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주의'란 무엇인가. 영어에서 마오주의자 또는 마오주의란 두 용어는 미국에서 냉전시기 중국을 분석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외부 위협을 의미하는 '붉은 중국'을 유형화하고 정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것은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일원화된 권력에 의한 억압의 광기로 간주되던 모든 것들을 일축하는 포괄적인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본서에서 말하는 '마오주의'는 지난 80년 이래로 마오쩌둥과 그의 영향력에 기인하는 광범위한 이론과 실천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다(P20). 책을 주문하면서도 그랬지만 책을 받고 나서도 저자가 과거 서구가 바라보는 중국, 그러니까 냉전적 시각에 의한 마오주의를 다룰까봐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저자도 밝히듯 책은 후자적 방향으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이에 더 관심이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저자는 마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영향력에 대해 부인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책은 중국 혁명의 역사와 영향(과 평가)으로서의 마오주의를 다루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인 국제 공산주의는 무너졌지만 중국은 살아남았다. 그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고 마오주의가 있다. 마오주의는 끝내 살아남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공산권에 영향을 미쳤고 자국 내 신마오주의가 부활함으로써 그 영향력은 지속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기존에 퍼져 있던 마오주의에 대한 분석은 빠져 있거나 왜곡된 이야기가 많다고 이야기하며, 가장 큰 문제는 마오주의를 글로벌적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 진단한다.
마오주의의 시작은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저작에서부터다. 그가 없었다면 중국 내외의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상상하기 힘들다. 스노는 이른 시기부터 중국공산당을 국제적인 홍보의 천재로 조명했고, 마오쩌둥의 사상과 실제 성격과는 다른 그의 페르소나를 묘사하여 국경과 언어, 계층을 넘어 전 세계의 추종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중산 기득권층의 성장 배경에서 자란 그는 프리랜서 기자로 돈을 벌기 위해 1928년 상하이에 입국했다. 초반에는 중국에서 어렵게 지내다가, 1930년대 초 들어 쑹칭링(쑨원의 부인)을 만난 것을 기회로 삼아 이후 중국 정치계 인물들을 두루 만나게 된다. '중국의 붉은 별'에는 스노가 공산당 근거지로 잠입하는 과정과 중국공산당의 생존을 위한 투쟁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중국공산당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루며 좋은 이미지를 확산시켰다는 것이 중요하다. 저작에는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옹호를 넘어선 추종도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이름을 높여가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것은 정풍운동 때문이다. 1942년 정풍운동은 문화대혁명의 전신이라 불리는데 형태를 보면 문화대혁명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이 1941년 공산당 최고 영도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당내 기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격 목표를 고립시키고 왕년의 동료들을 비판 공격에 가담하도록 권유하며, 대중집회(중국의 군사적 용어로 말하자면 비판투쟁대회이다)를 개최하여 공개적으로 '적'에게 굴욕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고, 강제적으로 대중의 집단적 조롱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풍운동'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인간조작 시도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1950년대 미국은 이런 운동을 '세뇌'라고 불렀고, 중국은 이를 '사상개조'라고 불렀다(P69).
1950년대 중국과 세계는 '세뇌'와 '도미노 이론'으로 대표할 수 있겠다.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미국은 한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되면 다른 나라도 연쇄적으로 공산주의가 팽창하며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도미노 이론'을 펼치며 색깔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세뇌'는 에드워드 헌터가 지은 두 권의 저작인 '붉은 중국의 세뇌(1951)', '세뇌: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1956)'로 대표된다. "중국이 자유 세계를 향해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에드거 스노에 이어 에드워드 헌터의 저작으로 마오주의는 강화될 수 있었다.
중소 갈등은 냉전을 앞당겼고,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근절하기 위해 급진적인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대기근으로 스스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자신의 정적이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끌어내리며 피바람을 일으켰다.
1960년대 중국의 국내 선전 매체에는 세계 혁명에 대한 언급으로 넘쳐났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심지어 음악과 수학 교과서, 연극과 보드게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도자가 세계 혁명의 공동체를 영도하는 형상으로 가득찼다. 1960년대 중반에 성인이 된 세대는 특히 이런 선전을 잘 받아들였다. 중국 신문 및 방송 매체는 도처에서 그들 부모 세대가 참전하여 누렸던 영광스러운 군사적 희생(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그들도 놓칠 이유가 없으며 세계 무장투쟁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저자는 마오주의가 세계적 보편성을 표방했으나 단지, 지역성을 띤 국제화 형식이었다 말하며 이를 '고등 마오주의'라고 말한다. 당시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나의 부모님도 전후 세대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한 것에 대해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아직도 어릴 적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전쟁과 이념에 대한 색깔론을 소리 높여 들을 때가 악몽처럼 떠오르곤 한다.
