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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정 - 초편 읽기

category 일상다반사/책 이야기 2022. 7. 4. 13:12

서양사정 초편을 읽었다.

 

저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 계몽을 이끈 사상가로 조선 말 개화파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서양사정은 서양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와 당시 서양의 일부 나라의 역사, 정치, 군사, 경제 분야에 대해서 소개한다.

 

초편은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수집한 자료와 자국에 있던 자료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내가 감히 생각하건대, 오직 해외의 학문(文學)과 기예(技藝)만을 강구할 뿐 각국의 정치풍속이 어떠한지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설령 그 학문과 기예는 얻었을지언정 그 경국의 근본은 살피지 않은 것이기에, 실용實用에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를 초래함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본디 각국의 정치풍속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읽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세상사람은 앞서 언급한 지리 이하의 여러 학문을 빨리 배우기만 원하기 때문에 역사를 읽는 자가 매우 드물다. 실로 학자의 결점이라 하겠다. - P23

 

 

19세기와 20세기는 신문의 시대였다. 

 

조선도 개화기가 되면 한성순보 이후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등장하며 소식을 빠르게 전하고 대중을 계몽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처음에는 순한문이었지만 국한문혼용, 국문 전용 신문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계층에게 지식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된다.

 

신문은 매일 출판하는 것도 있고 7일에 한 번 출판하는 것도 있다. 서양 각국, 그리고 해외라도 서양인이 거류하는 땅에서는 반드시 이를 출판하는 곳이 있다. 이를 가장 활발하게 행하고 있는 곳으로 잉글랜드의 런던과 아메리카의 뉴욕이 천하제일이다. 런던에서는 만국의 새로운 소식을 모아 자국의 새로운 소식과 함께 기재해 전 세계에 포고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런던 신문이다. 신문의 보고는 신속하믈 취지로 하니, 증기기관으로 판을 찍어 한 시간에 1만 5,000매를 만들 수 있다. 제본이 끝나면 증기차와 증기선 등의 급편으로 여러 곳에 보내는데, 그 신속함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놀라게 한다. 

- P50

 

 

 

서양도 신문은 인쇄 기술이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뻗어나갔고 남성 뿐 아니라 여성의 문자 해독율 증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40년부터 미국의 도처에서 일종의 '열독시대'가 찾아왔다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신문과 도서출판업의 빠른 확장이 이것을 자극했다. 특히 미국의 동북부는 인쇄문화가 크게 피어난 지역이었다.
- P2101

 

루시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앤』이나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인 앤 셜리와 조도 신문을 출판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등을 한 바 있다.

 

 

 

 

 

중년이라도 빈곤이 극심할 때는 잠시 구빈원에 들어가 급한 불을 끄고 생계의 방편을 구해 다시 나가는 자도 있다. 또한 가난한데 자식을 낳아 양육할 때 매일의 직업에 방해가 되어 이 때문에 궁핍해지는 경우에는 낮에만 자식을 구빈원에 맡겨두고 밤에는 집에 데리고 돌아가는 자도 있다. - P55

 

구빈원에 대한 서술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이만큼의 지원이 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가난을 구제한다는 것은 복지의 문제다. 살기 힘든 국민을 돌보기 위한 구제 제도가 있다는 것은 효과성을 떠나서 접근 목적은 훌륭하다고 보인다.

 

구빈원을 생각하면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떠오른다. 당시의 런던 빈민가는 슬럼화되어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더럽고 지저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그곳의 크기가 점점 거대해졌다는 걸 보면 얼마나 당시 경제의 불균형 문제가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박람회는 원래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취지로 하니, 상호간에 다른 쪽의 장점을 취해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것이다. 비유하면 지력知力과 연구(工夫)를 교역하는 것과 같다. 또한 각국 고금의 물품을 보면 그 나라의 연혁과 풍속, 인물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도 고찰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노력하고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경계하니, 이에 따라 세상의 문명에 도움이 되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 P63

 

박람회는 당시 신문물을 홍보하는 전시장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타 인종을 배제하거나 하등시하는 현장으로 박람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전시관은 인류학관(Ethnological Expositions)으로, 아이누인을 포함해 세계의 20여 개 토착 부족 집단과 그 생활 면모를 모아놓았다. 이는 전체 박람회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류 동물원'으로, 당시 미국 민족학국(Bureau of American Ethnology)의 책임자 윌리엄 존 맥기(Wiliam John McGee)가 주재하고 유명 인류학자 다수가 참여했다. 맥기는 "원생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이용해 "흑암의 원시에서 고등의 계몽으로, 야만에서 문명으로 인류의 .... 역정"을 표현하려 했다고 명확히 밝혔다. 즉, 인류의 발전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진행하며, 각 종족과 민족은 서로 다른 단계를 대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P358

 

인류학관은 1904년 박람회에 있던 전시관으로 인류의 종을 전시한다는 명목하에 인종과 종족을 순위를 매겨 배치하고 서양인은 우등 인종으로 흑인 등 타 인종은 열등한 인종으로 배치시키며 서양인은 우수하고 서양 문명은 우수하다는 논리를 설파하는 장으로 이용했다. 정작 야만인은 누구인지 묻고 싶다. 

