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은 중국 역사 사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찬란한 시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는 현종 초기, 안녹산의 난이 발생하기 전 시기로 국한지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당 초기만큼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 후기 이후 북부 지역에는 돌궐을 비롯하여 티베트 등 강한 이민족의 힘이 당을 억눌렀는데 이는 당 후기까지 내부의 반란 세력과 결합하면서 당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당의 전기와 후기가 어떻게 달랐는가.
당대 초기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균전제가 행해졌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소유한 토지를 경작 가능한 가구들에게 주기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토지를 지급받는 모든 가구에 대하여 동일하게 부가되는 세금 체계가 소유한 토지에 따라 연결되었다. 군사 체계로는 전방에 이민족 유목민 부대를, 변경에는 직업군인들을 배치하고 수도에는 정예군을 배치하는 구조였다. 수도와 다른 주요 도시들은 벽으로 구분하여 거주 구역을 두고 교역은 특정 시장에서만 열도록 제한을 두었다. 사회는 소수의 최상위 대가문들이 독점하였다. 문학적으로는 장식적이고 인위적인 스타일의 작문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당 후기가 되면 국가는 부병제를 포기하고 직업군인(모병제)로 전환된다. 도시 내 교역에서는 공간적 제약이 사라지고 도시 생활은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의 구분이 사라졌다. 또 정부가 황하 유역 대부분의 지역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양자강 유역이 경제 중심지이자 국가 재정 수입상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된다. 남부의 항구를 통해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기존의 한국, 일본 같은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을 넘어서서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해협의 해안 지역들과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룬 장르의 운문들이 등장하고 남녀 사이의 관계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도 나타난다.
당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하였다. (...) 전통적으로 중심지였던 북서부 지역은 장기간의 경제적 · 생태적 쇠퇴가 시작되어 오늘날과 같은 빈곤하고 반 사막인 후배지後背地로 전락하게 된다. 중원 평야는 인구학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뿐 아니라 중국 문화의 전형으로서의 광채를 상실하였다. 북동부(오늘날의 하북성과 산동성)는 거의 이민족화되어 경계 지역이 되었고, 그중 몇몇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중화 지역과 다시 결합하지 못하였다. (...) 양자강 하류 지역과 그 남부 지역은 풍부한 강수량과 풍요로운 식생 그리고 편리한 수상 운송으로 인하여 중국의 인구학적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로서 점차 황하 유역을 대체하고 있었다. - P29~30
인상적이었거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위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겠다.
지역 간 거래의 성장과 더불어 제국 전체를 포괄하는 금융거래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 말과 송대 사이의 시기는 지폐, 약속어음 그리고 다른 형태의 종이로 된 신용거래에서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였고, 이는 현금이라고 알려진 많은 양의 무거운 동전 꾸러미들을 대체하였다(P239). 교역이 늘어 기존의 동전들을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지면서 화폐와 어음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화폐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지폐가 이 때 등장했다는 게 놀랍다. 군부대의 병사들이 고향에서 곡식으로 구입한 영수증으로 부대에서 음식을 살 수 있었다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구내 식당의 '식권' 같은 개념이다. 상인들이 도성에서 정부로부터 권리를 구입하면 이것을 지방 금고에 가져가서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날아가는 현금'). 이는 비단 오늘날의 은행과 다를 바가 없다. 다양한 종류의 종이로 된 신용 증권도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이돈이 장례식에 사용되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중국인의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 마시는 문화가 아닐까. 차가 제국 전체에서 보편화된 음료로 발전한 것이 당대에 와서라고 한다. 차 마시는 행위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과 연관되어 이루어졌다. 북부 지역에서 차 음료의 확산은 많은 이유로 불교 사찰에서의 차의 사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는데 승려들이 오후에 고체로 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액체의 음료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후 차 음료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대접의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에서는 의식에 사용되는 등 다양한 부분에 전파되었다.
안녹산의 난 발발과 티베트에 의한 북서부 지역의 점령은 아랍 세력이 중앙아시아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침공의 성공은 18세기에 만주족이 점령할 때까지 중국 왕조들이 돈황을 경계로 그 서쪽 지역에 대해 지배권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건은 불교 세계의 한 부분이자 중화 문명의 영향이 미치는 부분으로서의 중앙아시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P319). 당 초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당나라는 안녹산의 반란으로 내부의 위기, 서북쪽의 티베트의 공격으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아랍 세력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대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다. 기본적으로 사채업, 그 이외에도 주점은 소그디아 인 또는 토카라 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운영하였고,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예능과 매춘에서는 비중국적 취향이 매우 보편적이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여성이 시중을 들거나 예능인인 외국인 소유의 주점과 선술집은 당대 시나 예술의 일반적인 주제였다. 중앙아시아 음악은 도시 전체에서 큰 유행이었고 수도에서부터 모든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8세기가 되자 중국의 대중음악은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의 음악과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P337~338). 당이 참으로 국제적인 도시였음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때 중앙아시아의 음악이 중국 내 유행을 했고 거의 주류 음악처럼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현종과 양귀비의 애창곡도 중앙아시아 노래의 번안곡이었다고 한다.
당대의 여성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시기라는 이미지가 있다. 아무래도 무측천, 그녀의 딸인 태평공주와 위황후가 반 세기 이상의 기간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멸망 이후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유목민들이 중국에 가져온 것으로 유목 사회는 기본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흥미롭다(물론 당에 비해서 남녀평등하다는 것이었을 것이지만). 6세기 인물인 안지추는 당시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북부 지역의 여성들을 법률적 사안을 직접 처리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남자 친족을 위해서 정부 청사에 들어가 탄원과 고소를 할 수 있었다. 7세기 중반 이후 당대 황후들의 권력은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북방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강력한 황후들의 존재 뿐 아니라 당대는 공주들의 정치 참여가 두드러졌다(P357~358).
수나라 때 전래된 불교는 당나라 때 와서 중국식화된다. 그 전까지 불교는 외래 종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생사관과 의례 체계의 기저를 이루는 불교 사상의 많은 체제들이 중국의 종교(민간신앙) 속으로 융합되었다. 서구에서 연옥이 있듯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망한 친족을 구제할 수 있었던 완전히 새로운 도구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연옥은 시왕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망한 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10곳의 연속된 법정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의 법정은 당대의 재판장을 모델로 묘사된 것으로서 각 법정을 지배하는 왕들(십왕)은 개인의 인생의 기록들을 조사하는 재판관의 역할을 하였고, 만일 필요하다면 죄의 완전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 고문을 할 수도 있었다. 법정을 떠난 이후에, 그 사망한 자들은 다음 생에서 환생할 상태가 결정되는데, 선행을 베푼 자들은 보다 나은 상태로 환생하고 악행을 행한 자들은 더 나쁜 상태로 환생한다(P381).
시를 새로운 무대와 사회계급으로 옮기고 복고의 정치-윤리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당대에 시인들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개척할 수 있었다. 시를 짓는 것은 사교적 세련미의 차원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로 격상되었다. 시인은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찬양하였던 기인과 '천재'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인물이 되었다. 시는 지식인들의 소명이 되었고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특정 작가들은 시를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으로 묘사하였고 시인에게는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 보장되었다(P514). 그러니까 당나라 때 오면 시인이 지식인을 넘어 직업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당시(唐詩)가 하나의 장르가 된 것처럼 시는 당대는 물론이고 이후 지식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같은 것이 되었다. 게다가 시가 개인적 소회를 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보나 백거이 등은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시들을 많이 발표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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