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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category 리뷰/책 2023. 3. 27. 11:14
우리 인생에서 보통 몇 번인가 부딪혀야 하는 어려운 상황 중 하나를 나는 통과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과 부딪혔을때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나이에 따라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 삶은 나뉘며, 또 저울에 배분되듯 양쪽 접시에 고스란히 놓인다. - P278~279
 
사람마다 인생에 몇 차례의 어려움과 곤란이 찾아온다. 부모님 사업의 실패, 사랑·친구 관계의 파괴, 지인의 죽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 직장에서의 해고 등. 이런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비슷한 어려움이더라도 처음, 다음, 그 다음...에 각각 다르게 대처하는 듯하다. 이는 본인의 경험에 따른 판단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 외부 매체 등에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도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이전보다는 감정적으로 덜 아파했고 좀 더 현명한 방식으로 대처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나무의 나이테가 나이를 말해주듯 사람의 나이는 경험치를 쌓이게 한다. 그것은 똑같은 방식을 낳지 않고 대처한 방식에 따라 삶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것이 찬성과 반대처럼 이분법으로 나누어진다면 선택이 쉽겠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지가 다양하다면 오히려 나중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을 때 그 선택지는 더 늘어날테니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3권의 전반부는 화자의 꿈, 예술,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후반부는 질베르트와의 사랑-이별이 주 테마다.
 
어느 날 집에 아버지 지인인 외교관 노르푸아 씨가 찾아온다. 나는 극장에서 하는 공연 「페드르」를 보러 가고 싶었다. 헌데 담당 의사가 모든 여행을 금지했고 당연하듯 부모님도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에 대한 염려, 공연을 보러 가고 싶은 충동과 열망. 이 두 저울에서 그는 선뜻 선택을 내리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가 결정 장애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노르푸아 씨가 구세주가 되었다.
 
저울 하나에는 ‘엄마를 슬프게 하고 샹젤리제에 가지 못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또 다른 저울에는 ‘장세니스트적인 창백함과 태양의 신화‘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런 낱말 자체가 내 정신 앞에서 점차로 모호해지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고 또 모든 힘을 잃었다. 나의 망설임은 점점 더 심한 고통이 되어 만일 지금 내가 극장에 가기로 결정한다면 그건 단지 이 망설임을 중단하고 거기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 P38
 
공연장 뒤의 모습을 상상해 본 일이 있는가? 배우나 가수, 스탭들이 무대 뒤에서 정신없이 준비하는 모습. 나는 이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 속이 흥분으로 공기처럼 차오른다.
고등학교 시절 합창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느 날 도 경연이 있어서 대회에 참석했다. 몇 개월을 노력해 준비한 대회였다. 대기 전 무대 뒤 장막에서의 순간, 본 무대가 시작되었을 때 쏟아지던 조명의 빛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 감정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걱정, 불안, 두렵고 공포스러운데 무대를 경험해보고 싶은 흥분과 설레임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내 기쁨은 커튼이 내려진 막 뒤에서 마치 병아리가 알껍데기를 까고 나오려 할 때처럼 어렴풋한 웅성거림을 식별하기 시작하면서 커졌고, 이윽고 그 웅성거림이 높아지면서 갑자기 우리 시선이 뚫고 들어갈 수는 없지만 그쪽에서는 우리가 잘 보이는 그 세계로부터, 마치 화성에서 온 신호만큼이나 그렇게도 감동적인 개막을 알리는 세 번의 위압적인 두드림 형태로 분명히 전해졌을 때 더욱 커졌다. - P43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할머니에게서 오페라글라스를 받아오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내 망막을 통과한 형상은 내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보는 모습은 실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인가. 화자는 어지러움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내가 연구하고 싶었던 장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자 할머니가 오페라글라스를 주셨다. 우리가 사물의 실재를 믿을 때 단지 인위적인 수단을 써서 사물을 보여 주는 것과 그 사물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완전히 같지 않다. 확대경에서 내가 본 것은 더 이상 라 베르마가 아닌 그녀의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페라글라스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어쩌면 내 눈이 받아들인 이미지는 거리감으로 축소되어 더 이상 정확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두 라 베르마 중 어느 것이 진짜였을까? - P47
 