 

 

 

증기차란 증기기관의 힘을 빌려서 달리는 차다. 기차 한 량에 증기기관을 설치하고 이것을 기관차라고 하는데, 기관차 한 대로 다른 차 20대나 30~40대를 견인할 수 있다. 이것은 무겁고 견고한 네 개의 철륜으로 달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길을 갈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길을 평평하게 하고 차바퀴가 접하는 곳에 폭 2촌寸 두께 4촌 정도의 철선 한 쌍을 깔아 항상 이 위를 왕래하니, 이를 철도라고 한다. 철륜으로 철도를 달리는데, 기관차가 크고 무겁지만 이를 움직이는 것은 매우 용이하다. 가을 내가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파리에 이르렀을 때 그 거리가 일본의 셈법으로 750리 남짓했는데, 이 길을 21시간 만에 달렸다. - P67

 

증기기관의 발명, 그리고 기차의 발명은 아마 19세기 발명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일 것이다. 육상으로는 마차, 수상으로는 배가 전부였던 당시 세계에서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가속도가 붙었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19세기의 공업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보다 효율적인 기술적 기계적 전환이 꾸준히 일어났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의 사용은 그 자체의 나선형 발전과정을 열었다.

1785년, 와트의 증기기관이 영국의 한 면방공장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830년, 유럽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공업지역의 한 곳인 작센에서 대다수의 방직공장은 여전히 주로 수력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철도가 열리자 저렴한 석탄이 공급될 수 있었고 많은 지역에서 증기기관으로 전환하여 이익을 보았다. 이제 석탄채굴이 공업화의 핵심이 되었다. - P1758~1759

 

화석 연료에 기반했던 19세기 공업에 증기 기관의 발명은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영국은 와트의 증기 기관 발명으로 제국의 발전이자 핵심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전신과 가스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전신이 없었다면 1/2차 대전에서 그만큼 빠른 소식을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저를 통과하는 전신은 당시 최신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스등이 발명되기 이전은 촛불을 들고 다녀야만 했으니 가스등을 본 당시 사람들은 충격이자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2권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과 화친의 두 논의가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는데 인심의 향방이 결국 전쟁론으로 귀결되어 은밀히 콩코드에 무기를 모았으니, 그때가 1775년 4월이었다. 잉글랜드의 장군 게이지Thomas Gage는 이 소식을 듣고 4월 19일 지휘관 핏케언John Pitcairn으로 하여금 부대 하나를 지휘해 콩코드로 향하게 했는데, 도중에 렉싱턴에서 무기를 휴대한 자를 봤다. 이에 무기를 내려 놓으라고 명령했지만 응하지 않자 바로 발포해 몇 사람을 죽였고, 콩코드에서도 싸워 쌍방에 사상자가 많았다. 이때부터 혈전이 시작되어 결국 수년간의 소란에 이르게 된 것이다. - P80

 

미국은 1770년대 영국의 식민지로 세금을 내야 했던 처지였고 이를 악용한 영국은 가혹한 세금 부과로 미국의 민중을 들끓이게 만들었다. 

 

 

 

 

1775년 4월 18일 영국군은 콩코드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위해 새벽부터 보스턴에서 출발하였으나, 전령을 통해 이 소식을 이미 접수한 민병대가 렉싱턴에서 기다렸고, 메드퍼드와 메노토미에서도 합류해 콩코드로 집결하였다. - P119

 

렉싱턴 민병대는 존 파커를 필두로 하여 콩코드를 공격한 영국군을 대파하며 아메리카 독립 전쟁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렉싱턴 전투는 메사추세츠의 다른 지역과 코네티컷에 통신문으로 송부되었다. 

이후 조지 워싱턴이 13개 주를 대표한 2차 대륙 회의 사령관으로 선출되면서 영국군과 전쟁을 본격적으로 이어나가게 되었고 토머스 제퍼슨 등 5인이 작성한 독립 선언서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다.

 

 

 

 

유럽 각국의 사람들이 여기로 이주하면서 시종일관 원주민과 화평하지 않고 걸핏하면 전투를 일으켰다. 그러나 종래 이 원주민은 풍속이 야만적이고 천박해 오직 강하고 용맹하기만 할 뿐 학문과 기술을 알지 못하니 애초에 유럽인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 P90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 문명에 대한 낙관과 신봉이 군데 군데 나타난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서양 문명과 개화에 대해서 환상의 감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개화 지식인들도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일본을 배워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이 더해졌을 것이다. 

