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를 집에 갖고 있다. 대중들에게도 아마 충분히 친숙한 책일 것 같은데 전집은 아니어도 한 두권쯤은 읽어보지 않았을까. 도서관에 가서 확인해 보면 그 책은 항상 대출중이거나 꽂혀 있더라도 사람들의 손때가 제법 묻어 너덜너덜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방송 매체에서도 자료 화면으로 다루어질 정도니 대중 역사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저자가 후속으로 고려사를 다룬다고 하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보지는 않고 어느 정도 쌓이면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밀리의 서재에 몇 권이 올라왔길래 읽기 시작했다.
일단 이리 다양한 인물들의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렸을까 생각했다.
조선사의 등장 인물들은 캐릭터를 보고 ‘특징을 잘 잡아 그렸다.’라는 느낌을 바로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려사는 사실 캐릭터를 봐도 감이 오지는 않았다. 궁예 같이 아주 특징적인 인물이야 그리기 수월했겠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캐릭터를 묘사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거란 짐작을 한다.
또한 고려사는 기록이 적어서 책의 분량 자체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후삼국 시대는 그나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제법 자료가 나와 있겠지만 2대 왕부터 성종 이전까지 초기 시기는 그 기록이 특히 적어서 단순한 한 줄만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했을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고 추측하며 그렸을 작가의 노고가 느껴졌다.
읽으면서 느꼈던 소회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견훤은 왜 서라벌을 점령하고도 신라 왕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대신 경순왕을 세웠을까?
쳔년의 왕국 신라를 간단히 보지 않아서 내린 결정이라면 이전 경애왕과 왕족들에게는 왜 그리 흉포하게 대했을까? 어쨌든 이는 신라 왕족의 분노와 반감, 나아가서는 신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난세에 용장이 힘을 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보이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폭압과 공포정치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백성들을 껴안고 보듬는 정책을 펼쳤다면 왕건과 견훤의 대결이 더 오래 지속되거나 아니면 후백제와 고려가 각각 존속하면서 유지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견훤의 성정상 고려와 나란히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지만.
고려 태조 시대 명장, 유금필 장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육지전 뿐 아니라 해전에서도 후백제 군대를 거침없이 몰아붙이니 태조에게는 참으로 귀인이 아닐 수 없었을 듯하다. 박시백 작가는 그를 '태조의 짱가'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유금필이 유금필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역시 후자의 표현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거란과의 첫 외교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만부교 사건은 이후 거란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호족 관리를 위해 위해 호족들의 딸과 연을 맺고 나아가 왕씨 성까지 하사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달래면서 당장의 불을 끌 수는 있었겠으나 후환을 남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왕씨 성을 받기 위한 호족들 간의 암투도 있지 않았을까? 결정적으로 후계자 문제의 불씨를 남겼다. 29명의 부인 아래에서 출생한 태조의 계보는 8대 임금 현종이 등극할 때까지도 이어지니 말이다.
'장수로서는 지혜롭고 용맹했으며 일국의 왕으로서 부드럽고 온화한 가운데 단호히 결단할 줄 알았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과 누구든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졌다.' 태조에 대한 평가다. 다른 무엇보다 넉넉함을 가졌다는 것에는 동감한다.
<훈요10조>가 고려사에 실리게 된 경위가 흥미로웠다. <훈요10조>는 태조가 죽기 전 이후 고려를 위해 내린 지침서인데 요나라(거란)와의 전쟁 중에 분실되었다가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함으로써 가능했다고 한다. 최항이 이 문서를 보관하게 된 경위는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유야 어쨌든 거란에 이 문서가 넘어가거나 불에 타거나 하여 없어지지 않고 고려 내에 보관된 일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혜종의 탄생 비화 관련 왕건과 둘째 부인 사이의 만남은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 놀랍기 짝이 없었다(망측하다는 표현이 적절!). 혜종의 탄생 비화도 그렇고 얼굴에 주름이 졌다는 등의 말을 고려사에 기어코 집어넣은 것은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 집안의 힘이 그만큼 미약했고 나아가 혜종의 힘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혜종은 몇 번이나 시해의 위기의 순간을 넘긴다. 일명 왕규의 난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런데 혜종은 그 일을 덮고 넘어갔다. 왜 그랬을까? 왕규는 당시 최고의 재상이었는데 반역을 시도하면서까지 손자를 왕위에 올리려 했던 것일까. 다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기록에는 이 일을 왕규가 주도했다 보았지만 추측일 뿐이다. 작가도 혜종의 동생인 요(후에 3대 임금인 정종)나 소의 소행이 아닐까 추측한다. 왕자 요와 소는 태조의 3번째 왕비의 소생들이다.
혜종이 2년 만에 사망했다는 것도 의혹을 갖게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작스런 병사를 했을리는 없고 타살이지 않을까. 3대 임금 정종은 즉위하자마자 재상 투톱(왕규와 더불어) 중 하나인 박술희를 처단한 것을 보면 혜종의 사망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왕규는 후에 유배를 당했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고 난을 일으킨 주인공이자 역적으로 역사 기록에 남고 말았다. 그가 할 말은 없을까나.
정종은 고려사에 '불교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으며 도참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절에 어마어마한 클라스의 시주를 한 것만 봐도 불교를 좋아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혜종도 2년 만에 죽었는데 정종은 4년 만에 죽다니 참 우연 치곤 놀랍다. 아무튼 그렇게 왕자 소는 4대 임금 광종으로 즉위했다고.
광종은 노비안검법 시행과 과거제 시행으로 역사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기 때문에 익숙하다. 그러나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된 이들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역대로 공훈을 세운 신하와 경험 많은 노장들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를 땐 옛 신하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이는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의 언급에 나오는 표현 중 하나인데 이렇게 심했을까 싶지만 그만큼 숙청의 빈도가 많고 강도가 셌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광종의 첫째 아들이 5대 임금 경종으로 즉위한다. 그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전시과를 처음 시행한 것으로만 기억난다. 정치적으로는 그만큼 존재감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데 막판으로 갈수록 오락과 유희에만 집중한 끝에 사망한 것이 이유가 아닐까.
경종에게는 2살 짜리 아들만 있었기 때문에 즉위할 수는 없었고 대신 사촌이자 처남인 개령군이 왕위를 이어받아 6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성종 하면 최승로가 생각날 정도로 성종의 개혁에 최승로의 공로가 지대함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업적을 남기기는 했으나 전반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강화함으로써 사회가 이전보다 경직된 면도 있었다.
1권은 후삼국 시기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통일한 태조부터 성종 시기까지를 다룬다. 기록이 빈약한 시기라 특히나 역사적 상상력과 추측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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