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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yes24.com/Article/View/17656


우피치 미술관에 가는 것은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훨씬 전인 1970년대 말, 초등학교 때였다. 이원복 교수가 독일 유학을 하던 시절 <새소년>이라는 잡지에 연재하던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먼 나라 이웃나라』의 원조 격 되는 이 만화를 통해서 어렴풋이 유럽을 접하게 되었다.

피렌체 편에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비너스였다. 미술 도록도 아니고 만화에 삽화로 등장한 보티첼리의 비너스. 연재 당시에도 「비너스의 탄생」은 누드화라서 그림 전체가 다 게재되지 못했다. 우린 얼마나 보수적이고 답답한 나라에 살고 있었던가.「비너스의 탄생」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피렌체에 가고 말 거야!’라는 막연한 꿈을 품고 살았다.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피렌체 풍경

1993년부터 우피치에 드나들기 시작해서 평균 매년 한 번 이상은 우피치를 관람한 것 같다. 어느 전시실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다 외우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나만의 관람 순서가 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그림들이 널려있지만 가장 먼저「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리게 되듯이, 「비너스의 탄생」을 보고 나서 다른 그림들을 보는 것은 우피치를 관람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우피치(Uffizi)는 ‘사무실’(office)이라는 뜻이다. 한글로 읽을 때는 전혀 감이 안 오지만,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써놓으면 어원이 같다는 느낌이 온다. 1537년 피렌체의 정권을 잡은 메디치 가문의 후예 코시모 대공은 베키오 궁전을 사저로 삼았다. 정적들로부터 안전하고 정치으로도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법과 행정을 총괄할 사무실 건물을 계획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거주하는 베키오 궁전과 연결시킨 거대한 건물이 지어지게 된 것이 우피치이다.
<가난한 연인들의 연대기> 포스터

두 개의 거대한 주랑은 강을 향해 날렵하게 나는 것처럼 이어지면서 평행을 이루고 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면서 르네상스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카를로 리차니 감독의 <가난한 연인들의 연대기>라는 영화에서 우피치의 두 주랑(柱廊) 사이에 앉아있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새벽의 어느 순간을 포착한 그 장면을 보면 우피치라는 공간이 얼마나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알 수가 있다.

지금도 새벽에 두 주랑 사이에 서면 시뇨리아 광장과 아르노 강 사이에 자리 잡은 우피치가 발산하는 매력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곳에는 위대한 인물들의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같은 탐험가, 국부 코시모와 위대한 로렌초 같은 메디치 가문의 통치자들. 이들이 다 함께 르네상스를 구축한 것이다. 우피치에 간다는 것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피렌체 르네상스와 같이 호흡함에 다름 아니다.


우피치 미술관 앞

미술관 앞에 아침 일찍 줄을 서는 것은 언제나 일본 단체 관광객들 같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면이 피렌체를 그토록 매혹적으로 만들어준 것일까. 르네상스 미술의 신화와 더불어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소설들이 먼 과거와 현재 사이를 이어주고, 피렌체에 가면 미술과 더불어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주는 것은 아닐까.

피렌체에 간다는 것은 사랑을 만나고, 우피치 미술관의 그림들 사이를 산책하고, 두오모의 463계단을 함께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아닐까. 우피치의 계단도 가파르다. 문이 열리자마자 계단을 숨 가쁘게 뛰어 올라간다. 거침없이 몇 개의 방을 지나친다. 보티첼리의 방에 다다르면 눈을 감는다. 스무 발자욱만 내디디면 비너스 앞이다. 찬찬이 앞 못 보는 사람처럼 걸어가 몸을 돌리면서 눈을 뜬다. 마치 새로운 광명을 접하듯 비너스와 만난다. 개인적으로 우피치에서 가장 감동을 받는 방법이다.

<무솔리니와 차 한 잔> 포스터

이따금씩 미술관에서 식사를 할 때가 있다. 종종 대형 전시의 오프닝 행사에 가면 뷔페식으로 식사를 준비해놓고는 하지만, <무솔리니와 차 한 잔>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아름다운 피크닉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영국 아줌마들이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우피치로 피크닉을 나간 것이다. 그렇다. 옛날 미술관이라는 곳은 이처럼 대중 친화적인 공간이었다. 생활의 일부로서 피크닉을 나가 차와 간단한 음료수를 마시면서 그림 앞에서 그 전체를 즐기곤 했던 것이다. 물론 요즘 같으면 엄두도 나지 않을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부에서 사진도 못 찍을뿐더러, 입장시간도 미리 예약을 해야만 한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공간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먼 옛날 우피치를 떠올리면 뭔가 모르게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낭만을 꿈꾸는 한 인간의 아쉬움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만.

