자 편지에서 회담의 진정한 전환점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대단한 환희가 있었어"라고 캐슬린은 친구에게 썼다. 그날 오후 회담에 돌파구가 열렸다. 지난해 여름 워싱턴 덤버턴 오크스에서의 회담, 여러 달에 걸친 서신 교환, 그리고 얄타에서 이틀에 걸친 토론 끝에 드디어 "엉클 조(스탈린)에게 덤버턴 오크스를 팔았어"라고 캐슬린은 썼다. - P286
 
루스벨트가 구상한 평화기구에 대한 합의를 방해하는 요인은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소련을 구성하는 16 공화국 각각이 총회에서 한 표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서이다. 그날 오후 협상에서 몰로토프는 그 숫자를 2 또는 3으로 축소했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렀으니 두 나라가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도, 인도 투표권도 주자고 했다. 영국과 미국 측이 몰로토프의 제안을 수용할 뜻을 보이자 스탈린은 평화기구의 안전보장이사회 표결 원칙을 수용하였다.
 
그녀의 요원들은 해리먼 대사의 업적을 그의 매력적이고 예쁜 딸에게 열심히 전달했다. "너도 상상이 가겠지만 애버럴이 투수 역할을 맡았고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는 아주 고무적이야"라고 그녀는 파멜라에게 자랑했다. - P288
 
2월 8일 오후 전체회의에서 폴란드의 자유선거와 전후 독일 문제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스탈린과 처칠의 전투로 루스벨트는 힘이 소진되었고 미국 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자 더욱 상황이 악화되었다.
주치의는 상황을 캐치했으나 루스벨트는 그날 밤 스탈린이 주최하는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고 불참하면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추측한 소련에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생각하여  아픈 척 연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2월 9일 처칠이 폴란드 문제를 두고 스탈린과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세 사람은 마지막 오후를 함께 보낸다.
그날 오후 세 대표단을 최종 선언문에 동의했다.
 
사실 얄타회담은 결론적으로 논의한 것들이 뒤집히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얄타협정의 대부분의 합의를 파기하기 시작했다. 힘들게 만들어진 국제연합기구인 UN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소련은 차례로 동유럽 국가를 집어삼켰고 이들의 자치권을 제대로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소련의 야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국, 베트남, 한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세 여성을 보며 지도자의 딸로서의 모습, 한편으로는 개인으로서의 삶을 생각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버랩된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 제법 많은 것을 얻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일단 지도자의 딸로서의 모습이다.
아무리 그녀들이 한 나라의 지도자인 수장의 딸이었다고 해도 정상들이 모이는 수뇌부 회담에 참석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회담에 참석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재미있다.
결과적으로 세 명의 여성이 회담장에 자리하게 된 것은 굉장한 기회였고 그것은 그녀들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두번째로 개인으로서의 삶이다.
세 여성 모두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개인사들이 있었다.
얽히고설킨 관계는 '아니 뭐야~ 이렇게 연결된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만큼 막장스러운데 또 그녀들은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특히 부녀관계를 이야기안할 수가 없는데 루즈벨트는 회담 참석 전까지 애나와의 관계가 껄끄러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루즈벨트의 내연녀였던 루시가 큰 몫을 했다.
그래도 루즈벨트가 죽기 전에 애나는 아빠로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세 부녀 관계 중 사라와 처칠의 관계는 돋보였다. 회담 이전부터 둘의 관계는 좋았고 처칠이 죽을 때까지 사라는 아빠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쟁 수행 동안 사라는 아버지와 유대관계가 깊어지는 기회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공허했다. 이 때 사라가 만난 사람이 길버트 위넌트다. 영국 주재 미국 대사인 위넌트는 해리먼 부녀처럼 저택에 자주 초대되는 손님이여서 처칠과도 격이 없게 지냈다.
사라는 이전 연애 문제에 대해서 처칠과 상담하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엄마에게는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중에 클레먼타인은 위넌트와 나눈 대화에 대해 막내딸 메리에게 이렇게 썼다. "사라는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얘기를 모르고 있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만 빼면,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려." - P250
사라는 동맹국에 의해서든 전쟁으로 삶이 산산조각 난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희망을 가진 것처럼 전쟁이 끝날 것을 기다리면서 더 많은 기대를 가졌다. 사라는 번번이 감정에 충실하다가 실망했지만, 천성이 그러했고 다른 식으로는 느낄 수 없었다. - P251
 
파멜라 처칠은 애버럴을 처음 만났을 때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애버럴은 49세, 파멜라는 21세였지만, 두 사람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검은 머리, 그을린 피부에 유연하고 운동선수 같은 체구를 한 에버럴은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남자였다. 그는 런던에서 돈이 가장 많은 미국인이었다. 그는 일부러 젠체하지 않고 조용히 사려깊게 말했다. 그의 과묵함은 냉담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그는 단호하게 진지했고, 그가 가끔 짓는 빛나는 미소는 한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수백 만 달러의 비즈니스 거래나 크로켓 경기 등 무슨 일을 하든 성공을 거두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파멜라가 이제까지 본 남자 중에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 P140
 
파멜라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경험이 적었을테니 해리먼이 근사하게 보였을 수 있을 듯하다. 다만 둘의 만남은 뉴욕에 있던 부인 마리에게는 구태의연한 변명일 뿐이었다.
파멜라와 해리먼의 관계는 확고한 관계로 발전했고 캐슬린은 아버지의 사생활을 덮어주기로 한다.  하지만 파멜라가 해리먼과 특별한 관계임은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었고 처칠에게도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해리먼과 마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불편한 감정에 부닥쳤을 때 늘 그랬듯이, 애버럴은 캐슬린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파멜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파멜라가 다시 자리 잡도록 도와줘. 불쌍한 사람이야." - P143
 
아빠의 연애를 받아들인 캐슬린도 놀랍지만 더욱 놀란 것은 애버럴이 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어찌 저럴 수 있지?'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였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한다. 둘 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말이다.
 
루스벨트와 내연녀 루시는 아내인 엘리너 모르게 거의 1년간 관계를 지속했다. 루스벨트는 다시는 루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루시는 부유한 홀아비 윈스럽 러더퍼드와 결혼했으나 루스벨트와 루시는 이후에도 편지를 교환했고 1933년 대통령 취임식 때도 루시를 그 자리에 참석하도록 했다. 
1944년 러더퍼드가 사망하자 루스벨트는 애나에게 묻는다.
 
엘리너는 하이드파크에서 거의 4주를 보내며 자신이 백악관을 떠나 있는 동안 애나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도록 부탁했다. 루스벨트는 "아주 가까운 친구를 만찬에 초대하려는데" 애나는 이 초대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왜 아버지가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는지도 알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손님은 루시였다. - P308
 
애나는 고민 끝에 이 만남에 가교 역할을 한다. 애나와 루스벨트는 이후로 루시와의 만남을 "우정"이라고만 표현했다. 두 사람의 비밀을 지키는 대신 애나는 아빠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이 책은 회담에 참석했던 세 여성이 회담에 참여하게 된 경위와 그녀들의 삶에 주목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얄타회담 뒷 이야기와 회담 이후의 그녀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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