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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토지12

category 리뷰/책 2023. 2. 20. 15:26
12권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의 사건들이 등장하는 만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어려웠다. 인상적이었던 몇몇 장면의 대화를 중심으로 소감을 정리해보려 한다. 
 
이상현과 신태성이 시국에 대하여 논한다. 
"송병준이가 조선소작인상조회를 만들었다니 웃기는 일 아니겠소." 
"그보다 더 웃기는 얘기는 조선 내정독립 청원운동이지요. 허허헛. 친일파 송병준한테 총리 자리 줄지 뉘 알아요? 허허헛헛..." (P.152)
 
조선소작인상조회는 1921년 8월 27일 서울에서 송병준이 친일파 20여명을 모아 조직한 단체였다. 이 상조회는 전국 주요지역 30여 곳에 지회를 설치하고 소작인의 항일인식을 무마시키는 데 주력하였으며, 소작인이 착취를 당하는 것은 일본을 위하여 정당하고도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동척(東拓) 농장 같은 곳에는 자체적으로 지주의 이익을 위한 소작단체를 증설하도록 유도하였다. 소작인의 상조회라는 미명 아래 순수한 소작인을 착취, 선동해서 일본에 협력하다가 1930년대에 없어졌다. 그야말로 기만이다. 
 
조선 내정독립 청원운동은 자치론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에 독자적 의회를 설치하고 내정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으로 송병준, 이광수 등을 비롯해 조선 귀족과 지식인들이 동조하거나 적극 협력하였다. 자치론은 1920년대 재조일본인과 총독부 관료, 일본 식민학자,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들, 친일파 한국인들과 총독부의 민족 분열 정책에 회유된 일부 민족 운동 세력까지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일제 식민 통치 지배에 이용되게 되었다.
 
쎄리판 심(러시아에 귀화한 조선인) 집에 가게 된 송장환과 이상현은 쎄리판 심의 둘째딸인 수앵과 그의 남편 윤광오, 묵당 손유진을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저도 <민족개조론>인가 그거 읽고 실망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윤광오는 묵당에게 시선을 돌리며 묻는다.
"놀랄 정도로 졸문이더군. 너절해. 젊어서 그랬겠으나 아는 것 자랑이 심해."
"저는 문장가가 아니어서 그런 걸 가지고 논할 자격은 없겠습니다만 거 이상한 얘기가 여간 많지 않더군요. 어째서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추켜세웠을까요? 일본이 아닌 불란서의 식민지 정책과 비교는 하고 있었습니다마는 도대체 그 저의가 뭐냐 그 말입니다."
"일본도 영국식으로 조선을 다스려준다면 용납하겠다 그 얘깁니까? 아니면  영국을 본받아 좀 잘 봐달라는 얘깁니까? 아 글쎄 노골적인 것은, 그래도 영국은 실리를 취했다 그러고 노닥거리지 않았겠습니까? 그 반역자가 따지고 들면 뭐라 대답할까요." 윤광오가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한다.
"민족을 위해서, 왜놈들에게 눈가리개 해놓고 표면상 합법적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답변할까요?" 송장환이 야유하듯 말했다.
윤광오는, "그러면 그것은 합리주의 책략인데 <민족개조론>에는 도처에 도덕을 운운하고 있지 않아요? 그건 모순입니다." (P.202~203)
 
이광수는 독립운동가로 출발하여 <민족개조론>을 기점으로 조선 민족 자치론으로 기운다. 소설 속 대화에서도 느끼듯이 당시에도 논란이 심했을 거라 여겨진다. 소설가로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변절한 그는 친일 문학가의 꼬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홍이가 부산에 있는 영팔이 집을 찾아가 환국의 아들 영호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영팔이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공부도 물론 해야겠지만 학생들이라고 편하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은밀한 조직을 갖고 있습니다."
영호의 말은 부자연스런 것이었다. 자신을 인식해달라, 그리고 신뢰해달라, 그런 바람, 기대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을 말하는 부자연스러움이었다.
...
"독립운동이 그리 식은 죽 먹듯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나? 혁명투사는 이마빡에다 나는 혁명투사요, 써 붙여놓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나? 나는 운전대나 잡고 집안 걱정이나 하고 사는 놈이다만 그런 정도의 상식은 안다. 사내자식이 일을 하려면 부모 형제, 처자도 타인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정도의 상식 말이다. 너는 내 어디를 믿고 그런 말을 하느냐 말이다. 내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이가! 너 같은 생각을 가진 놈들이 운동을 한다면 독립이 되기는 커녕 빗자루로 쓸듯이 일하는 사람 말짱 감옥행이다."
...
"앞으론 조심해! 무슨 일을 하든, 너가 생각하는 세상하고 세상은 다르다." 홍이는 성이 난 것처럼 담배와 성냥갑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꽁초를 버린 종이를 꾸겨 쥐었다 놓고 일어선다. (P.446~447)
 
