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category 리뷰/책 2022. 4. 29. 13:36
국내 SF 장르 소설에 대한 공급이 많아지고 있다.
높아진 수준에 맞춰 독자들의 기대를 부응하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듯 보인다.
SF 소설 작가로는 천선란 작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김초엽의 대표작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됐다.
 
나는 잡히지 않는 미래와 무언가에 대한 것이 막연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어렸을 적 공상과학, SF 영화 등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여겨졌고 무언가를 그리는 것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아이였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라서 현실에 있는 이야기, 있었던 이야기에는 강한데 그 반대의 이야기는 내겐 어렵다.
 
이 책은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차별과 분리. 감각과 이성. 기억과 그리움. 외로움. 감정의 소유. 엄마와 세계. 실패의 규정.
 
미래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외로움과 그리움, 두려움, 불안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고 만져지는 감각이어서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외곽에는 올리브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에 커다란 얼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것처럼 취급받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개조인이라고 불렀다. 올리브가 보기에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비개조인들은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능이 낮거나, 외모가 흉측하거나, 키가 작고 왜소하거나, 병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분류에 따르면 올리브도 비개조인이었다. - P20
 
일상에서 우리는 차별과 배제, 분리를 늘 경험하고 사는 것 같다.
생김새와 말투, 인종, 장애와 비장애 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우리는 너와 나를 구별하고 타자와 경계를 짓는다.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가? 고도의 문명권에 들어섰다 자부하는 세계인들이 지금 어떤 모습인가 질문하게 되었다.
 
- 스펙트럼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는 너무나 빨리 죽어버리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온전히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 P64
 
희진처럼 나는 수를 다루는 직업이다. 모든 것에 정밀함과 정확성을 요구받는다.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다보니 경계 밖의 것에 대한 모호함을 의식적으로 경계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것이 비단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서 섬뜩해졌다.
 
- 공생가설
 
류드밀라의 행성을 보며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행성 그 자체가 아니라 유년기에 우리를 떠난 그들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 P101
 
나는 한 사람 속에 여러 인격이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내 속에도 수많은 내가 있다. 이 사람에게 표현하는 나, 저 사람에게 표현하는 내가 달라서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싶을 때가 많다.
류드밀라 행성은 우리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리움에 대한 것, 과거로의 회귀. 인간은 그리움이란 감정을 추억 속에 늘 묻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사람들이 딥프리징 기술을 유일한 대안이자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것도 바로 유한한 인간의 시간과 무한한 우주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함이었다. - P116
 
사람을 완전동결시킨다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데 죽고 난 이후의 세상을 나는 알 수 없고 우주는 계속 흘러갈 뿐이다.
우주 행성 간 이동이 가능해진 시대에도 인간의 꿈은 존재할 것이다.
결국 죽음을 향해가는 인간의 유한한 삶에도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자로 잴 수는 없다. 우리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을 것이고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 감정의 물성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 P156
 
누군가를 좋아해서 굿즈를 사본 경험이 많다. 굿즈라는 것은 뜯어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은 그럴 수 있지만 감정도 그럴 수 있을까? 굿즈를 사는 마음을 생각해보니 감정도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내가 하는 행위나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감정의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건가 싶다.
 
- 관내분실
 
스무 살의 엄마,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을 엄마,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을 엄마. 인덱스를 가진 엄마.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춤을 추고, 선과 선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과 목소리와 형상을 가진 엄마. - P194
 
어떤 자식도 엄마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특히 엄마와 딸은.
결혼하기 전이었나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때의 엄마는 정말 그 자체로 빛이 나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의 관계가 가깝든 멀든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늘 간과하곤 사는 것 같다. 늘 뒤늦게 후회하고 자책하며 엄마를 찾을 때쯤 엄마는 없지 않는지 묻게 된다.
 
-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물질은 터널을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제 형체대로는 아니다. 양자 통신 시스템은 완전히 형체를 잃은 물질이 질량만을 유지한 채로 우주 어딘가에 도달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물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 P213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 P225
 
기준을 벗어난다는 것은 실패인가. 시스템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정상이고 다수자의 생각이 옳은가.
기준을 벗어나고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는 데 도전한다는 것, 그것이 실패라고 간주된다면 지금 우리 뒤를 밟아온 선조들의 삶은 무엇인가 곱씹게 된다.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고 해방구를 찾았던 많은 이들의 삶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냉전과 새마을  (0) 2022.05.16
[책]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  (0) 2022.05.02
[책] 엔드 오브 타임  (0) 2022.04.28
[책] 레이디 크레딧  (0) 2022.04.28
[책] 에릭 홉스봄 평전  (0) 2022.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