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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캠브리지 중국사 10 下

category 리뷰/책 2024. 3. 20. 09:27

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 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0~611

 

이전 권에서 1800년 경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와 청의 조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면 이번 권에서는 1820년~1830년 무렵의 시기를 살펴본다. 특히나 청과 러시아 사이 국경을 둘러싸고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시작은 다른 내륙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교역 관계의 문제였는데 1854년 크림 전쟁의 발발로 러시아가 영국을 경계하면서 청과의 접경 지역을 더욱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이 과정을 청은 주도적으로 끌고갈 수 없었는데 이는 태평천국운동으로 내부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1858년 아이훈조약과 텐진조약을 차례로 맺으며 양국 간 북쪽의 국경선이 정해지고 항구를 개방하며 러시아인에 대한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로서 동북 만주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몽골 유목 사회는 사원 제도가 정착하면서 출가에 따른 남성 인구가 감소하였고 한족 세력이 침투하여 몽골인의 채무가 늘어나 약탈, 걸식으로 내몰리자 일반인들은 빈민화되었다. 몽골의 방목지까지 감소하면서 먹고 살 길은 더 어려워졌고 이에 도시 지역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청 조정도 처음에는 한족이 이 땅에 이주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나 관리를 파견하고 조세 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통해 우호적인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몽골 지역에서 청조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오랜 목표, 즉 유목민들을 변화시켜 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만주족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만주 지역에서 준가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감소했고 가축과 영토 또한 크게 감소했다.

신장에서 만주인들이 원한 것은 평화와 공식적으로 청조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동투르키스탄인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이슬람 문명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모든 권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제국 질서의 초석에 도전적이었다. 황제는 라마교도가 되지 않고도 라마교의 합법적인 후견인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되지 않고서는 무슬림 세계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P701

 

몽골이나 신장과 달리 티베트는 자기 고유의 토착적인 중앙 정부를 갖고 있었다. 티베트의 군사력은 중국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만주족은 이 종교 국가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세기 내내 달라이 라마 정부의 권력은 증대되었고, 베이징은 외국의 영향력을 배척하고 티베트의 고립을 유지하려는 라싸의 노력을 지지했다. - P702~703

 

1830년대 신장의 역사는 놀라웠다. 그 지역을 꽉 잡고 있던 세력은 코칸드 정부로 청 조정은 1840년대 난징조약 등 외국 세력과 맺은 다양한 사항을 미리 이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의 조항이 있는데 향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내용들이다. 티베트도 네팔과의  사이에서 코칸드 정부와 비슷한 협상을 거치며 1856년 조약을 맺었다. 

 

청조는 태평천국운동 세력들을 물리치면서 쌓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증국번은 양쯔강 이남 지역의 농촌에 토지세와 부가세를 줄이면서 농민들이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했고 조정 관료의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인재 선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반면 화북 지방에는 소금 밀매업자인 염군이 활동했는데 그들은 의적을 자처하며 핍박 받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일어났고 1868년 무렵이 되면 그들이 화북 전체로 집단화되어 민란이 번진다. 때문에 조정의 입장에서 민란은 태평천국 이후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세력이었을 것 같다.

 

메리 클래버 라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조뿐만 아니라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문명 또한 1860년대 걸출한 인물들의 걸출한 노력으로 살아남아 이후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동치중흥이다. - P808

메리 라이트의 탁견은 앞으로도 이 시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조의 중흥은 "중국의 전통적 제도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기 위한 최후의 위대한 노력을 대변하며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승리를 보았다" 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1870년대 초 장쑤 성, 산둥성, 직예성 등에서는 구질서가 분명하게 회복되었다. 쑤-쑹-타이 지역의 ‘대호들‘은 탈세를 계속했다. 아역들은 다시 산둥 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세금 징수를 독점하거나 부가세를 착복했다. 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층 신사들(심지어 예성의 하층 신사들조차)은 세금 징수인 혹은 말썽많은 ‘송‘ 혹은 송사가 되어 아역과 결탁하거나 경쟁했다.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서양식 무기를 이용할 수있게 된 여러 성의 용영, 심지어 재훈련된 녹영군 때문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청조가 관료 인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되면서, 총독과 순무가 지방 관원 임명에 대한 역할을 확대시켜 행정적 개혁을 모색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융통성이 점차 제한되었다. - P824~825

 

2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며 청 조정의 관료들은 전통적인 유교식 덕치주의 정치에 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이제 과거와는 단절하고 외국 열강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함을 느낀 것이다. 특히나 전쟁에서 확인한 서양의 대포를 비롯한 화기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들은 부국 강병책을 위해 서양 무기 수용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의견 갈등은 있었으나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대부분은 수용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전통과의 단절에 대한 압박은 서양 종교의 포교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 선교회는 일찍부터 청에 들어와 포교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직 체계를 세우고 청나라 전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이동, 경비 마련 등이 필요했다. 1860년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에서의 모든 기독교 선교가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과거의 유산은 깊었다. 송나라 시기 이후 기독교는 유가적 세계와 충돌을 일으켰으며 기적에 의한 기독교적 신앙이 정치 전복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며 이단화된다. 결국 옹정제 때 기독교 금령이 내려지는데 결정적으로 태평천국운동 세력이 기독교에 배경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수용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엇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였다. 서양인들이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청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반대로 서양인들도 청나라 사람들의 문화,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서로 다가가지 못한 기간이 이토록 길었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 선교가 자유화되며 기독교 세력은 확대되지만 중국 내 자리잡는데는 실패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서양의 지식은 수용하고 종교는 거부하는 이중 전략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0권 상/하권 읽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잘 안 읽혀서 고생했는데 책에 대한 감을 잡고 나니 그 이후에는 읽기가 더 매끄러웠다. 책에서 특히 만주, 신장, 티베트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