오랫동안 사무실로,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실로 사용되던 우피치가 공식적인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것은 1765년이다. 메디치 가문의 영화는 끝났지만, 마지막 후예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는 피렌체 시에 가문에서 소유하고 있던 모든 미술품을 기증했다. 이 작품들이 피렌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달았다.

초기 우피치는 제한적이고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만 관람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지만, 대중들이 와서 관람할 수 있는 최초의 미술관 중 하나로 변모했다. 파리나 로마, 런던 같은 대도시가 아닌 피렌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게 르네상스의 전통이고 문화적인 밑거름인 것일까. 그렇게 우피치가 공공 미술관이 된 지 벌써 2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 피렌체, 그런 피렌체에서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우피치 미술관이다. 세월을 넘어서는 걸작들의 향연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1.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1475)의 「산 로마노 전투」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The Battle of San Romano),
1435~1455, 182*320

우첼로의 그림은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총 세 편의 연작으로 그려진 「산 로마노 전투」는 우피치, 루브르, 런던 국립 미술관에 각각 한 점씩 걸려있다. 그의 그림 속에 있는 창들은 현란하다. 원근법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보여준 가장 특별한 시도 중 하나였다. 이러한 시도에 가장 놀랐던 것이 다 빈치 같은 천재였다. 창들은 춤을 추는 듯 현란하다. 군마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피렌체가 라이벌 도시국가 시에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큰 영광이었고, 그런 전투를 그린다는 것은 화가로서는 개인적인 영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우첼로는 도시의 영광을 원근법의 새로운 시선으로 화폭에 옮겨냈다.


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92)의 「우르비노 공작과 공작부인의 초상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우르비노 공작과 공작부인의 초상화」
(Diptych of the Duchess and Duke of Urbino),
1465-66, 47*33(각각)

우르비노의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매부리코 사나이가 아닐까. 게다가 화려한 빨간 모자까지 쓰고 있다. 당대에 가장 악명 높은 용병대장이었던 그는 군사행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지만, 라이벌 국가로부터는 참여하지 않는 대가로도 돈을 받곤 했다. 그렇게 구축한 부를 통해서 자신의 영지인 우르비노를 문화 중심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애꾸눈이었다. 젊은 시절 마상시합을 하다가 한쪽 눈을 잃은 이후로 모든 그림에는 그의 왼쪽 모습만 나온다. 다른 그림에는 이미 죽은 그의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페데리코는 생기가 넘치고 강인해 보이지만, 공작부인은 창백하고 나약해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다. 그 뒤로 우르비노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3.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1486년, 172.5*278.5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항상 가장 먼저 보는 그림이 「비너스의 탄생」이다. 초기 르네상스의 모든 그림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먼저 10번 전시실, ‘보티첼리의 방’으로 향한다. 문에 들어서는 순간 가만히 눈을 감고, 눈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미로움을 잠시 참으면서 걸어간다. 스무 발자국쯤 걸어가면 걸려있는 왼쪽 세 번째 그림. 눈을 뜨면서 돌아선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비너스가 들어온다. 이러면 꼭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하는 순간 아름다움의 한 전형이 되어버린 작품이다. 가끔은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작품이 있는 법이다.


4.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산드로 보티첼리, 「프리마베라」(Primavera),
1482년, 203*314

보티첼리의 방 남쪽을 장식하고 있으니 이 글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는 두 번째로 보게 되는 작품이다. 「비너스의 탄생」을 통해서 들어간 신화의 세계는 점점 깊어진다. 봄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작품처럼 아름다운 정원이 존재할까 하는 아련함이 든다. 자애로운 비너스의 머리 꼭대기에는 화살을 겨누는 장난꾸러기 아들 큐피드가 있다. 봄날 사랑의 화살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천의무봉 반투명 옷으로 화사하게 감싼 삼미신 중 하나를 향한 것일까. 보티첼리를 통해서 탐미적인 세계로 들어간다. 문득 깨닫게 된다. 나는 유미적인 세상을 보들레르나 오스카 와일드가 아니라 보티첼리를 통해서 처음으로 느꼈음을.

