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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와다 하루끼의 한국전쟁 전사

category 리뷰/책 2023. 9. 12. 14:12

한국전쟁 전사(全史)는 한국전쟁의 시작 전부터 마지막 정전 협정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의 기원에  초점을 더 맞추어 전쟁 자체의 기록은 소략해서 아쉬움이 있었다(마찬가지로 한국 저자인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도 그 기원과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전반적인 과정과 결과를 다루고 있고 무엇보다 한국과 소련, 중국, 미국의 기록 등 다양한 기록을 참고하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1949년 4월 23일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제스 정권이 있던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는 중국 내부에도 전환점이 되었으나 북한 지도부도 고무되었음에 틀림 없다. 변화된 미국 정세에 남한은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 안에 넣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미 정부는 남한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하며 미국에 대한 한국의 불신감을 키웠다. 이 무렵 38선을 둘러싸고 국경 충돌이 본격화했다. 5월부터 옹진 반도에서 북측의 공격으로 남측이 부대를 투입했으나 격퇴에 애를 먹으면서 6월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6월 29일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였고 6월 30일에는 남북의 노동당이 합당하면서 김일성-박헌영 체제가 확립되었다. 7월 말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으로 재편된 결과 북의 병력은 5개 사단으로 증가한다. 

 

북한 정부는 미군이 떠난 지금 삼척을 해방시키고 옹진반도를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고 이를 소련에 타전한다. 1949년 9월 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지령을 내려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옹진반도와 개성 지구의 탈취 같은 부분적인 작전에 대해 말하자면, 이 작전의 결과 북조선의 경계가 서울에 거의 근접하게 된다면, 이 작전은 북조선의 전쟁 개시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사적 면에서나 정치적 면에서나 이 전쟁을 위한 북조선의 준비는 아직 미흡하다. 덧붙여 북이 먼저 군사행동에 나서 장기화할 조짐을 보일 경우, 조선 문제에 어떠한 형태로든 미국인이 끼어들 명분을 줄 우려가 있다. 모든 점을 감안할 때 현재 조선 통일의 투쟁 과업을 위해 최대한의 힘을 결집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첫째, 반동 정권의 타도와 전 조선 통일이라는 과제의 성공을 위한 남조선 빨치산 활동 전개, 해방구 설치, 그리고 전 인민 무장봉기의 준비이며 둘째, 조선인민군을 전반에 걸쳐 한층 더 강화하는 일이다.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은 미군의 개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북한 지도부의 무력 해방안을 반려했다. 하지만 1950년 일본공산당에 대한 코민포름의 비판(소련공산당이 일본공산당에 대해 미군에 맞서는 철저한 대결 노선으로 전환하라는 지시)이 나오고 소련이 중국 혁명의 길을 지지하면서 북한 지도부는 다시 스탈린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타전한다. 스탈린은 1월 30일 거의 완전한 동의를 표명하는 서신을 보냈다(물론 중국 정부의 원조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 하에). 이로써 김일성은 전쟁 준비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1950년 훈련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이동한 모든 보병연대는 6월 23일 저녁 전투 명령을 받았고, 25일 오전 4시부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이 모든 부대에 하달됐으며, 공병은 곧바로 6월 24일 지뢰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6월 25일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38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UN은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했으나 소련이 불참(스탈린은 “내가 생각하기에 소련 대표는 안보리 회의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불참 지시를 내렸다.)하고 유고슬라비아가 기권한 상황에서 첫 결의가 채택됐다. 29일 미국은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을 목표로 한 공군 작전 확대와 부산-진해에 한정된 미 지상군의 투입을 지시하는 명령을 결정했다. 맥아더는 전황을 시찰한 뒤 “한국군은 반어 능력이 없으며 적의 진격이 계속되면 붕괴할 위험이 있으므로 현재의 전선을 지키고 나아가 반격하기 위해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6월 30일 미군의 전면적 출격이 단행되었다. 한국전쟁 개전으로 타이완은 제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으로 군사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일본은 후방 지원으로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10월 2일 맥아더가 유엔군 전 부대에 “우리가 군사 작전을 하는 곳은 군사적 필요와 한반도의 국제적 경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따라서 소위 38선은 우리 군의 군사적 운용 측면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해 귀하의 부대는 그 경계를 언제든지 넘어도 좋다.” 명령하며 한국군의 북진은 추인됐다. 하지만 이후 전쟁 과정은 알려진 바와 같이 남북한 모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난항을 겪었다. 

