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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자의 풍경

category 리뷰/책 2023. 5. 30. 09:04
한자는 어렵다. 왜 어려울까. '외운다', '외워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서가 아닐까. 몇 년전 한자능력검정시험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시험 결과는 참패였으나 시도를 한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 대체 왜 한자에 꽂혔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한국사를 공부하고 고문헌에 등장하는 수많은 한자를 사전을 찾지 않고도 읽어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겨서였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 한국사의 기본적인 문헌들은 번역화되어 온라인에서 제공되고 있으나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일수록, 그리고 국가의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일수록 번역이 되어 있지 않거나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해도 일부는 사전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 신문이나 기사 같은 경우에도 이미지만 제공되는 경우가 있어 한자를 모르면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국의 '사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자능력검정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회의가 찾아왔다. '내 수준이 이렇게 처참한가? 내가 너무 호기를 부렸나?' 그랬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역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내 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문에 공부 방식을 바꾸었다. 고전을 읽는 것을 목표로 한 뒤 한자의 원리와 부수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자소학, 추구, 명심보감, 천자문,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이렇게 공부를 이어간 것이다. 중용은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중단하고 지금은 역사서인 통감절요를 읽고 있다.
 
이 책은 최초의 한자가 시작된 시기부터 한자가 지금의 문자로 오기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제목을 보고 의아했다. 언뜻 생각하면 '한자의 역사' 또는 '한자의 기원' 이런 제목을 써도 무방한데 왜 '한자의 풍경'일까. 서문에 그 답이 있었다.
 
풍경(風景)은 한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포함된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경치에는 풍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풍경이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그 자체를 나타내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연 경치를 나타내는 이 단어에 風 자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
갑골문 風 자를 보면 처음부터 바람을 나타내는 글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風 자는 머리에 장식을 하고 깃털이 많은 봉황새의 모습이다. 지금의 봉 (鳳) 자와 같은 글자였다. 이 글자는 사방(四方)을 다스리는 바람신들이 데리고 다녔던 새를 표현한 것이다. 공기의 기압 차로 바람이 생기는 현상을 알 리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바람이란 바로 이 바람신들이 불어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신들이 데리고 다닌 새를 나타내는 鳳 자로 바람을 표현했다. 한자를 만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할 때 그것의 형태나 속성에 매몰되지 않고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지식이 늘어나고 바람신에 대한 숭배도 시들해지면서 글자 한가운데에 벌레 충 (蟲) 자가 들어간 지금의 초라한 風 자가 만들어졌다.
이런 사연을 가진 風 자는 그래서 자연 상태의 바람을 나타내기보다는 인간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 풍경이란 바람 부는 날의 경치가 아니라,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부지런히 다니던 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된다. - P005~006
 
풍경은 사람의 시선이 포함된 단어다. 저자는 한자가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독자의 시선이 따라가며 이해하는 과정을 생각해 '풍경'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 같다. 참 멋진 단어를 선택한 듯 싶다.
 
책에는 신석기 시대 토기에 새겨진 도형화된 무늬부터 거북이 등껍질 같은 동물의 뼈에 갑골문을 새긴 사람들, 청동기 시대 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위해 문자를 새기기 시작한 주나라 사람들, 최초의 행정적 문서 체계를 완성한 진나라 사람들, 목간과 죽간에 글자를 기록하다 종이라는 매체를 발명하여 기록하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풍경처럼 펼쳐진다.
 
대부분의 문자는 구체적인 사물을 형태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개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발전해가지만 사물과 개념에 대응하는 글자를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자는 사물에 대응하는 표의기호에서 표음기호로 변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자는 다른 문자와 달리 표음기호가 아닌 원래의 표의적 기능을 유지한 유일한 문자이다. 그래서 한자는 소리가 아닌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개념을 글자화하기에 난관에 부딪힌다. 이미지화한 수많은 글자를 기억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화적(이미지)으로 구성된 한자에 표음적 기능이 추가된 형성자가 추가되었다.
 
