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위치는 이산, 이주, 망명으로 인한 상실감과 상처를 경험하면서도 자신들을 억압한 문화의 차별과 폭력에 맞서 비판적이고 급진적이며 소수적인 문화, 특히 타자의 환대에 열린 문화의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뷰한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의 이런 곤경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들어 국권의 상실과 민족 분단으로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식민주의와 분단체제에 의한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면서 이를 극복할 비판과 저항의 형식을 창조해온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민족적 현실 때문에 '자기 민족이 사는 공간'을 떠나야 했던 박탈과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민족이 아닌 민족이 사는 공간'에서도 차별과 억압을 겪어야 했던, 민족과 민족의 사이-경계in-betweenness를 살아온 존재들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소중한 것은 이런 사이-경계의 사유를 토대로 민족 내의 다수자의 체제와 이념의차별적 폭력성을 집요하게 문제 삼으면서 그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6~7
구한 말, 일제 강점기 시기 한반도에 살던 이들 중 자의든 타의든 고향을 떠나 해외로 나가서 정착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미국, 일본, 멕시코, 남아메리카 지역 등 어렵게 그 곳에서 살면서 정착을 위해 애를 썼고 그 중 상당수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기도 하고 실제로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이들도 존재한다. 1900년 무렵 넘어갔다고 한다면 어느덧 1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몇 세대가 흘러간 것이다. 근래 들어 이민 세대들이 딕테, 마이너 필링스, 파친코 등과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놓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이민자들에 대한 생각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재일조선인도 어느덧 3세대가 훌쩍 지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세대 별 재일조선인들을 만난 인터뷰을 기록화하여 담고 있다. 세대가 지나면서 변화하는 재일조선인의 위치와 그에 따른 생각을 확인해볼 수 있다. 다만 인터뷰 시기는 2014년 무렵 10년 전인 경우가 많아 대담자들의 최근 생각이 아닌 것이 좀 아쉬웠다. 그래도 古 서경식 선생님의 경우는 2014년, 몇 년 후로 2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실어서 시간이 흐른 만큼 변화한 생각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1세대가 식민주의와 냉전과분단의 역사적·집단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했고 주로 조국에 대한 집단적 의식을 갖는 경향이 있다면, 2, 3세대들은 그런 경험을 물려받으면서도 일본사회의 일상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1세대보다는 일본사회 내부에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차별과 마주쳤을 것이다. 따라서 2세대 이후에는 모국과의 관계 못지않게 일본사회 내부의 문제와의 깊은 연관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1세대에서는 주로 디아스포라의 집단적 생성이 두드러진다면, 2, 3세대에서는 디아스포라의 개인적 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P8~9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존재쯤 될까. 나의 정체성이 흩어져 있다면 고달픈 생각이 들 것 같다. 원치 않아도 나만 생각할 수 없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태어나보니 우연히 대한민국에 자리잡은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다면 지금의 정체성과는 다른 색채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 자리하든 정체성은 혼란스럽기 마련일 것 같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것이 정체성이 아닐런지. 어쨌든 이들은 몸은 타지에 남아 생활해야 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분투한 흔적을 인터뷰를 통해 엿보게 된다.
첫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1세대 김석범이다. 그는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겪고 일본공산당에 입당 및 탈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화산도’라는 대표작을 써낸 문필가로 지금까지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민족 의식이 뚜렷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도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온전히 그 시절 역사를 살아낸 분 아니던가.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강한 정신을 갖고 버티며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뉴라이트 등의 극우 인사들에 대한 역사 인식에도 비판적 잣대를 들이댄다. 현재의 정치상의 분열과 대립이 과거에서부터 흘러온 것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뉴라이트 사람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고 말이야. 역사는 그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역사의 진리를 가지고 맞서 싸워야 하는거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 문제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겁니다. 다 관계되어 있는 것이죠.
요는 분열의 원인이 외세와 역사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외세와 결탁한 세력, 특히 이승만 같은 친미주의자에 있다는 겁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바라면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서 공작을 하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영·중·소와 조선의 임시 정부가 신탁을 했더라면 꿈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6.25도 터지지 않았고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을 수도 있었겠죠. 앞으로 통일논쟁할 적에는 왜 분열되었느냐, 외세 때문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왜 단독선거가 이루어졌느냐하는 것을 꼭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50
두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2세대 서경식이다. 그는 최근까지도 일본, 한국을 넘나들며 가장 많은 활동을 벌였지 않았나 한다. 조금 더 활동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제는 뵐 수 없게 되어 아쉬움이 든다. 특히 소수자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일조선인 2세대로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들과의 사이에 위치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과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했고 디아스포라라는 개념 자체를 많이 설파했다.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사고한다는 것이 디아스포라적 사고임을 그는 특히나 강조한다. 국가주의적, 국민주의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이는 차별이 아닌 차이를 보아야 하는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라는게 한 마디로 하면 국가에 거리를 두고 국가에 대항해서 하는 사고죠. 그러니까 디아스포라적인 사고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국민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속하고 일본의 다수자, 미국의 다수자가 디아스포라적인 사고를 가져야지 대화도 이루어지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간단치 않아요. 그런데 적어도 지식인, 글 쓰는 사람, 예술 하는 사람은 잘 견디고 그 방향으로 다수자를 교육해야 합니다. 소수자가 "소수자, 싸워라"라고 하면 아까 말한 악몽이 이뤄지기 쉬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에요. … 조국이 분단되어 있고, 이렇게 계속 70여 년 동안 차별을 당하면서도 40만 넘는 사람들이 그래도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 사람들 중에 제가 볼 때에도 민족적인 지식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조선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있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에요. - P105~106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재일조선인 2세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어떻게 민족의식을 만들어 내었는가'를 볼 때는 이 사람이 일본사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해요. 나라는 사람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 소위 재일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 그런 사람들이 일본사회를 묘사할 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보고 있는지, 그걸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의 의식을 분석한다, 연구한다고 할 때, 재일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시선으로 세계나 사회를 다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 P143
