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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년이 온다

category 리뷰/책 2023. 5. 19. 13:31

5월 18일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 어제로서 43주년이 되었다.

그동안은 주로 회고록 등을 통해서 사건 일지를 들여다보듯 최대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애썼던 듯하다. 그래서 사건과 관련한 대표작인 이 작품을 선뜻 읽기가 망설여졌다. 이제야 읽었던 이유이자 변명이다.

 

4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5.18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어제 오전 늘 그렇듯 신문을 펼쳐 들고 기사를 훓어 읽다가 5.18과 관련한 기사들을 몇 건 접했다. 사건 이후 꽤 시간이 흘렀으니 참상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세대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20/30대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마침 관련 기사가 있었다(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3051709480005826). 물론 이들의 생각이 광주에서 살고 있는 20/30 세대 전체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도 생겨났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광주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은 갑갑해져온다. 메인 고리인 전두환은 이미 숨졌고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죄를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진실이 몇 개의 정직한 언론을 통해, 외신 기자 등의 사진, 영상 등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다만 당시에는 신군부 군홧발 아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총 6장을 읽는 동안 마음을 연신 쓸어내렸다. 특히 2장에서는 시신이 트럭에서 내던져지고 불태워지는 일을 주체가 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객관적 사실을 그림으로 그리듯 묘사하니 그것을 읽는 일은 역시나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가 아니라 "너"라는 단어로 주체를 표현한 것은 자신을 사물처럼 객관화시켜 제3자처럼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닐까. '너는 방관자야. 또는 너는 구할 수 있었어(용기를 냈다면) 그러지 않았잖아! 너는 결국 피한거야!' 스스로를 제2의 가해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무고한 시민이 총검에 폭력에 희생되는 동안 목숨을 부지하고 지키려 했던 사람을 욕할 수 있을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다. 마음으로는 구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 폭력이 두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시민들이 많이 다치고 죽으면서 병원의 병상은 모자랐고 어느 순간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온다. 결국 상무관에 시신을 안치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으면 확인하게 하는 작업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태극기로 관을 감싸고 합동 영결식이 이루어질 때 애국가가 불린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이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나라란 게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착잡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혐의자라고 단정한 이를 추적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강제로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과정도 자세히 묘사된다. 판옵티콘처럼 설계된 감옥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그 눈과 폭력의 현장을 탈출할 수 없었던 수없는 이들을 가만히 숨죽인 채 생각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모든 이들, 그리고 이를 지켜본 이들, 소식을 들은 이들 모두가 이 일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간접적으로 책을 통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접한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에게 이 일은 시위, 피 냄새, 폭력일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이 일은 괴로워서 잊고 싶은 일일지 모른다. 

 

인간의 성(性)은 과연 어떤 것일까? 성선설 또는 성악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인간의 물성이 선하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했고 다만 좋은 일들을 행하면서, 좋은 생각들로 조금씩 개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래도 얼마 전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광주를 찾아 직접 마음을 전한 일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부디 유족분들의 마음이 치유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진실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 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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