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해방과 지배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치스차코프와 하지의 인품 차이도 약간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위치에 따른 지정학적 조건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경을 접한 소련은 한국과의 사이에 민중 접촉을 포함한 전면적 관계를 기대한 반면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에게는 한국과의 관계를 소련처럼 폭넓게 발전시킬 길이 없었다.
한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미국은 단순하고 강력한 지배구조가 필요했다.
[67] 식민지 경찰이 미국 경찰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전국적 '동일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국가든 자본주의국가든 최소한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경찰을 상명하복의 '동일체'로 만들지 않는다.
전국적 '동일체'로서의 경찰은 전체주의국가에서 권력의 도구가 되는 반면 분권화된 경찰은 소속 지역사회 주민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다.
통치자를 위한 국가경찰이냐, 국민을 위한 민주경찰이냐 하는 차이다.
[75] 식민지시대 말기 전 조선의 경찰력은 2만 명이었는데 1946년 10월까지 남한 경찰력은 2만 5천명이었다. 남한만 놓고 보자면 갑절로 늘어난 것이다.
미군정하의 남한은 식민지시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이 필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
[77] 바람직한 변화란 본질적 가치를 지키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임정의 본질적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성 아닙니까?
임정 밖에도 독립동맹, 재미한인회 등 해외 독립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정이 대표적 상징서을 가지는 결정적 조건은 1942년 가을의 좌우합작입니다.
비록 현실적 여건 때문에 모든 독립운동을 임정의 품 안에 바로 끌어안지는 못해도 여건만 된다면 모두 끌어안겠다는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92] 임정에 버금가는 해외 독립운동의 주체로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 정책에 익숙한 독립동맹은 해방공간에서 좌우 대립을 완화하는 힘을 가진 존재였다.
[101] 미군정이 6개월째로 접어드는 1946년 2월 시점에서 하지 사령관의 실적은 여러모로 낙제점이었다.
그럼에도 하지 사령부 체제가 유지된 것은 국제주의와 국가주의가 대립 하는 미국 정계 상황으로 인해 실용적 기준이 아니라 편 가르기 기준이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가 민생 문제를 소홀히 하고 소련 측과의 대결에만 몰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체면과 지위를 지키는 열쇠가 거기 걸려 있으니까.
1월 말 사의를 표명했다가 철회한 후 그는 미소공위 대책 마련에 부심했고, 그 결과물이 민주의원이었다.
[104] 1946년 2월 신민당을 만든 것은 독립동맹 인사들이었다.
1942년 7월 중국 화북지방에서 결성된 독립동맹은 중경 임정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실제 활동에서는 오히려 더 활발한 모습을 3년 동안 보였다.
중국공산당에 의지해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통일전선을 적극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에 공산당원이 아닌 민족주의자 김두봉이 주석으로 독립동맹을 이끌었다.
김두봉은 해방 후 귀국을 앞둔 시점에서야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09] 경제사학자 백남운은 1925년 연희전문 부임 이후 사회경제사 연구를 통해 마르크시즘 이론의 권위자가 되었다.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하면서도 민족국가 건설의 중요성을 앞세운 그의 정치노선은 중도좌파를 위한 강력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111] 군정청이 국경일을 결정한다? 그것도 남반부의 군청청이? 주제넘은 짓이다.
군정청이 무슨 근거로 이런 짓을 했나? "민주의원의 추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민주의원은 어떤 기구인가? 비상국민회의의 두 영수 김구와 이승만이 뽑은 28인의 최고정무위원회에 비상국민회의 쪽의 아무런 공식 조치 없이 '민주의원'이란 이름을 붙여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구로 만든 것이다.
국경일 지정을 군정청이 결정해달라고 나선다는 것은 '을사5적' 못지 않은 '병술23적'이다.(2월 14일 회의 참석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준연, 이의식, 백관수, 최익환, 김법린, 김도연, 김려식, 박용희, 장면, 조한구, 황현숙, 백남훈, 백상규, 권동진, 황진남, 원세훈, 김선, 김붕준, 안재홍, 오세창이었다.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은 불참.)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며 주어진 상황에서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경일 결정을 미군정에게 추천하다니! 이 가운데 내가 존경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 행위 하나만은 용서할 수 없다.
[117] 3.1절 기념행사는 결국 남산공원과 서울운동장에서 따로따로 열렸다.