윤국이는 자신의 학교도 광주학생운동으로 복잡해질 거라며 서희에게 넌지시 말을 꺼낸다. 
"크게 일이 벌어질 모양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가만 안 있을 것 같습니다. 연일 학생들이 잡혀간다는 소식이고." 
"설마 네가 주동하는 건 아니겠지?"
"상급생이 있으니까 그렇진 않지만 주동이 되면 안됩니까?"
모자는 서로 쳐다본다. 
"안 된다 할 순 없지만 너는 아버님이 서대문에 계시니까 신중히 처신하는 것이 좋겠구나. 그리고 만용은 금물이니라. 보다 큰일을 위해서 너희들은 자라야 한다."
서희 얼굴에는 애원하고 달래는 빛은 없었다.
"이번엔 어른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학생들 문제가 아닙니까?"
윤국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상대는 어른이다. 어른이다 뿐이겠느냐? 너희들이 사슴이면 그들은 사냥꾼인 게야."
"사자가 되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모두 사자가 되면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학생의 신분을 잃고 정당치 못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근본에서부터 지엽에 이르기까지 정당하지 않았으니까요!" (P. 471~472)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덜 주목된 측면이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 발생한 대표적 학생운동으로 1920년대 전국 각급 학교에서 조직된 독서회 등의 비밀조직을 통한 학생들의 민족해방의식 성장의 결과로 일어났다. 이들의 구호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독립만세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조선 역사의 교수, 조선어의 교수, 관료적인 교사와 무자격 교사의 배격,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보장, 치안 유지법 폐지' 등이었다. 학생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말미암아 노농계급에 바탕을 둔 민족해방운동이 강조되면서 학생층도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운동과정에서 탈락할 수 밖에 없는 계층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홍이가 영호를 만나 그를 햇병아리로 여기고 서희는 윤국이를 몸은 컸어도 치기 어린 젊은 매로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비슷한 맥락 같이 여겨진다. 
그들은 이상과 현실이 병치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홍이가 한 말처럼 이 사람이 밀정인지 친일파인지 독립운동가인지 까놓고 이야기해서 내 편인지 얼굴 보고 몇 마디 나눈다고 결코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지난 권에서 봉순이의 운명이 너무 애처롭고 가여웠었는데 그는 결국... 주변에 민폐만 된다며 넋두리를 했다는 그의 말이 석이에게는 특히나 힘겨웠을 말이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사랑을 하는 남녀가 또 있다. 인실이와 오가타 지로다. 압제하는 권력 일본인인 오가타 지로, 피압박 민족 조선인인 인실. 특히나 인실이는 조선이 일본에게 강제로 병합당했으니 일본은 당연히 증오해야 하는 대상이고 독립을 해야 하는 민족의 구성원이었으니 오가타 지로를 향한 스스로의 사랑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가타 지로는 사랑은 개인적인 것일 뿐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바라볼 수 있었을까. 이런 남녀가 당시 얼마나 많았을까 싶어 마음이 좀 아팠다.
 
오가타는 인실을 껴안는다.
"사랑은, 남녀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나 약속하겠어요. 오가타상을 위해 결혼 안 할 거예요. 혼자 살게요. 당신에게 하는 약속이에요."
인실이는 울어버린다.
"용기가 없어요. 나는 겁쟁이예요. 부모 형제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에요. 허영도 아니에요. 남의 이목도 아니에요. 내가, 내가 나를 용서 못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그래도 난 내가 당신에게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어요."  (P.412)
오가타는 무모함으로라도 인실이를 잡아보려 했으나 인실이는 도무지 그런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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