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역사는 인간의 의미, 인생의 의미를 해명해온 역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이해는 곧 세계 인식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 P709~710
철학적 사유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유해왔다. 이는 곧 윤리, 정치, 법 등에 대한 사유를 뜻한다. - P715
작년 말 세웠던 큰 계획 중 하나였던 세계철학사 시리즈를 4권을 마무리하면서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끝낼 수 있어 참 다행이다.
3권에서 근대성을 비롯한 칸트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었다면 4권은 근대성을 진단, 비판하는 것(탈-근대)에서 나아가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 다양한 현대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근대 철학의 본질주의와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극복을 위해 꺼내든 탈-근대적 사유들(근대 철학의 본질주의 및 결정론을 극복하면서 전개된 생성존재론, 근대적 실증주의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해나간 규약주의 이래의 여러 인식론과 합리주의적 형이상학, 인간존재를 둘러싼 현상학, 구조주의, 생명철학 등 여러 결의 참신한 시각들, 그리고 유난히 어두웠던 20세기의 현실에 부딪쳐나가면서 전개된 여러 실천적 철학들 - P7)이 탄생하였다.
생성존재론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실재로 보고 결정론적 관점에서 벗어나 ‘우연’ 개념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면서 형이상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생성존재론의 대표 주자는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은 피상적 현실에서 이성을 통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에 의해 생성이 폄하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연속적으로 생성되는 실재라는 것이다.
이후 들뢰즈와 바디우가 사건의 철학을 들고 나왔다. 사건의 철학이란 사건 개념을 사물 개념과, 사실, 사태, 사고 같은 개념들과 구분하는 작업이다.
들뢰즈는 사건과 의미 사이의 연계성을 언어적 관점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는 사건(표현된 명제=의미)은 맥락에 따라 성립되고 자연과 역사 사이에 구분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바디우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사유가 중요하며 자연과 역사, 존재와 사건 간에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주장했다.
철학이 분화되어 나올 무렵 과학도 사회과학, 자연과학으로 분화되었다. 실증주의는 근대 문명의 성격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론에는 증명(실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합리주의는 과학적인 성과가 쏟아져 나오면서 다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확장되는 합리성에 대한 비판으로 생철학, 의철학, 정신과학 등이 등장한다.
분석철학은 논리적이고 언어적인 분석에 의한 형식성을 중요시했으며 앞선 생성존재론과 대척점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를 형식화하려는 앞선 시도를 논리학에 의해 참/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표로 만들었다(그 많은 일상 언어를 표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러셀은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얻은 경험 데이터가 하나의 사실이 된다고 말했다.
이제 ‘경험적 주체’와 ‘선험적 주체’를 둘러싼 다양한 사유를 펼친 현상학을 말할 때가 되었다.
후설은 현상학의 포문을 연 철학자이다. 그는 사물이 가진 실재성과 존재론적 가치를 현상에 부여하고 직관이 모든 인식의 기본 바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에서 이념적인 것을 구분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했다. 후설이 생각한 인식은 자기를 초월해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의식이다.
하이데거는 당대를 거슬러 존재를 사유하고 존재와 인간의 관련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에게 ‘존재자’라는 개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케 하지만, 존재자가 드러나는 그 순간 스스로는 그 드러남 아래로 숨는다(P382).
사르트르는 개념을 파기하고 주체가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를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만나고 나면 그의 철학은 ‘자유’적 대자존재에서 책임이라는 키워드를 더하게 된다.
구조주의는 합리주의의 또 하나의 형태로 데카르트의 이원적 구도를 삼원적 구도로 변화하는 시도였다. 현상이 실재(계)라면 구조(이미지)는 상상계(추상/상징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언어를 통한 의미를 계열화(수직화)하고 타인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라캉은 철학에 정신분석학적 인간 이해를 도입한 학자다. 그는 기호와 기표를 분명하게 구분했는데 기호는 누군가를 향해 무엇인가를 대리하는 것이고, 기표는 무엇인가를 향해 누군가를 대리하는 것이다(P461). 그는 거울 효과를 통해 우리는 자기 안의 타자성을 발견해야 하며 주체의 이중성과 욕망의 이중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셸 푸코의 타자의 사유는 배제의 역학을 파헤쳐서 지식, 권력, 주체의 역사를 인식하고자 했다. 푸코는 배제, 감금, 수용 등의 구조를 통해 지식-권력의 관계를 분석해내고 주체의 존재, 행위가 문제화되는 순간에 대해 밝히려 노력했다. 레비나스는 포로수용소에서 생환한 기억 때문에 누구보다도 타자에 천착한 철학자였다. 그는 참혹한 비극 속에서 신체(에서 비롯되는 욕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설파했고 나아가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사유를 강조한다. 데리다는 유대인이어서 사유하고 저항했지만 자신에게 존재하는 배타성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차별점을 나타냈다.
20세기 정치철학은 세 갈래로 분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인류의 기본 인권 신장과 물질적 풍요의 증진에 큰 공헌을 했고, 스스로의 위기를 도전정신과 창의력으로 돌파해나가는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정성, 경제적인 것에 의한 사회적인 것의 파괴, 그리고 제국주의적 정복과 전쟁이라는 문제점들을 노정하곤 했다. 이런 폐해를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 특히 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평등을 지향하고,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실제 착취당하는 무산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곳곳에서 심각한 참극을 야기했고, 무엇보다 권력의 집중에 의한 각종 폐해를 낳기에 이른다(P615~616). 민족주의는 가시적이고 ‘자연적’/‘본능적’인 성격을 띠기에 일반 대중에게는 더 가까이 다가온 이념이었다. 근대 국민국가가 상당수 민족국가였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아래에서 실제 움직였던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또한 국가주의였다는 점이 핵심이다. 민족주의가 국가권력, 군사적 권력에 의해 장악될 때 파시즘이 등장한다. 파시즘의 경험은 특히 극악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때로 민족주의가 긍정적 힘을 발휘하기도 했는데, 이는 제국주의적 저항이라는 상황에서 피지배 민족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민족주의이다(P617-618).
4권은 특히나 현대를 이끈 정치 철학의 흐름까지 함께 엮어서 보니 세계 정치사적 흐름과 연관지어 확인할 수 있어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베르그송과 계몽 비판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전체주의 비판의 한나 아렌트, 마르크스를 소환한 데리다, 그 반대편에 있었던 후쿠야마의 철학을 비교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와 스피박도 언젠가는. 이 중 하나라도 파고드는 철학자가 나타날 수 있기를.
철학사의 흐름을 훓어보면서 내가 이론에 많이 취약하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했다. 아무래도 이론적 철학보다 실천 철학에 더 무게추가 기울 수밖에 없었는데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는 어떤 사태를 보든 현실성이 중요하다 생각하나는 나의 성향과도 연결된다. 철학(자들)을 만나는 일은 결국 내가 어디에 더 관심을 가지는지 들여다보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탈근대 사유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세계철학사 시리즈 읽기를 마무리한다. 결코 이해했다고 볼 수 없고 한 번 훓어보고 개념을 정리한다는 측면이라고 볼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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