[122] 중세적 봉건성에는 피지배자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보주의 신념에는 전근대인 대다수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문제가 있다. 극소수 지배자에게만 유리한 체제를 수백 년 내지 천여 년씩 바꾸지 못하고 당하며 살아온 못난 존재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깨달음으로써 근대인이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자기도취가 깨어졌기 때문에 ‘탈근대’ 얘기가 나오는 것이고, 전근대 사회를 무조건 깔보던 자세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백성 대다수가 근대적 의미의 ‘공민’으로서 권리를 누리지는 않았어도 지금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보다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더 잘 받고 살았으며 조선 왕조가 대부분 기간을 통해 빈약한 다수를 부강한 소수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더 나은 기능을 발휘했다고 나는 믿는다.
식민지배의 모순이 가장 심각하고도 광범하게 나타난 것이 해방 당시의 토지소유관계였다. 시장 원리에 맡겨둘 수 없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 이전에,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익을 자처하는 정당들, 심지어 한민당까지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의 필요였다.
(1946.2.22)
냉전의 출발점을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으로 흔히 보는데, 나는 일본의 항복으로 본다. 트루먼 독트린은 이미 존재하던 냉전 상황을 공식화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케넌의 장문전보도 새로운 상황을 만들자는 제안이 아니라 존재하는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논한 것이므로 내 관점에 부합하는 것으로 본다.
냉전에 관한 내 관점과 부합하는 것이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다. 냉전의 출발점도 그는 1945년 7월 미국의 원자폭탄 확보로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양대 승자인 미국과 소련이 전후 세계 패권의 양대 축이 될 것은 필연이었는데, 원자폭탄의 등장이 두 슈퍼파워 사이에 불균형 요소로 나타났고, 이것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ric Hobsbawm, <The Age of Extremes> 225-237쪽)
루스벨트 시대의 국제주의가 트루먼 시대에 국가주의로 옮겨가는 추세를 이 일기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일이 있다. 이 변화가 바로 미국의 ‘세계패권’ 장악 과정을 비쳐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협력의 틀 속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는 방어적 자세를 자기 기준으로 길을 열어가는 패권국가의 공격적 자세로 바꾼 것이다.
새로 취하는 공격적 자세를 정당화할 명분을 소련도 미국도 필요로 했다. 소련은 마르크시즘 이념에서 명분을 찾았는데, 미국은 ‘진보성’이 없는 자본주의를 명분으로 내걸 수 없으니 막연한 ‘자유민주주의’를 내걸고 그 막연성을 보완할 구체성을 소련의 ‘세계정복 야욕’에서 찾았다. 케넌은 그 야욕을 부정했지만 미국의 냉전 노선에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소련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 냉전론자들에게 필요한 케넌의 역할이었고, 그 위험성의 제한성에 대한 케넌의 설명은 그들에게 필요 없었다.
(1946.2.23)
볼셰비즘의 핵심은 전위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이었다.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되는 이 정예조직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정치조직이었다. 조직의 구속력과 구성원의 헌신도가 종래의 정당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레닌이 1902년부터 이런 전위정당 조직을 호소한 것은 러시아에 공산혁명을 위한 여건이 미비해서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17년 초까지 수천 명에 불과하던 당원을 몇 달 동안 25만 명까지 늘린 것이 10월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기초 사실은 다른 표시가 없는 경우 홉스봄의 위 책 54-84쪽 “The World Revolution”과 372-400쪽 “Real Socialism”에서 참고한 것임.)
이 전위정당의 정예성이 이후 코민테른이 지도하는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표준이 되었다.
(1946.2.25)
2월 20일의 제55호 법령 발포는 미소공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원하는 방법으로 이남 지역 민의를 대표할 통로로 민주의원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민주의원은 대표성이 극히 박약했고, 가장 두드러진 문제가 좌익 배제였다. 민주의원을 앞세워 미소공위에 임하려면 좌익의 항의와 반대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좌익의 조직적 활동을 억압하는 데 이 법령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후 사태의 진행에서도 그 사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1946.3.4)
한국 경제의 자생력은 분단 상황, 특히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크게 손상되었다. 이남 지역의 가장 중요한 생산품인 쌀 시장이 혼란에 빠져 이북과의 물자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치명적 문제였다. 해방 당시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반조건은 아시아 국가 중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정 기간에 빠진 ‘원조경제’의 수렁이 한국을 수십 년간 미국에 대한 예속 상태에 붙잡아놓게 된다.