 

 

 

 

1500년대부터 1700년대까지 네덜란드 무역이 성대함과 부유함의 극치에 이르렀던 까닭은 모두 정부가 그 취지를 법률을 관대하게 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 프랑스, 기타 유럽 각국에서 종파나 국법의 논의 때문에 내란이 발생해 서로 침공했고 국민 모두가 그 참혹함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홀로 이 기회를 틈타 정교하게 법을 세우고 각국에서 추방당했거나 난을 피해 도망 오는 자를 모두 국내로 받아들여 법률을 관대하게 하고 그들을 대우해 재능이 있는 자는 후하게 썼다. 또한 해외 식민지로 사람을 이주시켜 남쪽과 북쪽의 산골에서는 그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개척하도록 하고 절대 정부의 규율을 세우지 않았다. 어떤 소송이든 편파 없이 신속하게 재판하고 세금은 가볍지 않았지만 전곡의 출납을 바르게 하고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 P113~114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이 서양 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인 나라라면 역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일 것이다. 네덜란드는 영국이 부상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해상을 지배하며 주름잡던 나라였다. 경제적으로 부강해진 것만으로 강대국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제시한 대로 결국 열린 태도와 개방적인 문화가 부강의 기반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네덜란드가 쇠퇴하게 된 것은 영국의 부상과 더불어 프랑스 나폴레옹의 등장이었다. 나폴레옹은 네덜란드 뿐 아니라 영국에도 타격이 되었다. 

 

대란大亂이 시작되어 프랑스에 병합당해 1795년부터 합중정치를 세웠는데, 1806년에 프랑스가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루이 나폴레옹을 네덜란드 왕으로 삼았다. 4년이 지난 1810년 또다시 프랑스가 그를 폐하고 네덜란드 땅 전부를 프랑스제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때 네덜란드의 무역이 완전히 땅에 떨어졌고 해외 식민지도 모조리 잉글랜드에 빼앗겼다. - P112~113

 

 

3권은 영국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은 복잡한 왕조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 정리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이 책에서만도 25페이지에 걸쳐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오래 전 도움을 받은 책인데 영국의 역사를 잘 정리하고 있다.

 

영국의 기원부터 노르만 왕조부터 플랜테저넷 왕조, 튜더 왕조, 스튜어트 왕조, 하노버 왕조, 빅토리아 치하 이후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해놓고 있다.

 

노르만이 1066년 잉글랜드를 통일하고 왕으로 즉위한 이후의 역사는 왕조별로 가계도를 그리면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아일랜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아서 아쉬움이 있다.  

 

얼마 전 아일랜드 자유국 선포 100주년으로 특집 방송을 한 '역사저널 그날' 편이 있어 클립 링크를 가져다 놓는다. 

 

https://youtu.be/Jc0lXR1vEpU

 

https://youtu.be/P-X5_0uuCZs

 

재상 피트가 재직 동안 세운 큰 공 중 하나는 아일랜드를 합병한 일이다. 아일랜드는 에로부터 잉글랜드의 식민지였지만 본국 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그곳의 원주민과 정사를 의논하니, 스스로 별도의 정부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798년 그 지역 내의 소란이 일어남에 따라 재상 피트가 그 기회를 틈타 완전히 이를 제압해 별도의 정부를 폐하고 새로이 법을 제정했으니, 아일랜드에서 인물 100명을 선거해 하원의 의사관으로 삼고 상원의 의사관도 선거하는 제도를 세운 것이다. - P143

 

아일랜드 기근 이후 영국 정부가 한 행적은 치를 떨게 만든 것이었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 내에서 피트는 어떤 이미지로 인식될지 궁금하다. 부정적인 평가가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국 정치에 대한 평가를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정치는 시대에 따라 변천해왔고 그때그때의 지식과 경험에 따라 형태를 만들었으니, 건국할 때 미리 정치의 본론本論을 세우고 이후 그것을 실천(實地)으로 옮겼던 것이 아니다. 다만 모르고 의식하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그 경황을 살펴보니 마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어 후세를 배려한 것 같았다. 거의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다. 또한 도리에 따라 논하자면 이처럼 자연에 맡겨 인의를 섞지 않은 정치에서는 반드시 난잡한 일이 있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은 식자識者도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 P147

 

너무 붕 띄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국의 정치체가 입헌정치체인데 일본도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띄우는 면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 하면 식민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식민지가 오히려 자국에 방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내놓는다. 

 

잉글랜드의 성대함이 그 나라의 식민지가 넓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해외 식민지에 가서 무역하는 것은 다른 독립국과 무역하는 것의 편리함만 못하다. 게다가 식민지가 전 세계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 본국과의 거리가 대단히 멀기 때문에 전시에는 적군의 습격을 받기 쉽고 이를 수호하는 데 많고 적은 노력이 들며 군비가 소모되지 않을 수 없다. 반복해 숙고하건대, 해외 식민지는 본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잉글랜드가 부강하고 문명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까닭은 그 나라의 지리가 편리해 산물이 많은 것과 인재가 많아 정치가 공정한 것 때문이다. 이미 지리적 이점을 얻은 데다 정치가 공정하므로 해외 식민지를 잃어도 조금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 P160

 

대영제국이라는 명칭이 당시의 영국인들에게는 자부심으로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식민국와 지배국이라는 것에는 이미 약육강식과 힘의 논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식민 국가와 식민지 인들의 입장에서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강자의 논리는 과연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지금 사람들의 씁쓸한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