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뤼스 씨와 쥐피앵의 시선은, 적어도 일시적이긴 했지만 뭔가에 이르고자 하는 목적이 없다는 점에서 아름다웠다. 이런 아름다움의 발현을 나는 남작과 쥐피앵을 통해 처음 목격했다. 이들 두 사람의 눈에 떠오른 것은 취리히의 하늘이 아니라, 내가 아직 그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 어느 동방 도시의 하늘이었다. 샤를뤼스 씨와 조끼 재봉사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요소가 무엇이었든 그들 사이에는 협정이 체결된 듯 보였고, 그 불필요한 시선은 이미 정해진 결혼에 앞서 베풀어지는 축제처럼 의례적인 서곡에 불과했다. 보다 자연에 가까워진 두사람은 그리고 이런 다양한 비교는, 우리가 몇 분 동안 살펴보면 동일한 인간이 연이어 인간, 인간-새, 인간-곤충 등으로 보여 그 자체로도 더욱 자연스러웠다. ―마치 한 쌍의 새처럼 보였는데, 수컷이 먼저 다가가려고 하면 암컷인 쥐피앵은 이런 술책에 어떤 신호로도 응답하지 않고 놀라지도 않은채 자신의 새로운 친구를 무심히 응시했으며, 수컷이 먼저 수작을 부린 이상 자기는 깃털을 쓰다듬는 정도로 만족하는 게보다 자극적이며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듯보였다. - P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8권은 '소돔과 고모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죄악의 도시로 등장하며 레반트 지역에 실재했던 곳으로 여겨 지는 곳이다. 물론 샤를뤼스 같은 부류의 남자들은 삶의 가능성과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다른 부류의 남성, 즉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또 그 결과 그를 사랑할 수 없는 남성)의 사랑을 추구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난초꽃이 벌에게 수작을 부리듯, 쥐피앵이 샤를뤼스 씨의 주위를 맴도는 모습을 목격한 화자처럼 '소돔과 고모라'는 특히 동성애로 의인화되고 하느님은 이들을 벌하라 지시하여 두 도시가 망했다고 한다(구체적으로는 ⌜창세기⌟ 18~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려는 하느님께 롯이 간청하자 하느님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롯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하느님은 도시를 파괴하려 한다. 그러자 천사들이 롯과 가족들에게 도망치라고 말하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명하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다 소금 기둥으로 변한다).
샤를뤼스와 쥐피앵의 만남을 보며 화자는 남성이 남성을 열망하고 쫓는 행위에 대해서 자기만의 생각을 정리한다. 알베르틴과 앙드레는 그 반대편에 서 있지만 같은 결에 있다. 화자는 이렇게 동성애에 대해서 특이함, 기이함으로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나라면 물론 내 딸들을 이런 곳에 오지 못하도록 할 걸세. 어쨌든 여자아이들이 예쁘기는 한가? 나는 저 아이들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겠네. 저런, 저걸 보게나." 하고 그는 서로를 껴안고 천천히 왈츠를 추는 앙드레와 알베르틴을 가리키면서 덧붙였다. "코안경을 잊어버리고 와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아이들은 틀림없이 쾌락의 절절에 있을 걸세. 여자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젖가슴을 통해 쾌락을 맛본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네. 저 아이들의 젖가슴이 완전히 붙어 있는 걸 보게나." 실제로 앙드레와 알베르틴 사이에서 젖가슴의 접촉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앙드레가 알베르틴에게 한마디 했고, 그러자 알베르틴은 조금 전 내가 들었던 그 날카롭고도 뜻깊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베르틴은 그 웃음소리를 통해 은밀하고도 관능적인 전율을 앙드레에게 가리키고 확인하려 하는 듯했다. 그것은 미지의 축제에서 처음이나 마지막에 울리는 화음과도 같았다. - P345
악덕은(언어의 편의상 이렇게들 말하는), 마치 정령의 존재를 모르는 인간에게서 그 인간이 모르는 정령이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각자의 악덕은 우리를 동반하고 있다. 선함이나 교활함, 명성과 사교적 친분 관계는 그 자체로서는 드러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감춘 채 지니고 있다. 오디세우스도 처음 순간에는 아테나 여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 P35~36
스완은 병색이 완연해진 모습을 보인다. 그런 스완의 모습을 보고 화자는 충격을 받았다. 아픔과 고통을 마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를 감내하기엔 아직 그의 연륜이 깊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화자는 발베크로 두 번째 방문했다. 그 방문은 첫 번째 방문 이후 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했고 고통이 찾아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화자의 감정에 연민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할머니를 뵈었을 때 모습이 스쳤지만 그 때는 이미 눈을 뜨시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슬픔이 밀려들었다. 우리를 보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후회가 덜할까 싶기도 했지만 인생사는 알 수가 없지 않나. 결국 이런 고통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의 부재는 화자에게 앞으로도 순간 순간 아픔처럼 다가올 것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 지 알기 어려우며 그 감정을 제어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게다가 화자는 할머니의 부재에 대한 기억에서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의 감정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낀다. 부재는 상실이며 그리움이기도 하다. 죽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고 그저 기억으로 대체되어 자리할 뿐이다.
스완은 예언자의 나이에 도달했다. 물론 병의 영향 때문이긴 했지만 마치 얼음덩어리가 녹으면 모서리 전체가 떨어져 나가듯 얼굴 윤곽 전체가 사라진, 상당히 변한 모습이었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그가 얼마나 변했는지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P169
적어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과 알베르틴에 대한 감정이라는 이 두 요소는, 그날 저녁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날 전화에서 들은 마지막 말로부터 나는 알베르틴의 삶이 내게서 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물론 물리적 거리는 아니지만) 내가 그 삶을 손안에 넣으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힘든 탐색을 해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삶은 야전 요새처럼, 또 보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우리가 나중에 관습적으로 ‘위장된 요새‘라고 부르게 된 그런 종류의 것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 P240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까 두려워 망자의 실제 모습만을 찬미하며, 당시 이미 우리의 모습이었으나 다른 것에 섞여 있던 모습을 배제하고, 오로지 망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물려받으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우리가 보통 듣는 그렇게 모호하고 거짓 의미에서가 아니라) 죽음은 헛되지 않으며, 망자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망자는 산자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실재란 정신작용의 대상이기 때문에 정신을 통해서만 표출되며, 우리는 나날의 삶이 감추는 것을 사유에 의해 재창조할 때에야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망자에 대한 이런 그리움의 의식에서, 우리는 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싶어 한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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