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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기호의 제국

category 리뷰/책 2023. 8. 21. 11:33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며,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얼마 전 오디오 매거진을 듣다가 알게 된 책이다. 소개하기를 얇은 에세이로 여행지에서 읽기에 적합하다 하는게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도서관에 상호대차를 신청해놓고는 잊고 있다가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고 '앗!' 했다. 요즘은 이렇게 도서관에 책을 신청해놓고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제는 도서관에 신청할 때도 무엇 때문에 신청했는지 책 이름과 함께 기록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저자는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로 '현대 비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라지만 나는 철학자들과는 거리가 먼데다 심지어 현대 철학자는 더욱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에 대한 정보는 없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은 바르트가 일본 문화를 경험하고 엮은 글을 모은 에세이이다. 모를 때에는 무턱대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겠지, 에세이는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를 때 더 신선할지도 몰라 주문을 외우면서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의 글을 읽고 해석하기에는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글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문장들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이 좋았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그 나름대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지식이나 주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강력한 지진과도 같다. 그것은 말의 텅 빈 상태를 만들어낸다. 말의 텅 빈 상태에서 나의 글쓰기가 이루어진다. - P13~14

나는 글을 쓰면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많다. 책을 읽는 행위와는 별개로 쓰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정리하는 중 불현듯 수면 아래 잠자던 생각이 튀어오르기도 한다. 깨달음이 주체를 움직이는 강력한 지진 같다는 말에 동감했다. 그리고 그럴 때 말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회에 대해 논의한다고 떠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늑대의 목구멍 속에 편안하게 들어앉아 늑대를 죽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상력에 기반을 두어 탈선적인 문법을 연습한다면 적어도 우리말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유리한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 P18

언어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어는 서양에서 가져온 근대의 번역어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근대어의 기원에 대한 책을 최근 읽는 중이어서 이 문장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대부분이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인데 과연 제대로 인식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곱씹게 되었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여러 편의 글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데 뒤로 갈수록 알 듯 말 듯 모호한 표현들이 '적당히 넘어가자.'라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어쨌든 변명같지만.

그 중 기억나는 키워드를 꼽아본다면 텅 빈 중심, (반듯한) 공간, 공손한 인사(절), 하이쿠, 가부키다.

하이쿠, 가부키는 일본 문화 예술에 지금도 핵심적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한다. 하이쿠는 과도한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가벼우면서도 단순하고 평범해져도 되기에 오히려 대중들에게 계속 호응을 받으며 양산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의미로부터의 면제'다. 무언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의 강박으로부터의 탈피다.
가부키는 일본 여행을 갔을 때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일본극예술 하면 가부키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가부키는 오늘날에도 흰 얼굴로 대표되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미지로 덧씌어져 내면이 드러나보이지 않는다. (반듯한) 공간이란 대표적으로 일본 정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정갈해서 뭐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느낌의 정원이다. 과거 일본식 모래 정원을 보았을 때 관리하시는 분이 주변에 있어 모래를 항상 모양대로 관리하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정원과 여러 모로 다른 형식이라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도시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이 도시는 중심부가 있지만 그 중심부는 텅 비어 있다. 이 도시 전체는 금지된 중립의 공간을 빙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나뭇잎 뒤에 숨겨져 해자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천황이 사는 곳이다. 매일 총알처럼 빠르게 정력적으로 달리는 택시들도 이 원형의 공간은 피해가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한 형태인 낮은 용마루 장식은 신성한 '무'를 숨기고 있다. - P46~47

'텅빈 중심'이란 말 그대로 중심은 중립을 지향하는 듯(?)처럼 보이는 천황이 사는 곳이 있고 그 주변을 둘러싼 공간은 다른 공기와 구조로 돌아가는 도쿄를 말하는 것이다. 천황은 일본의 근대 이후 상징성을 지닌 존재가 되어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순간마다 '나는 관련 없어요.' 하지만 과연 그 어떤 의제들에서도 그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라는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인사는 진정 어느 누구에게도 인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굴욕이나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두 개인의 제국 간의 사려 깊고 겸손하며 신중한 의사소통의 기호가 아니다. 중단되거나 얽매이지도 깊이가 있지도 않은 형태들의 그물망의 특질일 뿐이다. 누가 누구에게 인사하는가?라는 질문만이 인사를 정당화해서 인사를 절로, 절로 만든다. 이로써 의미보다 의미의 그림이 영광스러워진다. 또한 이 질문은 우리에게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자세에 신중성을 부여하는데, 이 자세는 모든 기의가 놀랄 정도로 텅 비어있는 몸짓이다. - P89

지금까지 만나본 일본인들은 모두 인사를 지나칠 정도로 한다는 느낌이었다. 인사를 잘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냐 친절하면 좋은 것 아니냐 할 수 있는데 나로서는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던 것이다. 과도한 몸짓 같아서 이것이 그저 형식이 아닌가 할 때가 많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몸에 밴 습관처럼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르트의 말에 의하면 인사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은 자유로워지는 것인가보다 생각하니 그제야 수긍이 갔다.


나는 바르트가 일본을 경험하면서 적은 글들 중 아래의 글이 결국 바르트가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와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싶었고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이 도시를 횡단하는 것은 일본의 제일 꼭대기에서부터 저 밑바닥까지를 여행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의 얼굴에 대한 글쓰기를 그 지형학에 포개놓는 일이기도 하다. 각 구역의 이름은 저마다의 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원시부족만큼이나 개성적인 인구를 가진 마을과 밀림지방 같은 대도시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기표로서의 이름은 한낱 기념품이라기보다 생생한 회상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의 소리는 역사의 소리다. -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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