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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category 리뷰/책 2022. 8. 23. 12:58
일본에서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정은 '동양'의 창출 과정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사를 중심으로, 일본사의 타자로서 한국을 비롯한 주변의 역사를 배치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타자화가 식민지 조선을 향해 나타난 것으로, 일본사의 타자로서 한국사가 재구성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P21
 
이 책은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권째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후발 주자로 근대적 학문 연구 방법을 적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과 지배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식민사학은 그렇게 등장한 논리다.
식민지기 일본인 연구자들은 '반도론', '타율성론', '사대주의론', '정체성론', '일선동조론' 등으로 다양한 논점을 제시하며 정당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렇다면 제목의 만선사는 무엇인가? '만선', '만선사'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등장했으나 이는 당시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어느 범위까지를 지칭하는지 정해지지 않은채 모호한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와 주변국 침략으로 인한 제국 판도의 팽창 및 이와 동시에 일본에서 진행된 근대 역사학의 성립 전개에 따른 새로운 역사공간으로서 '동양'의 형성,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한국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거대한 문제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과 더불어 만들어진 용어인 '만선(滿鮮)'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였던 '만선사(滿鮮史)'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 P23
 
만선사를 유일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자는 이나바 이와키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만주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라 조선사, 일본사, 한중관계사, 한일관계사로 범위를 확장하면서 삶의 마지막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1910년대  그는 『만주발달사』 저술을 통해 몽골-중국-만주 셋 간의 역학관계를 비롯, 대륙의 민족들이 만주에 미친 영향을 넘어 대륙과 일본의 관계까지를 만주사의 범위로 정의하였다. 그는 먼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대한 원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송대 이후 북방 민족의 힘이 강해지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 왕조를 회유하면서 중국 문화가 한반도를 장악했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성리학과 가례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주사에 대한 관심을 조선으로 확장하는 한편, 조선사를 연구해온 다른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잇기도 했으나 비판하거나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기존 연구자들은 조선의 남부 지역과 일본의 인종적 근친성을 강조하며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국가를 한국사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려고 한 반면 그는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요소로 한반도를 꼽으며 거리를 두었다.
 
1920년대 『조선사』 편찬 임무를 위해 조선에 들어온 그는 조선의 자료를 이용하며 조선사를 고증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의 정체와 원인을 송 이후 이이제이의 외교수단이 강화되고 성리학의 가례가 반도에 이식되었다는 것에 대한 고증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이 분리된 이후 반도의 왕조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반도에 침략 or 교류한 중국 세력과 만주 장악 세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조선시대의 정치가 귀족정치을 벗어나지 못했고 명의 법과 제도를 모방하면서 귀족과 관료가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1930년대 그는 만주국 건국 후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만주사에 대한 통사를 『만주국사통론』으로 정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나바는 만주사의 기원을 숙신으로 보고 중국의 한족과 구별되는 만주만의 특징을 바탕으로 비한족이 만주라는 땅에 거주하며 거쳐간 역사를 기술하였다. 만주의 지리적 역사가 아닌 만주 민족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로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는 만주와 몽골을 함께 장악한 거란의 태조와 청 태조, 강희제의 정복 활동을 만주족의 발전을 위한 전제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만주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만주의 발전을 위해 만주만이 아닌 몽골까지 장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만주국은 당시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건국의 정당성이 필요했다. 이는 '오족협화'라는 건국 이념에 대한 선전으로 활용되는 동시에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몽골군의 전쟁에 대한 합리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대륙의 역사적 전개를 체계화면서도 대륙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한사군의 설치가 일본에서도 국가 성립의 계기를 만들었다면서 일본의 국가의 성립 시점을 3세기로 끌어올렸고, 임나 일본부의 출현 시기도 앞당겼다. 고대 중국과 일본의 교통으로는 특별히 중국의 위(魏)에서 히미코 여왕에게 금인자수를 보낸 일, 남송 정벌을 위해 쿠빌라이가 흑산도 일대를 조사하고, 탐라를 장악하며 일본으로 국서를 보낸 일 등을 제시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결과 만주에 대한 명의 견제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막대한 제정 지출로 청이 흥기할 수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대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대상으로까지 만선사의 범위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만선사를 구성하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였다.
 
일제 시기 일본 연구자들의 이름을 공부하며 알게 되는데도 이렇게 매번 양파처럼 새롭게 알게 되는 점이 놀랍다.
일본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다. 계속 반복해서 정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일단 세 명의 학자들을 정리해둔다.
 
일단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선사 연구학자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으니 기억해야 한다. 그는 대륙과 만주와 조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였고 북방의 역사를 위해 단군 신앙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식민 사학자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흘러갔음을 극도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마니시 류를 기억하자. 그는 일본에서 조선사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학자다. 조선사 연구 논문을 최다 발표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한반도 남부의 인종과 일본인을 동종으로 보는 등 식민사학자의 논점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도리야마 기이치를 더한다. 그는 발해사를 연구하였으며 이나바 이와키치의 만선사 연구학 중 발해 관련하여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