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벌어진 가슴, 다부진 체격, 짙고 숱 많은 눈썹은 활처럼 굽었고, 두 눈은 슬픈 코끼리를 닮았다. - P60
홍범도는 키가 190 정도로 무척 컸고 단단한 체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남아 있는 사진을 봐도 '건장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책에서의 '슬픈 코끼리의 두 눈을 닮았다'는 표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저자가 쓴 민족서사시를 기반으로 하여 산문적 서술로 바꾸고 최신 역사 사료를 업데이트하여 다듬어낸 평전이다. 저자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그 때문인지 문체 자체가 물 흐르듯 하여 책 내용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대화문들을 읽을 때는 마치 홍범도 장군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홍범도의 일대기를 몇 년만에 읽게 되었다.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흑하 사변' 등 교과서에서 붙박이처럼 배우는 사건이지만 어떠한 배경에 의해서 일어났고 어떤 과정으로 일어났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고 여긴다.
홍범도의 원래 이름은 범동이었다. 어머니는 산독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동냥젖을 먹여 가며 키우셨으나 아버지도 8살 때 돌아가신 뒤로는 홀로 살아가야 했다. 남의 눈칫밥을 얻어가며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럼에도 맡은 일을 잘 해냈는데 3년간 일했던 제지소에서 품삯을 미루고 주지 않아 제지소 주인을 때리고 도망쳐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계를 받고 지담 스님의 상좌가 된 홍범도는 스님으로부터 '범도'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범동이 범도가 된 순간이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치기가 많았을 나이, 범도가 되면서 그는 큰 그릇의 사람이 되어 백성을 돕겠다는 포부를 품게 된다. 범도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도 모자라 이 곳에서 아내 분을 만나 아이를 가지게 되어 강원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연이 흥미로웠다. 강원도에서는 매일 사격 연습을 하며 단련했다고 한다.
을미 사변, 단발령 이후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난다. 이 때 주도적인 의병 세력 중 한 명은 유인석이었다. 홍범도는 강원도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유인석의 부대를 마주한다. 이 때 유인석은 홍범도의 기개에 인상이 깊었는지 '여천汝千'이라는 호를 내렸주었다고. 그 후로도 둘은 서찰을 주고 받으며 뜻깊은 인연을 이어간다. 유인석은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지지했지만 그의 투지만으로 싸우는 모습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며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유인석은 홍범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홍범도는 사포수로 사냥하고 가족들은 농사를 지어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사냥꾼 사포계에 포함되어 활동하다가 후에 차도선, 송상봉이 지휘하는 의병대와 조직을 합친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자 그의 의병대 활동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만 수차례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주로 일진회 회원을 처단하거나 일본군 토벌대의 사무실, 통신 기관 등을 파괴하는 일을 행했는데 각지에서 의병대 활동을 위한 의연금을 보내올 정도로 응원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홍범도는 이 때 신출귀몰-(날아다니는 장군: 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슬픔들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의병대 내부의 반일 역량을 분해시키기 위해 차도선에게 접근했는데 이 때 휘하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해 귀순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의 가족도 대상이었다. 첫째인 홍양순은 홍범도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무사했으나 단양 이씨(홍범도의 아내)는 둘째 용환이를 빼돌리고 정작 본인은 유치장에 갇혀 모진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사망하고 만다. 1908년 바배기 전투에서 첫째인 홍양순이 사망하였다. 이후에 둘째인 용환이도 병으로 앓다 사망한다. 어릴 적 부모와 일찍 헤어진 그는 가족과의 애착이 무척 컸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그의 단란한 가정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독립 운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더라면 좀 더 단란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 삶을 택하지 않았다.
상황은 갈수록 홍범도 의병대에 불리해져 갔다. 총은 있지만 탄약이 떨어져 쏠 수 없어 숨어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투 의욕을 상실한 탈주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단을 내린 그, 가려는 의지가 있는 40명만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한다.
두만강 너머는 일찍부터 조선에 살던 많은 백성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주로 북방 지역에 살던 이주가 많았는데 고향 땅이 점차 살기 팍팍해졌던 탓이 클 것이다. 처음으로 이주한 조선 백성들은 터를 잡고 척박한 그 땅을 개간해나갔다. 이후 점차 이주하는 백성들이 늘어 1920년대가 되면 20만명이 된다. 그 곳에 살던 중국, 러시아인들도 조선인들의 농사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를 몇몇 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땅으로 간 홍범도는 그 곳에 있는 독립군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한다.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이어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다. 유리한 지형에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결합한 완벽한 아군의 승리인 동시에 일본군에게는 무참한 패배를 안긴 전투였다. 다만 일본군의 패배는 그들을 복수심에 불타 오르게 해 조선인 동포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참극을 낳게 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 9개의 단체가 모여 대한독립단 단체를 만들지만 내부 노선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갈등은 잠복해 있었다. 러시아 백군이 홍군에 의해 박살이 나고 연합국 최고회의는 1920년 1월 16일 볼셰비키 정권과의 통상을 재개하면서 군대 철수를 선언했지만 일본은 버팅기며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해 4월에 러시아 빨치산 부대가 니콜리스크에 와 있던 일본군을 살해하면서 연해주의 러시아 혁명군 무장해제를 요구,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 등지의 한인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공격 및 학살을 벌인다. 이 때 최재형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했다. 이것이 '4월참변'이다.
문제는 일본군이 4월 참변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은 채 한인마을을 공격하는 와중에 1921년 3월 소련정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모든 대한독립단 부대를 소련군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강제편입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자유시에 집결하라는 요구를 한쪽은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거부하면서 분열은 증대한다. 이것이 흑하 사변의 계기가 되었다. 홍범도는 이 때 독립 세력 간의 갈등을 보며 무척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통합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쉽지 않았고 결국 흑하사변이라는 비극으로 끝맺음이 났다. 서로 총을 겨눈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은 그에게 큰 상실감과 슬픔을 남겼다.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담긴 관이 크즐오르다 공항을 출발하여 같은날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8월 17일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 훈장 최고의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어 78년 만의 고향 땅에 묻혔다.
"이 땅에서 왜적을 말끔히 물리치는 날, 그날에 나는 비로소 죽을 수 있으리라. 그날까지 나는 제국주의자 침략자들과 싸우고 또 싸우리라.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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