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우연한 계기에 발견하여 읽게 된다. 이 책이 그랬다. 지난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권을 읽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배경의 이야기 때문에 바닥에 쌓여 있던 이 책의 붉은 색의 강렬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비록 다음에 읽기로 예정된 책이 있었으나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읽게 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지금 집어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쟁사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다가 1차 세계대전은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개인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저자의 흥미로운 서술 전개 방식, 인물에 대한 탁월한 묘사, 균형감 있는 서술 덕분에 끝까지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부제가 눈에 띄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1개월간의 전사’라는 것 때문이었다. 우연한 계기(사라예보 사건)로 촉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전쟁은 이전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이번에도 단기전으로 종료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전쟁 초기 1개월 여의 기간 동안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4년의 시간이 흐를 정도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며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왜 그랬을까?
직관으로 그랬는지 또는 고도의 지적능력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군인인 세 사람만은 수 개월이 아닌 수 년간 길게 뻗은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길고, 소모적인 투쟁"을 예언한 몰트케가 그 중 하나였다. 죠프르가 두 번째였는데 그는 1912년 장관들의 질문에 대해 만일 프랑스가 전쟁에서 먼저 승리를 거두게 되면, 독일의 국가적인 저항이 시작될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양쪽 모두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일 것이며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각각 1911년과 1906년부터 자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죠프르나 몰트케, 그 누구도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예견한 형태의 전쟁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이자 자신의 전망대로 행동했던 유일한 인물은 키치너 경인데, 그는 최초의 계획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8월 4일 이집트로 향하는증기선에 승선하려는 순간 급하게 소환되어 국방장관에 임명된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통력에 의해 이 전쟁은 3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를 믿지 않는 다른 각료들에게 그는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3년은 각오해야 합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사실상 결말이 난 후에도 완전히 궤멸되어야만 굴복할 것입니다. 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릴 것 같군요. 지금 살아 있는사람은 누구도 그것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P218~219
1장부터 5장까지는 1차 세계대전의 배경과 주요 참전국들의 전쟁 계획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각국의 전쟁 계획을 엿봄으로써 전쟁의 전개 방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주요국에 해당하는 독일군과 프랑스군의 작전 계획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슐리펜 계획’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지만 ‘플랜 17’은 작전계획이라고 하기에는 유동적인 측면이 많았던 것 같다.
독일군의 작전명은 ‘슐리펜 계획’이었다. 핵심은 적의 양 날개를 꺾고 그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것”이다. 이 작전의 핵심은 프랑스군을 메츠와 보쥬 사이의 자루로 돌진해 오도록 유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든, 알자스-로렌 전선의 독일군 좌익이었다. 프랑스군은 빼앗긴 영토를 해방시키기 위해 이 지점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그렇게 되면 독일군이 작전을 성공시키기에는 더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의 진정한 승리가 프랑스군의 배후에서 성취되는 동안 그들은 독일군 좌익에 의해 자루 속에 갇힌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78
반면 프랑스 군측의 주요 작전인 ‘플랜 17’은 1913년 4월에 완성되었다. 그것의 동기가 되는 아이디어는 “우리는 마인쯔를 지나 베를린으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작전계획이 아니라 정해진 목표도 없이 환경에 따라 유동적인 각 군의 몇 가지 공격로에 대한 지침을 포함한 군의 배치계획이었다.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모든 병력이 하나가 되어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진격하는 것이 총사령관의 뜻이다.” 일반 지침의 나머지 부분은 프랑스군의 행동이 두 곳의 주공격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는 메츠-티옹빌의 독일군 요새 지역 왼쪽을, 또 하나는 그 오른쪽을 공격한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목표는 밀려오는 독일군 우익을 고립시켜 후방과 차단하면서 동시에 라인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 P108
5장부터 9장까지는 초반 전쟁의 분수령이 된 영국 참전 여부와 벨기에 중립을 둘러싼 각국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10장 이후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1개월 동안의 주요 전투의 전개, 결과를 확인하며 앞으로의 전쟁을 예상하게 한다.
