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편에서는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를 다루었다.
나는 일제가 시행했던 산미증식계획과 만주 이민 붐으로 금광 채굴을 이용해 이득하려 했던 것, 간도에 한국인 자치 지구를 만들고 일제에 충성하기 위한 단체인 민생단을 만들었다는 것,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로 김구는 상대적으로 이득을 봤다는 것, 비정규 전투 부대였던 빨치산이라는 단어가 러시아어 partizan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제는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으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과연 일제의 전쟁 광기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니 그 당시 세계적인 전쟁 광기를 현재의 우리는 어떤 인식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황국신민화 운동을 위해 조선 내 신사를 만들고 고꾸고(일본어)를 학교 내에서 교육하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를 현재 일본의 후손들은 관심이나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조선을 35년간 지배하면서 그 후로도 주장하는 조선이 반도기질 특성을 가지고 있어 불합리하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수용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그 일본식민사관을 넘어 긍정적 의미로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진지하게 물어보게 됐다.
[20] 전쟁이 잔인한 건가?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잔인한 거지. 전쟁에 쓸 말을 먹이기 위해 사람을 굶게 만드는 일제의 광기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 전쟁도 전쟁을 위해 모든 것에 몰두했던 일제도 잔인하다.
[22] 일제의 야수적 탄압과 함께 코민테른의 부당한 전제적 독재와 자율성을 상실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에 대한 사대적 굴종이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비극을 낳은 것이었다.
-> 코민테른을 향한 맹목적인 사대존중을 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희극이 될 수 있었을까?
[34] 오보로 폭동을 촉발하게 된 『조선일보』는 재만동포의 옹호를 위해서는 재조선 중국인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처음부터 신중하게 보도한 『동아일보』 역시 이 사건에는 조·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려는 음모가 숨어있다면서 흥분한 대중들에게 자제를 촉구했다. 만보산 사건으로 재만동포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오보임이 밝혀지고, 그런 폭동 자제 호소가 먹혀들어가 7월 7일부터 폭동의 기세는 꺾여 7월 10일에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피터지는 경쟁 구도에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커진 일본에 제대로 놀아난 만보산 사건.
[40] 1931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는 만보산 사건이 유발한 국내 사태로 중국인이 100여 명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소상히 발표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은 만주와 중국에서 다시 박해를 받게 됐으며, 일본 관동군은 만주 거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을 시작했다. 9월 18일 밤 일본군은 봉천 교ㅎ외의 유조호 부근에서 남만주 철도의 일부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며 공격을 게시했다.
-> 일본의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만주사변, 일본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만주를 감시하니 재외 만주 교포들의 피해는 가중되기만 했다.
[64] 윤봉길의 의거는 상하이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 민족 운동가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불러왔다. 임시정부도 이후 호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거사 직후 임시정부는 긴급히 항저우로 피신했으며, 이후 난징, 우한,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양, 쭌이, 치장을 거쳐서 1940년 중국 내륙도시 충칭에 안착하기까지 내내 피난길에 올랐다.
-> 임시정부의 수도 이전은 윤봉길 의거의 결과물이었다.
[73] 김성호는 “지금까지 조선 민족학자들의 민생단 연구는 조선인들이 박해받게 된 객관적 원인과 피해상황만을 강조하고, 조선인 자체의 문제는 거의 모두 외면하고 있다”며 조선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①조선 민족 항일혁명투쟁 역사를 전체적으로 부정당하면서도 그것을 반박, 규정하지 못했다. ②자기보호와 지나친 자기과시를 위해 동족 동지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타격하고 더욱 잔혹하게 투쟁하는 경향이 많았다. ③자기보호를 위해 진정한 혁명동지마저 보호하지 못했다 등 세 가지를 들었다.
-> 조선민족학자들의 민생단 연구는 조선인 자체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
[82] 왜 갑자기 금광풍이 불었던 것일까? 그건 금값이 올랐기 때문이고 금값이 오른 것은 1930년 1월 일제가 13년간 이탈했던 금본위제로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돈을 풀고, 금 채굴을 장려하기 위해 금광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생산된 금은 고가에 매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일제의 금본위제 복귀로 조선에 불어닥친 골드러쉬
[125] 출판 분야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1939년 월간 『신세기』가 선정한 추천 도서 42종 중 6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소설과 시, 평론이었다. 바로 이해부터 문고시대가 열렸다. 학예사가 『조선문고』를 처음 발행한 데 이어, 한달 뒤 박문서관의 『박문문고』, 이어서 광한서림의 『현대문고』가 나와 문예부흥과 학예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 조선 문고시대의 기원
[128] 역사소설의 호황과 관련, 김윤식·정호웅은 “식민지배 체제가 확고하게 굳어지면서 독립에 대한 열정이 둔화되고 위축”되었던 바, “상상력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보장되는 과거로 퇴행했던 것”으로 보았다.