마오주의의 영향력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도 이어졌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토지개혁과 비슷한 개혁을 실시했으나,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사회적인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에 중국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제네바 협정에서 중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를 꺼렸던 미국이 베트남 공산당의 통일화 연기를 미루도록 설득하여 베트남 분단이 확정되도록 만들었다. 1960년대 들어서 중국의 국내 정책(문화 대혁명 등)에 의구심을 품은 베트남은 중국과 갈등하게 되고, 이는 양국이 미국과 화해를 시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1975년, 크메르 루주(캄푸치아공산당)의 총서기인 폴포트와 회견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 지휘부는 모든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으로 소개시켰으며(그 과정에서 프놈펜에서만 약 2만여 명을 즉결 처형했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화폐와 시장을 폐지하고, 집단화를 강제했다. 중국은 캄보디아를 베트남에 대항할 국가 세력으로 간주하여 크메르루주의 행동을 용인했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만들었다. 이후 크메르루주는 1977년 베트남과 관계를 단절한다.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 학살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과 미국이 개입했다. 공산주의자 동조자명단을 인도네시아 군부에 넘기고 준군사조직인 암살단에 자금을 지원하며, 왜곡된 선전 방송으로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공포와 혐오를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때 인도네시아 국내 학살은 은폐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정당 방위로 벌인 일임이 강조되었다. 학살 전 인도네시아 사회는 군부와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이 양극화로 인해 민간인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폭력은 더 극성스러웠다. 1년 동안 군대와 민병대의 폭력으로 인해 최소 50여만 명이 사망했다는데, 장소만 다르지 한국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기에 씁쓸함이 일었다.
남아시아의 마오주의 현상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전 세계 마오주의에 대한 이미지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선 그 사상이 국경, 민족, 언어, 사회를 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놀라운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남아시아에서 문화대혁명의 이론과 실천은 국가와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 남아시아에서 마오주의는 인도 사회의 카스트제도와 인종차별에 적응해야만 했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마오주의 정치는 사회 저변의 불만과 결합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마오주의자들은 탈냉전 시대에 냉전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가난한 농촌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빈곤한 농촌사회가 더욱 심각한 폭력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네팔 마오주의는 1940년대에서 1950년에 이르기까지 탈식민지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네팔 왕조의 종말 등으로 급격한 전환을 맞았고, 1960년대 문화대혁명과 그 여파로 시작되었다. 네팔 마오주의자들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물론 네팔 뿐만은 아니다). 카말라(프라찬다라는 별명을 가짐)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그는 네팔공산당의 일원이 되어 향후에는 마오주의 반란을 이끄는 리더가 된다. 그녀의 해방 운동의 시작은 구조적인 불평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생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요? 왜 오빠만 학교에 갈 수 있고, 나는 안 되지요?" 그녀가 한 말이다. 어느 곳이든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불평등의 밑바닥에서 시작되고 이는 자유를 꿈꾸게 만들며 해방을 꿈꾸게 한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마오주의가 퍼져 있었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현대 경쟁 사회로 뛰어들어야 했던 때 반식민, 반서구주의에 입각한 중국의 메시지가 먹혀 들었던 것이다. 1960년까지 아프리카에서 매주 15시간씩 선전방송이 나왔고, 신문 매체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각종 합작에 대한 기사나 사진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마오쩌둥 서적이 전국적으로 배포되었으며, 무엇보다 중국의 전폭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에 의한 아프리카 현대화 시도는 실패했다. 탄자니아는 기근이 일어났고, 짐바브웨는 일당 독재와 경제적 재앙이 나타났다. 두 국가 모두 안정적인 정치, 경제적 통치 체제를 원했으나 모두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960~1970년대 서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은 자유에 의한 갈망과 해방으로서의 분투와 저항 행동을 일으켰다. 문화대혁명은 젊은이들에게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다"라고 부추겼다. 유럽과 미국인들은 문화대혁명의 목표를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했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정치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정치를 멀리서 지켜본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이것이 팩트가 아닐까).
1980년대 페루 정부는 무능했고 부패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은 '빛나는 길'이었는데 그들을 이끈 구스만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비타협적 전쟁 모델을 선택했다. 이후 구스만은 페루 공산당을 창당하며 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국가 기구를 압살하고 도시와 농촌, 백인과 메스티소, 인디언 사이 갈등을 조장하여 뿌리 깊은 차별을 만들어냈다. 인종과 계급을 넘어선 평등을 내세운 공산주의가 오히려 차별을 조장했음은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마오쩌둥은 보시라이에 의해 부활했고 마오주의는 시진핑에 의해서 더욱 그 흐름이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신마오주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다. 현대 신마오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에 따르면, '대중민주주의'는 문화대혁명의 '네 가지 자유', 즉 '자유로운 발언', '자유로운 조직과 활동', '자유토론', '대자보'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언론 자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중이 여론을 통제하는 것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에서 언론의 자유는 '사회주의적'이고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다. 따라서 언론은 거의 모두 필연적으로 민족주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현재 중국에서는 마오쩌둥과 마오 시대에 대한 공식적인 해독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중국공산당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얼마 전 베이징에서 관광객이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가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셜미디어가 강화되면서 중국 정부와 언론은 이를 경계하는 흐름을 더 강화하는 것 같다(위챗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마오주의가 유효한 이유와 그 특징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반제국주의의 물결로 그 영향력이 컸다. 둘째는 제3세계에서 더 유효했다는 점. 셋째는 반공주의에 대항 기저로 공산주의가 더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 넷째는 공산권이 무너졌음에도 중국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리뷰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12.12 (0) | 2024.07.25 |
---|---|
[책] 노마드 (0) | 2024.07.25 |
[책] 본 헌터 (1) | 2024.07.25 |
[책] 전쟁과 사회 (0) | 2024.07.25 |
[책] 현대 중국의 탄생 (0)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