리에쥬는 독일로부터 벨기에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철책문이었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함락하기 어려운 전략 요충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독일군은 벨기에의 힘을 약하게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예상 못하게 선전하면서 독일군은 빠른 시간 내에 그곳을 통과하여 프랑스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리에쥬의 의원인 셀레스탱 뎀블롱은 그때 쌩 피에르(St. Pierre) 광장에 있다가 공성용 대포가 광장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포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너무 거대하여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괴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다가왔으며 36마리의 말들이 끌었다. 포장된 도로가 들썩거렸다. 군중들은 이 엄청난 기계장치의 출현에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천천히 쌩 랑베르(St. Lambert) 광장을 지나 테아트르(Théâtre) 광장으로 들어간 다음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을 끌어 모으면서 소브니에르(Sauveniere) 대로와 아브루아(Avroy) 대로를 따라 느릿느릿 무겁게 지나갔다. 한니발의 코끼리들도 로마인들을 이보다 더놀라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과 동행하는 병사들은 거의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도있게 행진했다. 그 대포들은 악마였다..…그것은 아브루아 공원에 조심스럽게 설치된 다음 정밀하게 조준되었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뒤로 나가떨어졌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으며, 가까운 곳의 창문은 모두 박살이 났다." - P321
영국군은 영국의 군사적 대비책에 관한 기본 방향을 견지하였으며, 프랑스에 파병한 BEF의 지휘에 관해 죤 프렌치 경에게 시달할 지침을 통해 전쟁초기 단계에서 원정군의 책임을 제한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켰다.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 전략에 대해 비난을 반영하고 있는 키치너의 명령은 만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동원되지 않은 채 영국군이 "적의 공격에 과도하게 노출될" 수도 있는 그 어떤 "공격 작전"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는다면 죤 경은 우선 본국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경의 지휘권은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며, 경은 어떠한 경우라도 동맹국 장군의 명령에 어떤 의미로도 통제 받지 않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 P338
브뤼셀의 함락소식이 전해지자 8월 20일 마침내 프랑스는 총공격에 임하게 된다. 랑허작은 상브르에 도착했으며 영국군도 그와 이웃한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우왕좌왕하던 죤 프렌치 경도 마침내 죠프르에게 다음날이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날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로렌에서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루프레흐트의 반격이 엄청난 위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카스텔노의 제2군은 죠프르가 일부 군단을 벨기에 전선으로 이동 배치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후퇴 중이며, 듀바이도 혹독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알자스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든 독일군을 상대로 포 장군이 물루즈와 그 주변 지역을 전부 재탈환했지만 이제 랑허작 군이 상브르로 이동하면서 중앙공격에 투입될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어 포의 군대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야만 했다. 죠프르의 어쩔 수 없는 입장 때문에 포의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알자스마저 가장 큰 제물로써 플랜17의 제단에 바쳐지게 된 것이다. - P375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체 서부전선 중 네 군데였으나, 역사는 이들을 묶어 국경의 전투(the Battle of the Frontiers)라 부른다. 8월 14일부터 우측의 로렌에서 이미 시작된 각각의 전투 결과가전 전선에 알려지게 되면서 로렌의 소식이 아르덴느에, 아르덴느는 다시 샤를루와 전투로 불리는 상브르와 뫼즈에, 그리고 샤를루와는 몽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 P377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전방동원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전쟁에 필요한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충분한 전력이 갖추어져야 참전할 수 있다고 했지만 8월 10일이 되자 독일이 동프러시아에 남겨둔 병력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가능한 가장 신속하게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형태로 공격을 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8월 말이 되자 연합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궤멸시켜야만 하는 적, 붕괴시켜야만 하는 정권, 끝장을 봐야만 하는 전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9월 4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 중에는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조약에 서명했다. 그 이후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연합국들이 자신들의 목표는 독일군국주의와 그 황실의 패망이라고 선언하면 할수록, 독일도 더욱 완강하게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일관된 맹세를 다짐했다. 윌슨 대통령의 중재안에 대한 답신에서 베트만홀베그는 런던조약이 독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강요하였으므로 독일도 강화를전제로 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국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양측은 전쟁기간 내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 P509
이미 정해진 결정을 재확인하기 위해 작전실로 들어선 죠프르는 그곳에 모여 있던 장교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마른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진격나팔이 울려 퍼질 때 전 장병들에게 낭독될 명령에 서명했다. 대개 프랑스어는 특히 대중에게 공표될 경우 그것이 화려하게 들리도록 정성을 들이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거의 진부할 정도로 평범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요지는 강하고 단호했다. "이제 전투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노력은 적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데 기울여져야 합니다.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한 부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하며 뒤로 밀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자리에서 전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실패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 P674
마른 전투를 시작하는 것에서 이 책의 내용은 끝이 난다. 전투의 결과는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초반 승리의 기회는 더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서부전선의 교착은 슐리펜 계획의 실패와 플랜17의 실패가 합쳐져 이루어졌다. 하루에 5,000명 때로는 50,000명 꼴로 인명을 빼앗고, 무기, 에너지, 돈, 고급 두뇌, 훈련된 인력을 고갈시킨 서부전선은 연합국의 전쟁자원을 소진시켰으며 다른 경우였으면 전쟁을 단축시킬 수도 있었던 다다넬스 작전과 같은 이면작전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개전 첫달의 실패로 인해 굳어진 교착상태는 전쟁의 향후 진로와 결과적으로 강화조약의 조건, 양 대전 사이의 사회상, 그리고 제2차 대전의 조건들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끼쳤다. - P681
이 책으로 전쟁 초기의 역사를 정리한 이후 다른 1차 세계대전의 역사 사료들을 접한다면 더 풍성한 읽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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