-> 역사소설이 호황을 누린 이유
[134] 천정환은 “카프의 한계나 모순은, ‘문학’에 근거한 ‘정치’ 조직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두 항을 하나로 통일시킴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며 “일제시기의 문학은 일본의 억압기구가 그어놓은 금안에서만 ‘문학’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고 했다.
-> 카프의 한계와 모순
[147] 박헌호는 이상의 분노는 ‘미적인 영역에서의 선구자로서의 의식 때문’이라며 이상을 비롯한 구인회 작가들은 ‘미적 영역에서 근대성을 추구했던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태준의 문장에 대한 집착, 박태원의 기법에 대한 자의식, 김기림의 시론과 작품들이 보여주는 모더니티에 대한 갈망은 예술의 영역에서 근대적인 것을 달성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이들이 표현론적 문학관에 의거했다든지, 문학은 ’제작되는 것‘이라는 의식을 견지했다든지,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적 개성‘을 중요시했다든지 하는 것들이 이를 보여준다.
-> 구인회 작가들이 문학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들
[160] 보통학교 입시경쟁도 치열해져, 『동아일보』(1935년 2월 17일자)는 보통학교 입학 아동을 위한 시험공부로 어머니와 자식 간의 문답 형식의 예상문제를 게재하기도 했다. 먼 훗날 유행하는 한국 신문들의 ‘입시 장사’의 원조인 셈이다.
-> 현재까지 이어지는 입시 경쟁 장삿속
[161] 우생학을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당시의 우생학 열풍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우생학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악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되었다.
-> 우생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을 유전적으로 개량하기 위한 목표로 연구를 하는 학문이었다. 당시의 세계는 과학과 기술이 최고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자연스레 우생학은 따라올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173] 2007년 4월,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승철은 “민세를 좌우의 가운데 섰던 중간자적 존재로서만 오늘날 그를 거론하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다. 민세가 얘기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담긴 정신은 시간과 공간 개념을 도입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을 제대로 모르고 모두 그의 그림자만 쫓고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
[222] 사실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의 사진을 먼저 게재한 신문은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였다. 8월 13일자 지상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하였는데, 이 사진은 선명치 않아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가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말소한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여 사건이 터지면서 알려져 『조선중앙일보』도 무기 정간을 당하게 되었다.
-> 일제는 손기정에게 일장기를 달게 하고 마라톤을 뛰게 했고 단상 위에 가슴에 박힌 일장기를 말소시켜 게재한 두 신문은 무기 정간을 당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284] 1937년 6월,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일본 육군성은 조선군 사령부에 조선인의 병역 문제에 대한 의견 제출을 요구했다. 한윤정은 “강제로 지배해온 적성민족의 청년에게 총을 건네주고 함께 생활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상황에 따라 원하지 않는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데려가는 징병제를 실시해야 할 판이었다,”
-> 일제의 징병제 실시는 군사 교육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을 전장에 내몰아도 과연 일본인들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을 것인가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을 뼛속까지 황국 신민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당시 조선에 역사소설의 흥행으로 소설 「임꺽정」의 인기가 최고였다고 하는데 드라마를 보기는 했어도 책을 읽어보지는 못해서 읽어보고 싶어졌고 고현학(인류 현재에 대한 기록을 표현하는 학문)의 대표주자였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삼국지」,도 접하고 싶어졌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계속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인물인 윤치호에 대해서 알고 싶어 「윤치호의 일기」를 언젠가 접해볼 것이다.
지식의 확장은 참으로 즐겁다. 이제 한국 독립운동사에 관한 내용도 9권과 10권이 남아있다. 나머지 두 권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 갈 것이다.
'리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0) | 2012.01.22 |
---|---|
2011년 독서 목록 정리 (0) | 2011.12.31 |
[책] 한국근대사산책 7권 (0) | 2011.12.20 |
[책] 스키너의 심리상자열기 (0) | 2011.12.12 |
[책] 마틴 셀리그만의 플로리시 (0) | 2011.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