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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작별하지 않는다

category 리뷰/책 2024. 12. 31. 18:31
 
작별하지 않는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고 2018년 『흰』으로 같은 상 최종 후보에 오른 한강 작가의 5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출간되었다. 201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전반부를 연재하면서부터 큰 관심을 모았고, 그뒤 일 년여에 걸쳐 후반부를 집필하고 또 전체를 공들여 다듬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본래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201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작별」(2018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을 잇는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되었으나 그 자체 완결된 작품의 형태로 엮이게 된바, 한강 작가의 문학적 궤적에서 『작별하지 않는다』가 지니는 각별한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이로써 『소년이 온다』(2014), 『흰』(2016), ‘눈’ 연작(2015, 2017) 등 근작들을 통해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고투와 존엄을 그려온 한강 문학이 다다른 눈부신 현재를 또렷한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지 않은 비극적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길어올린, 그럼에도 인간을 끝내 인간이게 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가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이미지와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에 실려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저자
한강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1.09.09



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공간에 과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헤아려본 일이 없다. 우리 동네에 이사오기 전 생각했던 과거는 불과 몇 십년 전의 불쾌한 일로 연루되었던 어떤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더 과거, 더 이전의 과거에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은 어쩌면 자료를 찾기 전에는 헤아리기 어려울지 모른다. 물론 자료가 남아 있다 해도 일부만 복원할 수 있을 뿐이지 온전한 복원은 불가능하겠지만. 찍으면 영상이 되는 현재와 달리 사진조차 사치였던 시기가 있었고, 있었다 해도 찍히면 문제가 될지 모른다는 강박을 가져야 했던 엄혹한 시절도 있었다.

2024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여러 모로 국가적으로 큰 기쁨이었다. 개인적으로도 2024년 마무리를 하며 한강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어서 영광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세 번째로 읽는 한강 작가의 책인데 <소년이 온다>만큼이나 좋았다. 

이 책이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읽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었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느꼈지만 이 책도 참혹했던 과거의 사건을 현재를 사는 사람의 시선으로 잘 보여준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잘 만져지지 않는 물체처럼 흐릿한 부분도 있는데 그런 모호함이 한강 작가의 문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1948년부터 한국전쟁 이후 1954년까지 제주도는 참혹한 현장이 되었다. 제주에 소개령이 내려지고 해변을 불태우자 주민들은 살기 위해 산을 올랐다. 전쟁이 터진 해 여름에 대구에서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구형무소에 수용되었다. 매일 수백 명씩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자 기존의 재소자들은 총살당한다. 사망자들 중에는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 이외에 제주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놀라움을 넘어선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1942년 폐광된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대구형무소 재소자, 대구 보도연맹 가입자, 경북 지역 가입자 등 3500여명이 총살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제주는 최근 들어 여행을 여러 번 한 곳이다. 코로나 전후로 한동안 해외 여행은 가기 어려웠기도 했고, 가족들과 여행을 가기에 그만한 곳이 없기도 했다. 

두 시간 전 내가 몸을 실었던 비행기는 몹시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뉴스로만 들었던 윈드 시어 현상 같았다. 활주로를 미끄러져 달리는 비행기의 속도가 차츰 줄어드는 동안, 통로 건너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스마트폰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우리 다음 비행기부터 전부 결항이야.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대꾸했다. 우리가 운이 좋았네.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야, 이래가지고.

몇년 전 겨울, 제주에도 폭설이 내린 적이 있었다. 우리가 공항에 내리고 나서 바로 다음 항공기들부터 결항 소식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우리는 산간에 갈 일은 없었으나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참 쉽지 않았었다. 제주에도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제주의 겨울이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오돌오돌 떨면서 여행을 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 벌판에 눈이 내린다.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발등까지 물에 잠긴 내가 놀라 뒤돌아본다. 바다가, 거기 바다가 밀려 들어온다.

습기가 가득한 눈이 벌판 위, 바다 위에 나리는 풍경을 이처럼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꿈인듯 현실인듯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분명히 두 갈래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폭이 다른 세 개의 길이 숲 사이로 희끗하게 드러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주인공은 눈 속에서 길을 헤맨다. 혼란스러움 때문에 나도 읽으면서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 독일 여행을 갔을 때 고성을 올랐다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그때의 공포와 불안이 밀려왔던 것이다. 주인공이 겪은 이후의 장면들은 섬뜩했다.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 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 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

나의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언제 죽을지 몰라 주변을 미리 정리하고 유서를 적는 일이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더는 그런 생각을 갖지 않게 되었다. 
올해 아버지의 병환, 시아주버님의 사망으로 참 힘겨웠다. 더군다나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 이 책의 내용은 그저 과거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쓰고 싸우자고 작가가 말해주어 고마웠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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