우상과의 만남은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다. 베르고트는 나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다. 온화한 모습의 백발 시인을 상상했던 나는 땅딸막한 키의 투박한 모습의 그를 만나고 실망한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 세계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베르고트는 삶을 글로 옮기는 법을 아는 대가였던 반면 노르푸아 씨는  작가가 꿈인 나에게 이리 저리 훈수를 두며 일명 '명예를 얻거나 돈 되는 글쓰기'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해댄다.  노르푸아 씨는 그를 (때로 저속하며, 남에게 책처럼, 그것도 자신의 책이 아니라 지루한 책처럼 떠들어 대는 작자) 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베르고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는 아니라고 보인다. 삶을 반영한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은 분명 다르다는 생각이다.
 
부모님은 내가 게으르다고 하지만 위대한 작가와 같은 살롱에서 보내고 있으니 내 재능에 가장 유리한 생활을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이 재능을 자신의 내부에서 만드는 일로부터 면제받으며, 또 타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의사와 자주 시내에서 식사하는 것만으로(모든 건강 규칙을 무시하고 최악의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서도) 건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 - P271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나타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난 한 번도 소나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소나타에는 우리 삶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삶보다 덜 환멸스러운 이 위대한 걸작은 처음부터 작품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 - P185
 
클래식 음악 작품 중 일명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몇 번 이상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그 작품이 내 머리와 가슴에 각인되면 그것이 추억처럼 박혀 버려 그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마성처럼. 이는 미술 작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 번 보고 어떻게 느낌이 딱 오겠는가. 작품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개인에게 걸작은 없다. 그렇다고 하니까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또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음악 자체의 예술성을 이해하여 그것이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 음악을 들을 때의 내 주변의 상황과 풍경이 그 음악 감상에 더 큰 감상을 불러일으켜 뇌리에 박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가장 세련된 환경에서 살고 가장 재치 있는 화술과 가장 폭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그들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멈추고 자신의 개성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만들어, 비록 현재의 삶이 사회적으로 또 어떤 점에서는 지적인 면에서조차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 삶을 거울에 반영하는 자이다. 천재란 사물을 반영하는 능력에서 나오지 반영된 광경의 내적인 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 P227
 
 
질베르트는 스완 부부의 딸이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집에 드나들 수 있었다. 물론 나의 부모는 그 집안을 전체적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어쨌든 나는 질베르트를 좋아했다. 하지만 질베르트도 한 얼굴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분명 그 사람의 전체적인 모습이 다 100%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어느 단면을 좋아할 뿐이다. 내가 질베르트에게 기대한 것은 모든 것을 만족하는 수호천사 같은 그런 얼굴이었을까. 인간은 선과 악을 함께 갖고 있는데 선만 갖고 있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한 것 아닌가.
 
질베르트가 외동딸인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두 명의 질베르트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나온 두 성질이 단순히 그녀 안에서 섞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두 성질이 서로 그녀를 가지려고 다투었고, 게다가 두 성질이라는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 제3의 질베르트가 그동안 다른 두 질베르트의 희생물이 되는 고통에 시달렸음을 추측하게 하기 때문이다. - P247
이 두 질베르트 사이의 간극은 너무 커서 당신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졌는지 생각해보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 P248
 
내가 바라보는 상대는 언제나 움직인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테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항시 변하고 움직이는 존재다. 멈춰 있지 않다.
 
어쨌든 나는 질베르트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서 올 편지를 기다린다. 어느 순간 이후에는 그마저도 기대를 스스로 접어갔지만. 어쩌면 사랑이나 감정으로 인한 아픔이나 고통보다는 주변의 상황이나 그런 것으로 인해 타격을 받았을 때, 또는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때 슬픔은 더 가중되는 듯하다.
 
사랑하지 않을 때라야 우리는 그 사람의 움직임을 고정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에겐 언제나 실패한 사진만이 있다. - P117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 않고 다음 날 약속의 가능성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랑을 단념하는 사람들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고 가장 다정해 보이는 표현을 그 슬픔을 초래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한다. 말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만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 말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말한다. - P326
 
그 어떤 것도 영속성과 지속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 고통조차도.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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