5.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수태고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수태고지」(Annunciation),
1472-75, 98*217

「수태고지」는 피렌체에 남아있는 다 빈치의 작품 중 유일하게 완성된 유화이다. 그가 평생 동안 완성시킨 그림은 스무 점 정도에 불과하다. 밀라노로, 프랑스로 유랑생활을 했던 다 빈치의 걸작은 오히려 다른 미술관에 더 많이 남아있다. 「수태고지」는 다 빈치의 가장 초기 작품에 속한다.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방문해서 수태 사실을 알린다. 마리아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찰나의 순간에 지니고 있는 감정이 이 짧은 한 커트에 묘사되어 있다. 다 빈치의 그림을 보다 보면 우의적이고 상징적인 점이 많다. 「수태고지」도 특이한 작품이다. 일부러 원근법이나 성모의 팔의 길이를 왜곡되게 그린 것일까? 작가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마치 수수께끼로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6. 로소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1494~1540)의「음악 천사」

로소 피오렌티노의 「음악 천사」(Musical Cherub),
1520, 38*47


「음악 천사」는 하나의 완성된 전체가 아니라 큰 그림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나머지 성인들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귀여운 천사 하나만 달랑 남게 되었을까. 일부러 그러려고 해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로소 피오렌티노의 「음악 천사」는 우피치 미술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팔각형 공간인 트리부나를 장식하고 있는 작품이다. 천사를 보고 있으면 그냥 ‘사랑스럽다’라는 표현 외에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류트를 연주하느라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잊은 아기 천사. 음악에 심취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7.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성가족」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성가족」
(Doni Tondo, Holy Family with the infant St. John the Baptist),
1507년경, 지름 120cm

「성가족」은 「도니 톤도」라는 다른 제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도니라는 사람이 주문한 원형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패널에 그린 작품으로 유일하게 완성된 템페라 화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거대한 「천지창조」를 접할 수는 있지만, 이처럼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미켈란젤로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은 없다는 얘기다. 앞쪽의 성가족은 다 완성되었지만, 배경의 인물들은 다 마무리 짓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기예수를 올려다보는 성모의 눈동자와 성모를 내려다보는 아기예수의 눈길이 교차한다. 근육질의 인물들은 마치 조각을 연상케 하고, 몸을 비튼 자세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은 부조에 가까워질수록 더 완벽해진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조각과 회화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8.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

라파엘로(1483~1520),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의 초상」
(Portrait of Pope Leo X with Cardinals Giulio de Medici and Luigi de Rossi), 1518-19, 154*119

지금은 조금 빛이 바랜 감이 있지만, 당대에 라파엘로는 천재였다. 모든 화가들이 질투할 정도로 좋은 주문은 다 꿰차버렸다. 실물보다 더 예쁘고, 더 경건하고, 더 친근하게 그려내는 그의 솜씨를 당대의 부호와 권력자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만난 미켈란젤로는 종종 질투심을 드러낼 정도였다. 물론 시대가 흐른 후 미켈란젤로를 라파엘로보다 뒤에 놓는 미술사가는 없지만, 당시에 자신이 최고라고 믿었던 미켈란젤로 입장에서는 좋은 주문을 쏙쏙 받아가 버리는 라파엘로가 얄미웠을 것이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도 라파엘로에게 조카들과 함께 초상화를 그리라고 주문을 내렸다. 당시는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열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할 때여서 그런지 교황과 추기경들의 심리상태가 복잡해 보인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빨간색의 사용이다. 교황의 모관과 망토, 추기경들의 복장, 쿠션 등에서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색의 농담을 잘 살려내고 있다. 손으로 건드리면 부드러운 벨벳이 와 닿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9.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8?~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The Venus of Urbino),
1538, 119 * 165

티치아노는 어떤 의도로 이렇게 야한 그림을 그렸을까. 신화 속 여신의 누드는 있었지만, 현실 세상의 누드는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티치아노의 그림은 처음엔 ‘벌거벗은(naked) 여인’으로 불렸다. 예술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케 한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모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의도로 그렸는지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약간 헝클어진 금발 머리의 여인이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졌던 시절에 본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오히려 그림으로부터 시선을 외면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있었기에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가 존재했을 것이며, 마네의 「올랭피아」로 이어졌을 것이다. 누드화의 역사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신화를 현실로 끌어내린 하나의 전설이다. 살아있는 여인의 누드도 예술이 된다.


10.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의 「메두사」

카라바조, 「메두사」(Medusa),
1590/1600, 60 * 55

미술사에 회자되는 야사 중에 다 빈치가 메두사를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 그 그림을 본 모든 이들이 질겁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그림이었다. 카라바조의 「메두사」를 볼 때마다 다 빈치를 염두에 두고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징그럽고 짜증이 난다. 악취미다. 이전에 이렇게 흉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없었다. 살인자이기도 했던 난봉꾼 카라바조의 얄궂은 표정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메두사」는 초록빛을 띠는 방패 위에 그려졌다. 아래로는 선혈이 낭자하다. 어둠 속에서 허공에 떠 있는「메두사」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잘못 바라보았다가는 돌로 굳어버릴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온다. 카라바조다운 사실성과 처참함,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감정들이 서로 어우러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