(1946.3.8)
일본의 식민지배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범죄행위였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의식 때문에 그 범죄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엄정한’ 비판을 시도할 때, 거대한 범죄의 소소한 구성 요소까지 빠트리지 않으려 애쓰게 되기 쉽고, 그러면 범죄성이 애매한 영역까지 포함하게 되어 논란을 일으키기 쉽다. “식민지시대에 숨 쉬고 살기만 한 것도 친일이냐?” 하는 반론이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민족주의는 민족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강경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가치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온건한 민족주의다. 지나치게 강경한 민족주의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가진 것일 뿐 아니라, 쓸 데 없이 많은 적을 만든다는 점에서 민족의 가치에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강경한 민족주의 앞에서는 온건한 민족주의자도 반(反)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비(非)민족주의 입장으로 몰리거나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은 이런 구조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반민족주의가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반민족주의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도 민족주의 노선에서 온건한 기조를 지킬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 진영이 선명성 경쟁에 치중하는 것은 민족주의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이다.
(1946.3.15)
돌베어는 조선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을 경영하던 동양광업개발(OCMC)의 대리인으로, 1939년 운산금광의 독점권이 만료되었을 때 채굴권을 일본광산회사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한 인물이었다. 매각대금 817만 4천 달러 중 227만 달러만을 받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지자 돌베어는 미수금 590만여 달러 회수에 목을 매게 되었다.
곤경에 빠진 돌베어에게 이승만이 접근해 ‘광산 고문’이란 명목으로 조선의 광산 이권을 약속해주고 돈을 받았다는 이 스캔들은 재미동포 사회에서 이승만과 대립해 온 한길수가 터뜨린 것이었다. 한길수가 이 정보를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서 스티븐 얼리에게서 얻었고 스캔들이 터졌을 때 미군정의 조사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정병준이 곽림대의 <못잊어 화려강산>에서 인용한 것으로 볼 때 근거가 분명한 스캔들이다.
(1946.3.18)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주요 산업국 중 유일하게 생산력을 향상시킨 나라가 미국이었다. 향후 십여 년 동안 미국의 공업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은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서 군사적 절대 우위를 차지한 나라였다. 생산력과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에 선 미국은 국제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1946년 미국의 연방 예산은 620억 달러로, GDP의 30% 선이었다. 대공황 전 1920년대에는 3% 선이었던 것이 뉴딜 정책과 전쟁을 거치면서 팽창된 결과였다. 전쟁이 끝났지만 방대한 예산을 급격히 줄이지 못하게 하는 관성이 작용했다. 이 관성에 명분을 붙여준 것이 ‘공산주의의 위협’이었다. 120억 달러의 마셜 플랜 자금은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비 유지와 함께 미국의 예산 규모를 지탱해 준 큰 기둥이 되었다.
트루먼 시대의 미국은 루스벨트 시대의 미국과 달라지고 있었다. 국제주의 노선은 약화되고 있었고, 하지의 미소공위 사보타주 전술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동의가 미국의 정책결정 관계자들 사이에서 넓어지고 있었다.
(1946.3.21)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Supreme Command of the Allied Powers)는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감시 역할만 맡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다. 새 국가 건설까지의 과도임시정부로 기존 정부를 인정한 셈이다. 새 국가 건설도 기존 정부와 의회가 개헌의 방법을 통해 이뤄 나가도록 맡겨놓았다. “앞에서 기술한 제반 목적이 달성되고, 일본 인민이 자유로이 표명한 의사에 따라 평화를 애호하며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정부가 수립될 때에는 연합국 점령군이 즉시 일본에서 철수할 것”이라 한 포츠담선언 제12항이 새 국가 건설의 지침이었다.(<히로히토 평전> 555쪽)
패전은 일본인에게도 ‘해방’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선인에게는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지만, 일본인에게는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일본인은 군국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측면을 중시하느냐를 점령자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여지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서 제2차 세계대전 도발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를 피해자로 인정하고 독일에만 책임을 물었다.
