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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사는 두 개의 커다란 드라마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국제 교역과 전쟁을 무기로 팽창을 거듭해온 서구 문명과 농업과 관료주의를 무기로 이에 끈질기게 저항한 중국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이며, 이러한 충돌의 와중에서 미증유의 혁명을 거치며 이루어진 중국의 전면적 변화가 다른 하나이다. - P24

캠브리지 중국사 10권부터 11권까지는 1800년 무렵부터 청 제국 말기까지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캠브리지 중국사 시리즈는 오래 전 나온 책이지만 중국 통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아쉽게도 청나라 역사를 제외하고는 앞부분은 모두 절판이거나 품절되어 현재는 구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청나라의 역사는 구입이 가능하여 구해서 읽었다.

18세기 청 제국은 유럽 세력이 확대되고 영토가 늘었으며 한족 인구가 증가하였다. 전사-통치자들의 간헐적인 침입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촌락 생활은 외관상 사회적·기술적으로 갑작스런 변화에 의해 중단되는 일 없이 이때부터 지속성을 유지한 채 꾸준히 발전해온 것 같다. 촌락 공동체 사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오랜 전통을 지닌 중국 지배층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왕조는 계속 바뀌었지만 이들 지배층은 점차 복잡한 관료주의 통치 조직을 창조해냈다. 1800년 이후까지 이처럼 농업-관료주의에 기반한 중국 제국은 유럽의 상업적 군사적 사회보다 훨씬 오래된 그리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 질서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중국의 농업 공동체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포함해 개인의 용기와 적극적인 태도가 해상 활동, 전쟁, 탐험, 해외 이민 등을 추구하는 유럽 사회에서와는 달리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P38).

인구 압력의 영향은 청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국내 이민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8세기 초 이후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고 또한 반란이 가장 쉽게 발발한 곳이 바로 이들 변경 지역이었다. 예컨대 타이완 섬, 쓰촨의 산간 지방, 광시의 낙후된 향촌, 후난과 구이저우의 접경 지역의 먀오족 거주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역들 속에서 일련의 반란을 조장한 몇 가지 공통적인 요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나 준종족적 자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변경 지역 사람들의 종족적 이질성으로 인해 첨예화하고 때로는 언어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으로는 불안정한 변경 지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적들의 출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해 고도의 무장화가 필연화된 것을 들 수 있다(P222).

19세기 초가 되면 중앙 정부의 힘이 지방 정부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착취하고, 이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들고 일어나거나 점점 거세지는 상업화의 물결에 맞춰 도시로 나아간다. 도시에는 정기 시장이 생기고 상인이 늘어났으며 교역을 위한 해운업이 자연스레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농촌의 지식인층은 여전히 상업을 천시하며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걸으려 했기 때문에 이들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관료와 지식인 간에 인맥 네트워크는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각종 불법과 부패를 낳는 효과를 낳는다. 가경제는 인사와 재정 지출 문제에 칼을 들이대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민중의 항세 운동이 거세지자 정부는 진압을 하고, 이는 지방 사회를 더 분열하고 해체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홍수전은 (꿈을 꾼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광시성에서 포교를 하며 신도를 끌어 모아 배상제회라는 조직을 만든다. 이때 배상제회의 구성원이자 홍수전의 사촌인 풍운산이 체포된 뒤 홍수전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조직의 지도자들이 변경되고 이들은 태평천국 성립을 선포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평등주의적 메시지가 가난한 농민과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운동이 성립하기 전 조직의 지도자들끼리의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증국번을 지도자로 한 군대를 결성하여 대응하게 했다. 
태평천국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는 조직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내부 분열, 정부의 반란 대응군 추가 투입(여기서 이홍장 등장),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태평천국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군은 난징성을 점령당하며 주요 흐름은 소탕되었다(이후에도 몇 년 더 이어졌지만 새 흐름을 일으키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중국의 농촌 사회는 각종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들과 겨우 사후에나 전술적으로만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 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평천국은 전통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한 도시의 배후에 있는 내륙의 농촌에까지통제력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태평천국에게는 도시가 제국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만이 그들의 독특한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중국 고유의 농촌 조직 형태들은 오히려 정통 신사들에 의해 쉽게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중심 도시를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에서 지방 방어 조직을 이용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과 이들이 통치하려고 한 농촌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격은 종종도시와 농촌 사이의 간격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신기하게도 서양 세력이 조약항에 침투하면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이 겪게 될 문화적 분열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P528).

