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정현
- 출판
- 삶창
- 출판일
- 2021.04.30
'공식적인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하고, 전황 분석과 숫자가 가득하다. 아울러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자료도 넘쳐난다. 그러나 기억의 전승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 모든 기억의 전승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동반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기억에는 개별적인 인간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쉽게 잊힌다. 특히 국가의 관리 방향과 다른 기억일수록 빠르게 부정되고 소거된다. - P8
이야기와 이미지는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문학과 영화 등의 텍스트가 가장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 충분히 기억되지 못한 그 결여를 채우려는 노력이 동반되지 않은 채 서술되는 기억은 과거를 단조로운 이미지로 박제할 뿐이다. - P9~10
이 책은 한국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국가들의 당시 역사적 상황과 이를 기록한 문학, 영화 등의 텍스트를 다룬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부터 시작된 미소의 갈등으로 전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에서 끌어들여야만 하는 국가였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참전하며 아시아에 관여하고 미국이 힘을 실었던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밀리면서 미국은 소련과의 힘의 싸움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한 제국주의적 과오를 잊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냉전 초기에는 일본 사회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며 의견을 내는 지식인들이 있었고 직접 운동에 뛰어든 청년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동력은 떨어졌고 비판의 목소리는 지속되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 초기 작품은 전후 일본 청년의 공허함을 묘사했다면 오구마 에이지, 존 다우어 같은 학자들은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에 주목했다.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이후에도 미국의 기지로 전용되면서 상당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에 지배당하고 이후에는 미국에 의해 여러 피해를 입었기에 특히나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시간을 거쳤다. 때문에 관련 텍스트를 읽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같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부르며 매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당시 중국 국민들에게 전쟁이 미국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버텨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면 오늘날에는 미중 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자국민을 끌어모으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포로 협상에서 중국군의 2/3 이상이 타이완행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중국 정부를 불편하게 했고 (당연히) 공식적으로 이 진실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진의 <전쟁쓰레기>는 거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로 나뉘어 있던 상황에서 국민당 장교 출신이던 주인공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상황에 대해 다루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과 비슷한 구도에서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고 상황이 전개될지 궁금하다.
중국의 참전으로 타이완은 미국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중국은 타이완을 여러 번 도발함으로써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타이완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냉전기를 거쳤기에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전쟁을 다룬 타이완 텍스트는 천잉전의 <충효공원>에 대해서만 나와 있는데 그만큼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별로 없다. 다만 최근 타이완 작가들의 작품이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것 같다.
2차 대전 후부터 서서히 시작한 미소간 대립은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중국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승리하면서 미국은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곧바로 전쟁에 개입한다. 소련은 암묵적이지만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중국은 많은 병사를 실전에 투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무엇보다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과 엮이면서 반공 정치 투쟁을 심화시켜 정치계 뿐 아니라 문화, 예술업계 등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에요.'란 사상 검증을 강요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 작가의 텍스트에 정작 한국전쟁은 갑자기 떠밀려 휘말린 전쟁처럼 부차적으로 다뤄졌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닥터로의 <다니엘서>는 매카시즘의 광풍을 잘 그린 텍스트라고 한다.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제임스 설터스의 <사냥꾼들>은 공중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미군의 이야기를 그린다. 토니 모리슨의 <Home>은 전쟁의 상처 뿐 아니라 인종 차별 문제까지 함께 다룬다. 제인 앤 필립스의 <Lark & Termite>은 노근리 학살 사건을 다룬다니 관심이 가는데 둘 다 번역서는 찾아보니 없는 것 같아서(누가 번역 좀) 아쉽다. 폴 윤의 <스노우 헌터스>는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닌 이후 세대가 이방인의 시선에서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 텍스트다.
이 밖에도 한국전쟁 관련하여 프랑스, 독일, 영국, 콜롬비아의 역사와 문학 텍스트를 다룬다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국가다. 당시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던 콜롬비아는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군사적인 요구만 늘어나자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이에 미국이 경제 문제 해결을 협력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 개선 및 국가 안정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렸고 정부의 지원도 딱히 없어서 빈곤에 내몰렸다고 한다. 모레노 두란의 <맘브루>가 번역서로 나와 있는데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도서관에 대출해서 조만간 읽으려고 한다.
몇 작품만 언급했지만 이를 비롯하여 많은 텍스트들을 다루고 있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언급하지 않은 많은 목소리들이 텍스트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의 언급과 기억도 축소, 과장되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물질적인 숫자로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라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묵혔던 책을 이제야 끝내서 홀가분한데 읽을 책은 더 많아졌다. 즐거운 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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