미국은 일본을 살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피해자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규정을 피할 수 없는 것이 군국주의 국가였다. 모든 죄를 국가에 돌리고 죄 많은 국가를 없앤 다음 새 국가를 세우는 것이 일본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할 무렵까지 일본에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 헌법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한국과 일본의 상황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 ‘과도임시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인민의 개혁 욕구가 점령군사령부에게도 상당히 원활하게 수용된 반면, 한국에서는 이념적 색안경을 피할 수 없었다. 패전의 피해를 일본보다도 오히려 해방된 조선이 더 많이 짊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1946.3.22)
비상국민회의 추진 과정에서 비주류의 탈퇴로 임정은 그림자만 남았다. 임정의 최고 권력은 원래 의정원에 있는 것이었는데, 임정원이 1945년 8월 22일 회의를 끝으로 실질적으로 소멸되었으므로 그 3개월 후 귀국한 ‘임정’이란 실제로 그 집행기구인 국무위원회일 뿐이었다. 그 국무위원회마저 파탄을 드러낸 이제 김구 일파는 한독당을 세력 근거로 내세우게 되었다. 중경을 떠나기 전인 8월 28일에 당의-당강-당책을 발표한 후 거의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국내 기반도 없던 한독당이 1946년 3-4월 중 국민당과 신한민족당을 통합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가 혼란을 극복하는 열쇠라 생각하고 강력한 민족주의 지도력의 출현을 바랐다. 그래서 임정 추대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임정의 지도력이 무너진 이제 한독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국민당을 갖다 바치면서, 그는 천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사는 심정이었을까?
(1946.4.4)
1925년 비행기 면허를 취득한 신용욱(1901-1961)은 1927년 모국방문 비행대회 이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항공사업에 매진했다. 그가 1936년에 세운 신(愼)항공사업사를 대한항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1941년 조선항공사업사로 개칭한 신항공사업사를 모체로 1944년에 자본금 1천만 원의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새 회사 주식 20만 주 중 전시금융금고가 10만 주, 조선식산은행과 신용욱이 각 3만4천 주, 동양척식이 1만9천 주, 방응모와 김연수가 2천 주, 민규식과 고원훈이 1천 주를 불입했다고 한다. (<친일인명사전> “신용욱”)
(1946.4.7)
지방자치가 없는 바에야 강원도 경찰부장이 강원도 지사의 지휘를 받거나 서울의 경무국장 지휘를 받거나 ‘민주경찰’의 수준은 도토리 키 재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찰 업무를 지방행정에 종속시키는 편이 경찰과 인민의 사이를 좀 더 가깝게 하는 길이고 문명국에서 취하는 제도다. 그런데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도지사에게 맡겨두던 경찰 업무를 전국적으로 일원화하겠다는 극단적 파시스트 정책이 해방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만들어진 파시스트 경찰 제도가 아직까지 대한민국 경찰을 시민사회와 대립시켜 놓고 있다.
충성은 ‘충(忠)’과 ‘성(誠)’이 합쳐지는 것이다. ‘충’은 타인에 대한 진정성이고 ‘성’은 자신에 대한 진정성이다. 임명권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은 진정성이 없는 충성이다. 자기 이익 챙기는 길을 분식하기 위해 이용하는 충성이다. 이 진정성 없는 맹목적 충성이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둘러싼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1946.4.8)
그때도 법조인은 엘리트집단이었다. 엘리트의식은 두 갈래로 나타날 수 있다. 강중인처럼 그 동안 “내 한 몸 구하기에 여력이 없던” 세월을 반성하며 사회를 위한 엘리트의 책임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남들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엘리트의 권리를 생각할 수도 있다. 책임을 생각한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일만 벌어지는 특권체제를 견디지 못해 벗어났고, 권리를 생각한 사람들은 후일의 대한민국 법조인들에게 전통을 남겼다.
(1946.4.12)
인간의 행동에 대한 ‘보상 동기’와 ‘근원적 동기’를 구분해서 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세태를 반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보상 동기가 근원적 동기를 마비시키는 현상은 자본주의사회의 큰 약점인데, 이 현상이 한국 사회에 매우 심하다. 그냥 좋아서 하는 일,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행위다. 사람들이 모든 일에서 보상을 바라게 되는 세태는 인간적 가치를 등질 뿐 아니라 효율성마저 떨어지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1946.4.21)
우익 정당 통합 운동은 결국 한민당이 이탈한 채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한독당의 이름으로 합당하고 몇 개 군소정당-단체가 합류하는 것으로 18일에 결정되었다. 23일에는 중앙부서와 간부까지 결정되어 합당 작업이 끝났다. 김구는 9일 이승만의 탈당 권유에 중앙집행위원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중앙집행위원장 자리를 지켰고,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다. 그 외에 조경한, 엄항섭, 양우조, 최용덕, 안재홍, 명제세, 김여식, 최익환, 김경태, 박용희가 중앙상무위원으로 참여했다. 한독당을 보강한 모습이었다.
