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새 일국사 틀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해외 귀환자 문제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이 문제를 마이너 테마로 간과하거나 애써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일제강점기 말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해외로 끌려갔다고 교과서에 적어놓고선 그들이 그 후 어떻게 돌아왔고, 어떤 과정을 거쳐 새 나라의 국민이 되어 갔는지는 정작 설명하지 않는다. 즉 ‘사람’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역사책을 만들고 그것을 줄줄이 암기해 온 셈이다. - P315
종전 후 이루어진 대규모 인구이동은 본질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이동하는 사람들의 송환과 수용 사이에는 이동 당사자의 개인적인 선택권보다는 조선인•일본인•점령군이라는 각 행위 주체의 집단적•민족적•국가적 이해관계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이들 3자 간의 각기 다른 필요•욕망•지향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이것이 미세 조정되는 방식으로 전후 인구이동의 논리와 틀이 만들어진 셈이다. - P68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 P132
또한 남한 사회는 긴급한 사회문제로서 일본인의 불법적인 재산 처분과 밀항에 대한 단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당국의 허가 없이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이를 어겨도 이를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 이에 미군정 당국자(하지 등)는 도리어 ‘돈에 눈이 먼 의식 없는 조선인’ 탓이라며 일본인을 도와 밀항을 알선한 브로커를 비난했고, 단속할 방법을 찾아달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결국 1945년 12월 15일이 되어서야 남한의 구 일본국에 소속된 재산과 권리를 모두 군정청에서 관리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이를 돈냄새를 맡은 이들은 횡령, 사재기, 밀수 등으로 이미 법망을 다 빠져나간 뒤였다.
그리고 탐욕은 부에서 끝나지 않고 권력으로도 이어진다. 식민지 시기 이루어졌던 요정에서의 밀실 정치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총독부 고관 대신 미군정 관료와 통역관 등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서 포르노 상영회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도색영화 상영 모임의 물주는 물건을 사재기하거나, 귀환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값싸게 물건을 건졌거나 건물 등의 운영권 등을 따내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아! 도색영화 현장에는 당시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도 있었다.
이 무렵 서울은 귀환자와 월남민 외에 생계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던 시점이었다. 주거난이 심각하여 역의 대합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방공호, 길거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념쳐났다. 이런 모리배와 투기꾼들이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동안 정작 일거리가 없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길을 떠돌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다반사였던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미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의 행태와 잘못이 가장 크다. 미군정은 구 총독부 시스템을 답습하여 남한의 정치 기본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잘못된 곡가 정책으로 인해 물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켜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거기에 미군정 핵심 인사는 친일파나 정재계의 거물들에게서 각종 뇌물과 향응 등의 이익을 받고 뒷배를 봐주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도 있다. 그는 특별한 흠결이 없었고 영어가 되어(유학 경험) 미군정으로서는 그를 점찍었던 모양이다. 서울 시장으로 있었던 기간은 단 2년 7개월이었다는데 그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심지어 그 비싸다는 청파동 가옥을 매입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만약 미군정이 일본인들이 떠난 후 적산가옥과 대규모 요정, 유곽 시설을 귀환자나 월남인들을 위해 적절히 배분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귀환자와 월남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뒤 많은 나라들에서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한반도에 200만의 인구가 유입이 되었고 일본도 60만의 인구가 유입되었으나 둘 간의 정책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일본은 정부와 의회가 있어 이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미군정이 1944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구호령 제도의 틀을 그대로 끌어오고 군정령을 더해 처리한 미봉책으로 빈곤자들마저도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귀환원호단체의 지도자나 경성일본인세화회 회장 등이 귀환자들을 지지하여 의회에 진출하여 그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 그런 창구 자체가 거의 전무했다.
연합국총사령부의 간접 통치 아래 있던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통해서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한일 간의 역사적 경험 차이와 더불어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의 국가 운영 경험과 행정 능력의 차이, 그리고 점령국인 미국에게 있어 전후 한일 양 지역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과 국가적 위상의 차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 P285~286
전작에 이어 한달 안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좋은 책이었다. 전작과 함께 이 책도 구매할 예정이지만 두 권의 책은 도서관에 꼭 있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미군정의 정책에 더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모리배, 간상배, 아귀는 지금도 정재계와 사회에 뿌리 내려 있음을 앞선 역사를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재미난 사례와 그것을 사료와 적절한 설명으로 풀어내는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전작이 2012년에 나왔는데 후속작이 무려 12년 만에 다시 나온 것이다. 연구 등으로 바쁘시겠지만 부디 저자가 앞으로도 이런 학술대중서를 출간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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