세 번째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최덕효다. 그는 영국 셰필드 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문제를 박사 논문으로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인터뷰에서 특히 역사학자로서의 보편적 고민, 그리고 일본의 주장과의 충돌에서 오는 불편함과 갈등 등을 논한 부분이 정말 좋았다. 그는 존 다우어의 책 ‘패배를 껴안고’라는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다우어는 미국의 점령에서 일본인의 목소리와 행위에 주목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제국의 유산과 재일조선인과 같은 식민지적 유산에 대한 문제나 비판은 누락되어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서도 일본과 미국의 입장은 있지만 한국의 입장은 빠져 있다는 비슷한 비판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야말로 일제의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어떻게 통합하여 얘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가 본류고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주변에 있는 다른 역사가 아니라 이 둘을 역사적으로 동시에 볼 수는 없을까? 이런 문제 의식 하에서 이 두 역사를 재일조선인의 시각 속에 통합합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 혹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제 관심은 국경을 넘어선 체제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하듯이 일국사 내지 민족사가 아니라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한반도의 역사를 연결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 P184
마지막 대담자는 재일조선인 3세대 정영환이다. 그는 조선근대사와 재일조선인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로 개인적으로 몇 차례를 통해서 글을 만난 적이 있어서인지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국내에서 논란이 된 후 그 책이 일본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책으로 펴내며 한국 사회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박유하의 책이 소비가 된다는 것은 그 담론을 받아들이면서 전쟁과 식민 지배 책임에 대한 일본의 호응이 있다(국내 일부 극우 인사들도 마찬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1994년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고 1998년에는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켜보며 자란 세대다. 그가 조국을 복잡한 심경으로 느낀다는 부분은 솔직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최근 지역사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사 속에서 조선인들의 모습에 대한 연구를 넘어 제3세계에 대한 연구라니, 앞으로 그의 글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조국의 문제는 학교에서 항상 제기되는 문제, 어떻게 조국에 보답할까?, '당신은 일본에 있지만, 어떻게 조국을 위해서 살 것인지? 하는 문제들, 그러니까 조국을 위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직접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죠. 학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조국이 고등학교 시기까지 내가 아는 조국이었고, 학교 다닐 때 공책, 학습장이나 그런 것을 사도, 모두 총련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금강산이나 묘향산, 평양에 있는 여러 시설들이 그려져 있었죠. 조국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어요.
저에게 ‘조국’은 동질성을 느낄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느낄 경우가 많은 대상입니다. 다른 세계인데 한편에서는 친밀감도 있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 P257~258
재일조선인 각 세대별 언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1세대 만해도 조선의 말과 글을 쓰고 지켜야 한다는 구속이 강했겠지만 2세대, 3세대에 가면 그 구속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언어적 행위를 이행했는가.
아래는 차례대로 김석범, 서경식, 최덕효인데 1세대와 2, 3세대가 구별됨을 확연하게 느끼게 된다. 일본어가 편해진 2, 3세대는 오히려 조선어를 말해야 하는 것이 더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한국어를 잘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놓지 않는 자세가 놀라웠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언어의 두 측면은 개별성과 보편성입니다. 개별성이란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일반적으로는 민족이죠. 그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도 한국어도 다 민족과 연관되어 있죠. 발음도 그렇고 글자의 모양도 그렇고요. 또 하나의 측면은 보편성, 말하자면 그것을 다른 언어로 대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근대 일본말이라는 건 거의 서양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과 한국에도 퍼져 나간 것이죠. 이런 점은 일본이 동아시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죠. 이런 번역을 통해 근대 문명을 동양으로 보편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죠. 내가 작가로서 언어의 주박을 느낀 것은 일본어의 민족적인 측면입니다. 모양만이 아니라 일본어 발음이나 글자 등이 일본적인 것이지 조선적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데서 주박을 느끼기 시작한것이죠. 일본 사상뿐만 아니라 글 자체로서 말이죠. 그것과 더불어이전에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 등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본적인 의식의 잔재, 일본어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구속성, 그런 주박, 더 나아가 우리를 지배한 지배자의 글로 써야 한다는 굴욕감 이런 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겁니다. - P60
저는 한국어를 완벽하게 사용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동시에 느끼고 있어요. 디아포스라적인 것인지 제 개인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 본심입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을 그래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일본어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한때는 오랫동안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해방될 수 없는 식민지 시민이다'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느꼈었어요. 고등학생 때 제 시가 시집에 실렸는데, 후기에 앞으로 다시는 시를 안 쓸 거라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일본어로 표현하는 것에 반해, 나는 한국어로 표현할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때 벌써 그렇게 느꼈어요. - P98
제 신체 감각으로서는 일본어가 제일 편하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이 조선사람으로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가 편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본어가 편한 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어를 민족의 자격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구축하려고 하면 언어를 고민해야 하고 항상 일본어를 상대화하려는 노력, 즉 일본어가 모어라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면서 그런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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