최초의 한자 문자라 할 수 있는 갑골문은 사물의 형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개념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표의문자, 음을 표시하는 형성문자로 구성된다. 오늘날의 한자의 구성 원리의 대부분을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상형자, 회의자, 형성자만으로 뜻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 가차자(대명사나 각종 부정사 같은 요소에 발음이 유사한 글자를 빌려와 사용)를 쓴다.
갑골문의 자획은 대부분 직선으로만 구성되며 곡선은 거의 찾기 어렵다. 당연하다. 뼈에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글자를 새겨야 하니 곡선은 긋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죽간에 붓을 사용하여 글자를 새기기도 했으나 뼈나 돌에 새기는 것보다 오래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갑골문의 모양을 보면 한자가 쉽게 유추된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왜 현대의 한자는 갑골문과 달리 모습이 이렇게 달라졌을까. 서체의 발전에 따라 한자는 점차 간소화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예전의 기원을 찾기 어려워진 탓이다.
금문 시기까지만 해도 한자의 모양을 보고서 글자를 어느 정도는 유추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자는 사실 한자 모양만 봐서는 쉽사리 유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외워야 하는 압박이 생기는 것일까.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행정 체계를 갖추면서 많은 양의 문서가 생산되었다. 그런데 각 지역의 문자들이 달라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통일된 서체를 개발하도록 명령한다. 승상 이사가 이전에 사용하던 주문이라는 글자체를 기반으로 좀 더 간략화된 문자인 소전(小篆)을 만든다. 이렇게 소전체는 한나라 초기까지 행정용 문서체로 사용되었다.
소전의 자형은 세로로 길쭉하고 모서리가 부드러우며 필획 두께가 일정하다. 또한 글자가 모두 균등한 크기로 질서 있게 배열되었다. 소전을 쓸 때는 모필의 한가운데 힘을 준 상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균등한 획을 긋는 중봉(中峯) 기법을 사용한다. 이처럼 각 획의 일정한 두께 덕분에도 도장을 새길 때 편리했다. - P407
소전체는 일정한 글자체로 대칭적이라 후대 전각이나 도장에 널리 사용된다.
그러나 붓을 잡은 손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힘을 주어야 하는 중봉 기법은 많은 양의 문서 작성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 때문에 공식적인 문서에는 소전체를 사용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예서체를 사용했다고 한다.
소전이 세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라면 예서는 옆으로 퍼져 가로로 넓은 직사각형 형태이다. 소전의 글자 모서리가 둥글다면 예서는 곧게 펴진다. 소전이 글자 전체를 감싸는 필세로 구성되었다면 예서는 글자의 마지막 부분이 독립적으로 갈라져 날아갈 듯한 파책이라는 독특한 삐침 양상을 보인다. - P420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특징은 예서에서 비롯되었다. 소전체는 이전의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으나 예서체는 오늘날의 한자처럼 완전히 기호화된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해서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서체이다.
해서의 가장 큰 특징은 파책으로 구현된다. 가로획의 오른쪽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이다. 세로획은 예서와 큰 차이가 없다. 예서는 좌우대칭을 원칙으로 하지만 해서는 오른쪽 파책을 강조하기 때문에 대칭이 무너진다. 전서와 예서는 붓을 곧추세우고 붓의 중심이 선획의 중심을 통과하는 중봉이라는 서법을 유지하지만, 예서에서는 가로획을 쓸 때는 파책을 강조하여 중봉이 흐트러지고 붓을 옆으로 대고 모나게 꺾는 잠두연미를 만들어낸다. 해서는 가로획의 오른쪽 끝을 오른쪽 위로 치켜 긋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잠두연미로 표현되는 예서의 오른쪽 끝부분과 차이가 난다.
해서의 대표 주자는 왕희지다. 왕희지 필법은 서예를 하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들이 없다. 그만큼 유명한데 정작 그의 해서체 예술작인 「난정서」는 원본이 없고 모사본만 존재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몇 차례 서예 전시를 가고 서예를 잠시 배우기도 하면서 한자의 수많은 글자체를 보며 매혹을 느꼈다. '전각'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가 전시를 하나 둘 보면서 그 오묘한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었고(전각의 대가인 오세창, 김태석) 방학 기간 한달 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一(한 일)'자만 미친 듯이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른 학우들과 선생님께서 쓴 글씨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금석학의 대가였던 김정희를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중국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간략하게 책 소개를 이 정도로 마치고자 한다.
 
이 책은 놀랍도록 재밌는 책이다. 5백여페이지가 순삭되는 체험을 했다고나 할까. 뒷페이지가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보통 인문 책의 내용 특성상 어렵게 쓰기는 쉬워도 쉽게 쓰기는 참 어렵다. 그런데 저자의 내공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읽는 내내 즐거웠고 마지막까지 흡족했던 책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올해의 책에 반드시 들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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