10-11일의 독촉국민회 지방지부결성대회가 총동원위원회와 독촉중협의 조직을 통합하는 자리였다. 이 대회에서 이승만과 김규식이 불참한 가운데 김구가 자신이 작성한 중앙위원 명단을 제출하며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 직후 이승만은 지방 각지를 누비며 대중 동원과 연설을 통해 지방의 우익 세력을 자신의 지도하에 결집시켰다. 독촉국민회의 중앙부는 김구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지방의 기반은 이승만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1946.4.25)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조선임시정부 수립” 같은 정치적이고 포괄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군대 차원의 회담이라는 것이 어색하다. 회담의 목적과 회담의 주체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미소공위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미소공위의 또 하나 구조적 약점은 다자 간 회담이 아니라 양자 간 회담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다자 간 회담이라면 이견이 일어나더라도 조정하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 간 회담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다자 간 회담이라면 이견이 일어나더라도 조정하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 간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이 어긋나면 직접 절충하는 외길밖에 없다. 제1차 미소공위가 두 달도 안 되어 무기정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이 약점이 작용했다.
미소공위의 충실한 역할 수행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6호 공동성명에서 언급한 ‘시문서’ 작성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소공위를 좌초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고, 미소공위는 그런 도전에 취약한 구조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1946.4.26)
민주의원 의원들은 김구와 이승만 두 영수의 공동추천으로 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미소공위의 임시과도정부 수립이 성공하든 말든 일단 협의대상에서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김규식이나 김병로처럼 영수의 영도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김구는 반탁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미소공위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들의 미소공위 협의대상 신청을 이끌어줄 영수는 이승만뿐이었던 것이다.
좌익은 5호 성명을 일제히 환영했다. 그러나 그 속내를 세밀히 살펴보면 엇갈리는 면이 있다. 온건파는 미소공위를 통해 균형 잡힌 임시과도정부가 만들어지기 바란 반면 이것을 우익 타도의 기회로 삼아 좌익으로 편향된 임시과도정부가 출현하기를 바란 과격파가 있었다. 온건파는 우익이 무리한 반탁운동을 조정해서 미소공위에 참여하기를 바란 반면 과격파는 반탁운동을 우익 배제의 핑계로 삼으려 했다.
(1946.4.28)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 양심적 예술인들, 의식 있는 예술인들은 좌익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넘어서기 위해 좌익이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좌익 조직활동은 편향적 좌경화를 일으켰고,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조직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억압체제가 양극화 추세를 일으키는 현상이었다.
해방 후에도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예술인들은 ‘좌익’ 단체를 통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2월 8일에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결성되어 민전 결성에도 참여한 조선문학가동맹을 통상 좌익 단체로 인식하는데, 좁은 의미의 ‘좌익’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사회혁명’을 주장한 사람들을 모두 좌익으로 본다면 실제로 중도파 모두와 상당 범위의 우익이 그 범주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사회혁명의 가장 중심 과제인 토지개혁은 모든 양심적 지식인들이 동의하는 과제였다.
(1946.4.29)
부당한 침략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의 막강한 무력 앞에서 그 희생에 상응하는 효과를 바라볼 수 없었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최대한 효과적인 투쟁방법을 그들은 모색했고, 테러리즘도 선택의 범위 안에 있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의 도덕성은 객관적 잣대로 재단하기 힘든 것이다.
테러리스트 중에는 미국 영화에 많이 보이는 것처럼 폭력의 쾌감에 도취된 자들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과 윤봉길 같은 ‘의사’들의 행적에는 생명을 아끼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적 자세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들의 행위가 온갖 모색 끝에 부득이한 선택이었고 무고한 인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테러리즘’의 범주에 넣는 것을 반대하고, 굳이 넣더라도 범죄적 행위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김구는 윤봉길 등의 거사를 지원하고 지휘하는 데 자기 목숨을 걸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자기 야심을 위해 테러리즘을 이용한 것이라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거사에 나선 젊은이들과 김구 사이의 일체감을 중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구가 윤봉길을 홍구공원으로 보내며 자기 살 잘려나가는 아픔을 느끼지 않을 때 윤봉길이 그의 지휘에 흔연히 따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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