 

1951년 3월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알렸다. 

조선의 전장에서 벌어진 최근의 전역 과정은 거의 모든 적군이 괴멸되지 않는 이상 적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적의 군대 대부분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선의 군사 작전은 장기적인 성격의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2년은 걸릴 것으로 상정해야 합니다.

마오쩌둥은 이북을 지키기 위한 소련 공군을 스탈린에게 요청하였는데 이를 승인했다.

 

이 무렵 미국도 정전에 대한 고려를 시작하여 대일 강화 조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중소우호조약에 따라 대일 강화에서 중국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한국전쟁 관련해서 소련보다는 정면에 중국을 내건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 중국의 입장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5월 6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대일 강화 문제 관련하여 지지를 요청했다. (1) 강화조약의 단독 준비에 반대하고, 중・소, 미・영의 공동 준비를 요구한다. (2) 중국의 타이완에 대한 권리를 명기하라. (3) 일본령 오키나와를 미국 통치하에 두는 것에 반대한다. (4) 일본 군사력의 한계를 명기하라. (5) 일본은 군사동맹에 가입해서는 안 되며, 강화 후 1년 이상 점령군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은 완전 동의를 표명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6월 14일 대일 강화 조약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제도는 일본이 포기하고 소련의 영유라는 규정은 삭제했다. - P384

이때 남한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으로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적 위기 상태가 지속되면서 남한 정부가 미국에 무기 제공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은 남한 정부와 군을 불신했고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던 정전회담 개시 방향 등도 공유하지 않았다. 5월 17일 미국 상원에서 한국전쟁 정전 결의가 채택됐으나 애치슨은 이승만의 동의를 얻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승만 패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9월 8일 대일평화조약 체결로 일본은 전쟁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미국은 일본 방어를 내세워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정전회담은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중국과 북한 측 회담 대표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남일이었고 부대표는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 덩화였다. 유엔군 대표는 터너 조이 해군대장, 4명의 미군 장성과 한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대장으로 구성됐다(이승만이 정전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장이 참 난감했을 것이다). 중국과 북한 측의 정전 협상은 마오쩌둥이 대부분 주도하였다. 회담 의제 중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 포로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컸다. 그나마 군사분계선의 문제는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았으나 포로 문제 때문에 정전 협상은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며 2년 넘게 끌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으로 이승만은 민의를 거슬렀고 미국 정부에도 이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에 이승만을 대신할 국민적 브랜드를 가진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다. 

북한은 1953년 제5차 전원회의 결정에서 종파주의분자 적발, 비판 캠페인으로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 박헌영은 추도식 직후 체포되면서 김일성은 종전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포로 협상에서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포로는 즉시 송환하고, 나머지 포로는 송환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확보하기 위해 중립국에 인도할 것”으로 결론이 난다. 저우언라이, 김일성이 이에 서명하였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1) 한반도의 재통일, (2) 중공군의 철수, (3) 북한군의 무장해제, (4) 제3국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의 금지, (5) 대한민국의 주권 존중 및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그 목소리의 존중이었다. 모두 정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클라크는 이승만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도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사실 그 이면에는 “에버레디 계획”으로 한국 정부가 저항한다면 정전에 협력적인 신한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승만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워싱턴이 양보하고 이승만도 물러서면서(정전협정에 서명할 수 없지만 정전회담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방기한 것 아닌지?) 7월 24일 정전회담의 내용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7월 27일 판문점에서 해리슨과 남일은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정전 명령은 남쪽은 클라크의 이름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비타협적 대립 속에 갇혔다. 한국 측에도, 북한 측에도 군사행동을 다시 생각할 조건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존재하게 된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차가운 전쟁도 아니었다. 냉전이라면 외교 관계는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긴박한 대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열전은 끝났지만, 냉전 상태에도 미치지 못한 특별한 적대적인 상태가 계속됐다. - P603~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