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시작한 한국근대사산책 읽기. 작년 말 8권까지 읽고 근 3개월 가까이 정신없는 통에 쉬다가 9권을 집어들었다. 꽤 시일이 지났기에 흐름이 끊겼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으나 다행히 이전에 읽은 내용이 날아간 것은 아니라서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9권은 1930년대의 문화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정말 술술 읽혔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당시로 들어가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되어 그곳을 거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재미나게 읽었다. 특히 나는 1930년대 여성문화와 소비문화가 흥미로웠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모던열풍이 불어닥치는 시대이다. 나는 예전에 나라를 빼앗긴 국민들이 왜 나라를 되찾을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않고 자신을 꾸미거나 과장된 태도나 행동을 일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1]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에 이루어진 세대교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1910년대 후반에 태어나 3·1운동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고 일본식 신교육을 받으며 자란 전형적인 식민지 세대가 스무살이 되니, 이들이 느끼는 나라 빼앗긴 서러움은 그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강도였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수탈, 봉기, 억압 같은 말보다 카페, 유성기, 단성사 같은 말이 훨씬 익숙했을 것이다.
[12] 구세대는 여전히 조선 말기의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양반계급이 그랬다.
당시도 혼란스러웠던 문화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것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로 이전 세대들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1910년대 이후 태어나서 20년이 지난 세대의 젊은 남녀들은 이를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당시의 문화인 카페, 극장, 라디오 이런 것들이 수탈, 봉기, 억압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익숙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세대들은 여전히 양반과 평민-천민간의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었다.
두 번째로는 현모양처의 개념이 새롭게 다가왔다. 사실 나는 현모양처 하면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사회적 활동은 하지 않고 집에서 가족들을 챙기는 전형적인 주부로서의 역할이 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남자들과 다르게 보거나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거나 편견을 당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일제 강점기 등장했을 당시에는 오히려 여성 해방의 담론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주체적인 역할로서의 여성의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태평양전쟁을 발발시키기 위해 전시체제가 되면서 그것이 내선일체의 이데올로기에 흡수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59] 현모양처 사상은 서구에서 18세기경 자본주의화에 의한 근대 가족이 나타나면서 공사영역의 분리와 함께 형성된 것으로, 한국에선 일제강점기에 본격 유행하였다.
박선미는 현모양처라는 개념은 원래 지금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케케묵은 전통적 여성관이 아니라 ‘근대적 여성관’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현모양처론의 수입 통로인 여자 일본 유학생에 주목했다. 그들이 배워온 ‘가정학’은 합리적인 의식 생활과 과학적인 육아, 동반자적 부부관계 등 근대 서구적 가족관을 조선 사회에 퍼뜨리는 데 큰 구실을 했으며, 현모양처론은 전통 사회에서 자손 생산, 가사일, 시부모 봉양, 제사 준비 등의 역할에 머물렀던 ‘며느리’로서의 여성을 해방시켜 ‘자녀교육자(어머니)’ ‘내조자(아내)’ ‘가정책임자(주부)’라는 주체적인 역할로 새롭게 정의하는 담론이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커피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 전 『가비』라는 영화를 보면서 이전 커피에 대한 문화 배경을 익혀서인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고종이 쓴 커피를 그리 좋아했던 이유도 당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커피의 쓴 맛 때문이었던 것처럼 일반 민중 또한 그랬을 거라 짐작해본다.
[181] 1941년 들어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설탕, 커피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쇠퇴 일로를 걸어 2차 대전 말기에는 다방이 거의 폐업 상태에 들어갔다.
‘아편처럼 진한 커피’라는 말이 식민지배를 받는 나라의 지식인들의 슬픈 운명을 암시한다. 커피라도 아편 대용으로 간주하지 않았더라면 견뎌내기 어려웠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커피로 ‘근대’의 기분을 내면서 그걸 매개로 지식인들끼리 다방에 모여 앉아 은밀하게나마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다변(多變)의 향연을 벌이면서 ‘다방의 푸른 꿈’을 꾸었다면, 커피를 ‘모던 보이’ ‘모던 걸’의 허영이라기보다는 한의 음료였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화신백화점과 동아백화점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당시에도 고위층의 전유물이었던 백화점이었지만 고객 유치를 위해 그리도 치열한 경쟁을 했다니 새삼 놀랍다. 이제는 모두 이름이 사라지고 없지만 백화점이 있던 자리를 지나갈 때면 당시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199] 백화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백화점들 사이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209] 백화점은 일반 민중에겐 볼거리였다. 그래서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에도 포함되었다.
다섯 번 째로 서북인들과 기호인들간의 대립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윤치호의 말처럼 서로 똘똘 뭉쳐도 모자를 판에 지배계층이었던 기호인들과 서북인들은 물어뜯고 싸우기 바빴으니 말이다. 이것이 나중에 이어져서 해방 후에도, 분단이 되어서도 여전히 갈등구조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나 있었을까.
[305] “이조 500년 동안 서북인들은 정치적 박대와 모욕적인 차별을 받아왔다. 서북인들이 기호인들, 특히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던 기호인들을 증오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복수심을 실천에 옮길 때인가? 조선인 모두가 자기의 적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언제쯤 단결된 민족이 되겠는가?”
[309] 당시 지역갈등의 주요 동력은 신분제의 붕괴와 그에 따른 새로운 헤게모니 투쟁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의 교육 문제는 당시부터 이미 시작했다는 것이 씁쓸해진다. 우리는 왜 그리 빨리 빨리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어떻게든 빨리 익히고 배워서 무엇을 그리 얻을 것인지. 요즘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것은 교육 환경이 개선된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이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남들보다 뒤처지고 모자르다고 흉보거나 깔보는 것, 그리고 남들 수준에 따라가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생각들은 이제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의 고유성을 존중해주고 아이가 잘할 수 있는 것,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부모는 조용히 따라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39]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공적 영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게 사적 영역이었다. 교육을 받고 공직을 추구하는 것도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그건 당연한 처세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전통·관행·의식으로 굳어져 오늘의 한국 교육마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조기유학’ 붐이나 ‘기러기 아빠’ 현상은 개척적인 진취성이라고 하는 점에선 긍정평가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교육적 전통·관행·의식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40] 한국은 ‘각개약진 사회’, 한국 교육은 ‘각개약진 교육’이다. 한국에서 심심하면 벌어지는 집단적 열광이나 분노의 비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집단적 열광과 분노는 각개약진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한 집단주의 축제다.
한국의 각개약진 문화엔 명암이 있다. 그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을 이뤄낸 원동력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문제를 개인과 가족 단위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구성원 개개인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피곤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당연히 행복도도 매우 낮다. 각개약진할 때 하더라도 이젠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는 슬기가 필요하다 하겠다.
9권에서는 유난히 소설 속 대사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문학적 배경이 문화를 소재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경희」, 「어느 반일의 기록」, 「구보씨의 일과」, 「천변 풍경」, 「농군」, 「심장없는 기차」, 시 「노라」 등은 시간을 내서 간간히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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