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공부를 좋아하고 즐긴다. 그러나 평소 내가 하는 독서와 글쓰기가 '공부'로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다 보면 선명해지는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질문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찾아오면 불안감과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 김영민은 작년 <생각의 요새>에 언급되어서 처음 알게 된 뒤로 언젠가 한 번 그의 저작을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는 '동무공동체'로 이름이 알려져있기에 핵심 저작을 읽는다면 <동무론>, <동무와 연인>이나 <비평의 숲 공동체>를 읽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먼저 관심이 가는 주제인 공부와 관련된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전자책도 나와 있어 주저않고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에필로그 보고 피식 웃었는데 저자의 글을 읽는 이는 모두 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자폭이지만 솔직해서 좋았다. 실제 읽어보면 그럴만 하다 싶기도 한데 바탕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로 이 책을 읽는다면 말 뜻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대체 나는 왜 공부를 좋아하고 계속 이어갈까 질문한 적이 있다. 보복 심리 같은 것일까. 어릴 적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있다. 대학 전공을 취업을 위해서 선택한 탓도 있는 것 같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공부한다. 공부는 내게 읽고 사유하는 과정이다.
'공부는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변화를 하려면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질문을 하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안정적으로 아는 관념과 틀 안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탄력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일텐데 같은 방식을 답습한다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저자의 '자기체계의 안정화'라는 말에 너무나 공감했다. 더 이상 긴장 상태에 들어가려하지 않음은 공부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책이 잘 안 읽히고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 돌파구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머리를 비우고 잠시 내려놓는 것이 방법인가 고민한 적이 있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싫증이 생기면?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覺懶看書, 則且看書.)'고 말한다. 왠지 희망적이지 않나. 희망 섞인 말이라도 믿고 싶어지는 주문 같은 말이었다.
글을 쓸 때 늘 나의 문제점만 보인다. 왜 나의 글은 특색이 없을까 고민한다.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하여 자신만의 고유적인 글쓰기를 하라 주문한다. '관념을 회집, 운용하는 재주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박자에 맞는 사유와 글쓰기의 개성을 창조하는 게 관건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겹치고 헤어지는 리듬이 박자라고 했듯이, 글쓰기의 개성적 박자 역시 각자의 삶의 양식과 그 무늬가 글과 겹치고 헤어지는 오랜 연성(練成)의 과정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 그러므로 오직, ‘사는 일’ 속으로 다 불러들일 것!' 나의 삶과 철학이 글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내 글에 삶(구체성)은 있어도 철학(이론이나 관념)은 없거나 철학은 있는데 삶이 없다면 고민해보고 변화시켜 적용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오롯이 '자신'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발을 맞추어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공부를 위한 만남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경험은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된다.
20대 후반부터 독서 모임, 동호회, 커뮤니티를 통해서 여러 사람을 만나 공부했다. 혼자 공부할 때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과의 부딪침 속에서 착각이었음을 여러 차례 느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앎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서재는 또 다른 공부의 기회가 되지 않나 싶다. 시간을 들여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사유하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댓글까지 달면서 소통한다면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우선 이 몸의 사실에 대한 인식, 그 몸의 정치성에 대한 체감에 근거한다. 그것은 그 몸의 주변자리로 내 감성과 인식을 넓히는 일이다. 내 몸을 내 이기주의의 텃밭이자 진지로 삼기보다 타인과 세상의 메커니즘을 알아 가는 촉수이자 매개로 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쉽사리 체계의 바깥으로 외출하지 못한다고 하듯이 그 누구도 임의로 자신의 몸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몸의 주변자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전체를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게 될 때 마침내 우리의 몸은 작고 견결한 실천들을 통해 외부성의 확보에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인식의 전체성+실천의 일관성=외부성). 그러므로, 몸이 좋은 사람의 이념에 있어서, 약빠르고 반지빠른 영악과 변덕은 영영 비각이다. 내가 지원행방(知圓行方)이라는 숙어를 곧잘 호출하곤 했지만, 지원이란 곧 주변자리에 스며든 전체성의 인식을 가리킴이요, 행방이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선택한 작은 실천의 일관성이며,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위해 소용되는 외부성이란 바로 이 인식과 실천의 병진에서 가능해지는 결과인 것이다.
‘만남’이 주는 비대칭의 체험은 물질의 문제, 무엇보다도 피와 살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사들, 혹은 몸공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모른다’. 아니, 차라리 몰라야만 한다는 게 옳다. 반복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쳐 말하자면, 무사들은 모든 ‘타자’의 대접에 (그들의 실력과 운신을 전혀 ‘모르는 듯’) 극진할 때라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
저자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층과 문화에 대해 비판하는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 사회의 대화문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먹통인 남성 기득권자들의 체계적 반(反)대화성은 우리 사회의 농축·급속·편파의 남성적 근대화나 군사주의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이른바 심층 근대화의 과제에서 우선순위다. 각종의 통계는, 특히 남자들의 비(非)대화성과 이와 관련된 여자들의 불만을 지목한다. 나는 1990년대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운동을 벌이면서 ‘여자의 말을 배우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생활인문학적 실천의 진장(振張)에 미력을 보탠 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화문화의 파행을 속으로부터 고쳐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가령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지식인들의 다수는 "언제 언제면 이런 글을 쓰겠다"거나 "이런저런 일을 끝내면 저 책을 읽겠다"는 따위의 말을 자주 하면서 버릇처럼 연기하는데, 내가 실천해 오고 또 후학들에게 권한 방식은 오직 현재 속에 직입하는 것으로 공부의 실천을 쉼 없이, 곧장, 당장 하는 데에, 그리고 그 버릇을 자신의 몸(무의식) 속에 기입하는 데 있다.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을 만한 내용들이 많다. 곱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뭉근한 말들이 녹아 있어서 재독, 삼독해도 좋을 만한 책이라 생각했다.
기성의 체제를 확인하고, 그 네트워크 속에서 안돈(安頓)하고, 그 교조(敎條)를 복창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만남과 사귐이라는 것조차도 거친 술어들(차이들)의 순치나 체계내적 사회화를 위한 알리바이로 저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 굳이 화이부동인 것. 그러므로 불화는 진정한 불화이어야 하며 차이는 진정한 차이(real differences)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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