1800년 이전 청은 내륙아시아의 다양한 민족들을 포섭하고 흡수하다가 1800년 이후가 되면 그 범위를 본토와 연해까지 확장하게 된다. 1800년 당시 내륙아시아는 크게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의 4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4개 지역 모두에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통치를 위한 행정 구조는 각기 달랐다(P84). 청은 현재의 통치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서 주변 민족들을 포섭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사실 청이 그들에게서 원한 것은 오직 평화였다. 만주인의 내륙아시아 정복은 이윤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적대적 세력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륙 방면에서 중국 본토는 안전하게 보호받았다. 그러나 변경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령 인도의 팽창은 티베트의 청조 당국에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신장, 몽골, 만주 등의 변경에서는 러시아 세력이 대두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보면 이들은 먼 지방의 문제였다. 1815년 베이징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거의 감지조차 되지 않았다(P184). 19세기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변경 문제가 비로소 현실화된다.

1800년 무렵 청 정부는 외국 상인들을 인가 받은 교역 업자들만 독점적으로 상대하게 했다. 교역업소에 황제가 임명한 감독관이 파견되었는데 외국 상인들로서는 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고 정부 입장에서도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감독관의 부패를 묵인하는 경향도 발생했다. 특히 광저우는 상업의 중심지로 온갖 물자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편은 18세기 금지되고 윤리를 파괴시키는 물품으로 인식되었음에도 중국 전역에 자유로운 무역 거래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영국 상인들은 아편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섰고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 폐단의 근원을 뿌리뽑도록 지시한다. 임칙서는 국가의 힘으로 아편 중독자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론자였다. 1차 아편 전쟁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1차 아편 전쟁의 결과 난징 조약이 맺어진다. 조약의 내용은 기존의 특정 항구(광저우) 중심의 사무역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외교 관계를 맺는 방식을 지시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공식 문서들은 번외의 이인들을 ‘영역‘ 즉 ‘영국 반역자‘로, 베이징 중심의 세계 질서에 속해 있지만 그에 반항하는 반역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반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조약항 체제는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de novos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국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었다. 조약항 내의 외국인 거주지와 통상 지역을 지정하고, 상대국에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허용하며, 다른 외국과의 교섭에서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새로운 조약의 조항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확대였으며 제도로 볼 때 원래는 과거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구들이 새로 개항된 1840년대에도 조공 사절단은 계속 베이징을 방문했다. 조선은 매년, 류큐는 7년에 한 번, 베트남과 시암은 3년마다 한 번씩 보내왔다. 조공에 관한 각종 규례와 기록들은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보존되어 있는데, 이번원을 통해 몽골이나 기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수장들이 표한 충성의 표시까지 기록되었다. 아편전쟁은 오늘날 회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대격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P382).

1856년 로이처선 애로호 사건을 배경으로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따라 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중국의 하천과 해안을 모두 개방하게 되었으며 아편 무역이 합법화되었다. 이어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은 홍콩의 주룽반도를 영국에 할양하게 되었다.

포함 외교 - 즉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이용한 강요-를 통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 체제는 외국의 조약 열강들에게 중국 영내에서 상당 정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모습은 1860년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즉 조약향의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조약항 내 조계들의 자치권, 중국 영해에서의 외국군함의 활동 허용과 중국 영토 내 외국 군대의 주둔, 외국 선박의 중국연해 교역과 내지 항해 허용, 그리고 조약에 의한 관세권의 제한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외국의 권리와 특권이 추가되면서 중국의 주권 행사 범위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상업, 재정, 군사, 산업, 기술등 여러 면에서 초강대국인 이들은 점점 더 중국의 전통 사회, 정치, 문화를 파괴적으로 잠식해 들어갔다(P438).

작년부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를 읽어오고 있다. 이번에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어보니 하버드 중국사와는 서술 방식이 다르다고 느꼈다. 하버드 중국사는 시간 순으로 나열된 역사가 아님은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캠브리지 중국사는 목차만 보면 시간 순의 역사가 아닌 것 같지만 앞부분을 제외하고는 내용상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느꼈다.

10(하) 권의 내용은 점점 확대되는 외국 세력에 맞서 중국이 스스로 어떻게 맞서려 했는지를 다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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